생각할 게 좀 있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출근길 버스안에서 계속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어 카드를 찍고 문 앞에 섰다. 버스는 멈췄는데 문이 열리질 않는다. 나는 문 좀 열어주세요, 라고 기사님께 큰 소리로 말했고, 기사님은 문을 열어주시면서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세요!" 하셨다. 나는 속히 내리며 당연히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는건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걸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내가 벨을 누르지는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안눌렀구나. 내가 벨을 누르질 않았어. 맙소사. 하도 열심히 생각했더니 벨을 누르는 걸 잊어버렸어. 헐.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벨 누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지하철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 생각의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읽자, 생각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비 때문에 눈이 질퍽해지자, 에리카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제한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운전했다. 실수로 들어간 히싱엔에서 빠져나오느라 거의 30분을 허비한 그녀는 이제 우데발라로 향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에리카는 우데발라 북쪽의 토르프 쇼핑센터에서 E6로 빠진 뒤 맥도날드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치즈버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나서 곧 고속도로로 들어섰다.(p.54)
아니... 이여자, 뭐야? 나는 버스에서 내릴때 벨 누르는 걸 잊긴 하지만, 맙소사, 끼니를 잊은 적은 없다. 아니 어떻게 자신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꼬르륵 소리가 나야 그 때 비로소 알 수있는 거지? 아니, 그게 가능해? 나로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나는 매 끼니를 중요하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텐데, 나는 끼니때를 조금 넘기기라도 하면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초조해진다. 어떻게든 빨리 늦지 않게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그 때는 모든 판단들을 똑똑하게 내릴 수가 없다. 내 실수는 대부분 배고플 때 일어난다. 이건 우리 식구들 중에서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비슷한데, 우리는 굶어본 적도 없으면서 굶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나는 더한데, 몇 년전에 한의원에 가서 이런 증상을 얘기하며 '이런 저는 저혈당이나 저혈압 뭐 이런걸까요?' 라고 닥터에게 묻자, 나를 진료한 닥터가 '저혈압 같은거 없고요, 락방씨는 신경성인것 같은데요. 굶는거에 대해 신경쓰는거죠' 라고. 헐. 이런것도 있나. 뭔가 부끄럽고 챙피했는데...어쨌든 나는 매끼니가, 한 끼 한 끼가 무척 소중한거다. 사람의 수명을 백년이라고 봤을 때, 그마저도 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주로 주는대로 먹게되지 않는가.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은걸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건 고작해야 팔십년 밖에 안되는거다. 그 팔십년의 끼니를, 고작해야 팔십년의 끼니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어느 한 순간도. 내가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그 수많은 날들 속에서도 '굶기'를 선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그 팔십년의 끼니동안(그래봤자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나 많아 졌으므로 남은 세월이 또 줄었다), 거르고 싶지 않고 맛없는 걸로 먹고 싶지도 않다.
'실버스타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영화 <데몰리션 맨>은 미래가 배경인데, 실버스타 스탤론은 과거로부터 잠들어 있다 깨어난 상황이었다. 모든 삶들이 기계로 대체가 가능한데, 섹스조차 실질적인 몸의 접촉 없이 기계로 하던터라, 이에 실버스타 스탤론이 분노하며 산드라 블록에게 실제로 입을 맞추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 산드라 블록은 그걸 처음 경험해보고 놀라워하고 좋아하는데, 나는 만약 끼니에 충분한 한 알의 알약이 세상에 나와도, 끝까지 음식 먹기를 고수하는 1人이 될 것 같단 생각이 오늘 들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후후 불며 먹는 걸, 노릇노릇하고 기름이 좔좔 흐르게 삼겹살을 굽는 걸, 한 손에 나이프를 쥐고 한 손에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써는 걸, 가끔은 포기김치를 손가락에 고춧가루 묻혀가며 좍좍 찢어먹는 걸, 정말이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점차로 알약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한다면, 나는 인터넷으로 '음식 먹기 모임' 을 만들어 최대한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가며 내 눈으로 음식을 보고, 내 코로 음식의 냄새를 맡고, 내 입 안에서 혀로 굴려가며, 내 이빨로 씹어서 음식을 삼키고 싶다. 내가 배 부르려면 내가 직접 음식을 씹어 삼켜야 하고, 내가 취하려면 직접 내 입을 통해 알콜이 들어가 혀 곳곳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음식은 위로다. 아니, 맛있는 음식은 위로다. 애인이 위로가 되는 순간도 분명 있지만, 그건 나를 폭 안아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눈을 맞출 때, 그 때뿐이다. 음식은 애인보다 더 빈번히 나를 위로한다. 무려 하루에 세 번이나 위로하니까. 그러니 애인하고는 헤어져도 밥하고는 못헤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끼니를, 밥 먹는 것을 잊다니! 배가 꼬르륵할 때야 내가 오늘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먹었구나, 하는 걸 알다니. 맙소사. 이건 말도 안된다니까, 정말.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밥맛이 없었던 적은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밥 먹는 걸 잊지는 않는다. 나는 밥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밥을..........
어제 퇴근 후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엄마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저녁 메뉴는 묵은지닭볶음탕. 어때 땡기지?>
나는 저 문자를 받은 그 시점부터 안절부절, 백화점에 갈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곧바로 갈테닷. 하고 퇴근후 고고씽, 가면서 동료에게 '나 묵은지 닭볶음탕 먹으러간다' 이러면서 신나게 나섰다. 묵은지 닭볶음탕이 기다리는 홈, 마이 해피 홈, 마이 스윗 홈, 너무 좋아. ㅠㅠ 완전 맛있어서 기절할 뻔했다. 엄마는 내게 너 백화점 들렀다 온다고 하지 않았니? 물으셨고,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니, 나 백화점 가게 할 거였으면 묵은지 닭볶음탕 해놨다는 문자를 보내면 안되는거지! 점심엔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