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이런 그림이(책에는 흑백으로) 실려있다.
이 그림 밑에는 이런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Dan Jones|Cable Street Anniversary. 1936년 영국 파시스트들이 유대인 지역을 관통하여 행진하려는 것을 50만 민중이 막아 낸 일을 기념하는 축제.
나는 이 축제가 뭔지 궁금한 마음에 검색창을 열고 검색해 보았지만 결과를 찾아낼 수 없었다.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내가 검색 병신이라서 못찾는 것 같긴 한데...어쨌든 저 짧은 설명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50만 민중이 막아냈다는 것이. 그들이 연대하여 막아냈다는 사실이.
사실 끝까지 다 읽고나면 이 책의 저자인 류은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대단한 인권운동가인지 알 수 있지만(덧붙여진 유해정의 글로 알 수있다), 정작 류은숙 본인은 자신이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고 서툴렀는지를 고백한다. 좀 더 나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녀가 고민해왔던 순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데, 그건 우리 모두가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해보았던 고민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공포영화에 관한 부분은 공포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심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 아찔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붙잡고 고개를 처박을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을 때만 간혹 곁눈질로 몇 편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 안 가는 공통적인 장면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말 무서운 상황인데 등장인물들이 꼭 "난 이리 가 볼 테니 너는 저쪽으로 가 봐." 라고 하고는 흩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울 때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게 정상이지, 왜 째지는 거야? 당장 괴물이나 괴한이 나타날 상황인데 저건 말도 안 돼!' 이러는 것은 내 생각을 뿐이다. 그렇게 흩어놔야 피 흘리는 희생양이 생기는 것이 잔혹공포영화의 여전한 규칙이다. 이와 반대로, 사소하지만 무섭기 때문에 살고 싶어서 꼭 붙어 있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pp.14-15)
세상이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한지 잘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와 너를 분리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들었다. 연대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한 글이 바로 이 글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로 내 생각이 그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저 막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부분들이다.
상상의 요구만으로도 지레 겁먹은 친구들이나 나 자신도 방어 본능에 따르고 쿨한 그런 관계보다는 당연히 더 깊고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 사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고 살면서는 늘 허전하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은 상상의 위치이지 현실의 위치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이런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사가 좀 많은가. (pp.21-22)
1996년, 나는 런던 앰네스티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날 펴 본 신문 1면에 활짝 웃는 여성 네 명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평화의 여성들, 무죄 선고 받다."라는 제목에, 관심을 확 잡아끄는 내용이었다. 그녀들은 그해 1월 영국의 방위 산업체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의 호크 전투기에 침입해 주요 조종 장치를 망치로 때려 부쉈다. 그 전투기가 인도네시아에 수출돼 당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의 민간인 살해에 이용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2년에 비로소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의 당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나는 눈물 속에서 태어났고 눈물 속에서 자랐고 눈물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가 당시 동티모르 인권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30년 가까운 식민 치하 속에서 제목 그대로 대량 학살 등 갖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호크 전투기의 조종 장치를 부순 여성들은 조종석에 동티모르의 학살 희생자 사진을 붙이고 자신들이 한 일을 언론에 전화로 알렸다. 이들은 재판에서 동티모르의 민간인 대량 학살에 사용될 호크전투기를 무장 해제시킨 자신들의 행동은 유엔의 '집단살해방지협약'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 정부가 그런 학살 행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온갖 평화적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 뒤에야 전투기를 무장 해제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게 됐음을 증언했다. 그 결과 법원은 "더 큰 악을 방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수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pp.43-44)
몇 해 전 한국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앞에서는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Ken Saro-Wiwa의 구명을 위한 집회가 있었다. 초국적 기업 셀과 그 기업과 결탁한 군부의 석유 채취와 인권 탄압을 고발한 것이 켄의 죄명이었고, 전 세계적인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켄의 사형은 집행됐다. (p.128)
자기 사유를 실천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만남의 끈 가운데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과의 집단 상담으로 연대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도 있다. 정혜신 씨와 고문의 경험을 나눴던 강용주 씨와 고문 피해자들은 쌍용자동차의 상처와 자기들의 상처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며 고문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지원금으로 썬뜻 내놓았다. 그런 연대를 통해 싸용자동차 노동자들과 만나 세상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고 함게 어루만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또, 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평택에서부터 물집이 터져 가며 걸어서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서울에 차려진 쌍용자동차 관련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지키러 올라왔다. (p.157)
나는 주인이니 주체니 하는 단어보다 '자기'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로 느껴져서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없는 연대는 있을수 없다. 기껏해야 머릿수를 채우고 세를 과시하려는 동원일 것이다. 내가 고유한 자기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학대할 때 그렇지 않다고 야단 떠는 이들이 있기에 다시 웃게 된다. 나에 대한 모욕에 같이 싸워 주는 다른 자기들이 없으면 나를 지킬 자신이 없다. 그런 자기들이 만나서 서로의 낯을 세워 주는 것이 연대하는 개인주의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 정희승의 <숲>이라는 시가 그 어떤 기나긴 설명보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pp.160-161)
사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처럼 인권을 위해 운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분명 들지만, 내가 그 운동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나는 아직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사람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이 살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기보다는, 내 자신 하나를 위해 더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 척 보기에도 힘들어보이는 길을 갈 생각이 좀처럼 없는걸 보면,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가진 게 많은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서투른 연민을 가진 자일지도 모르고, 동정은 하되 공감은 하지 못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눈물 몇 번 흘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닌데. 입맛이 쓰고 마음이 편치 못하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내 주변과 이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조금쯤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아씨..머릿속이 좀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