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어제 출근길 강남역 1번 출구 앞에서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줄을 서서 길을 만들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에너지 음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출근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인지 간혹 그렇게 그 앞에서 무언가를 나누어주는 일이 많다. 햄버거를 나눠주기도 했었고 두부를 나눠준 적도 있으며 캔커피는 수두룩하고 에너지바도 나눠줬었다. 그때마다 나는 받아들고는 하나 더 주세요, 라고 말해서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 직원과 먹었더랬다. 어제는 유독 나눠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제품의 홍보일텐데 열 명도 넘는 남자사람과 여자사람들이 단체로 유니폼을 맞춰 입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하나 더 받아가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도 내게는 주질 않았다. 그들 모두가 나를 보았는데도 주질 않았다. 분명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 받아가는거 봤는데. 좀 당황스러웠다. 결국 그 길을 다 통과할때까지 주질 않아서, 이거 사람 가리나, 주는 사람 안주는 사람 따로 있는건가 싶어서 몇 걸음 더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나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이 하나씩 받아들고 가고 있었다. 나는 어제 아침, 강남역 1번출구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거다. 무시당한걸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왜 나는 안주냐고 따지기에도 면팔리고, 대체 이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해하면서 회사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등학교때가 생각났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해마다 고등학교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축제 시즌이 되면 인근 남자학교에서는 초청장을 들고 우리 학교 앞 교문에서 하교하는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초청장을 하교하는 모두에게 나눠주는게 아니라 몇 명에게만 가서 나눠주는거다. 쭈삣쭈삣 서있다가 누군가에게로 다다다닥 가서 나눠주고는 꼭 오세요, 했던것. 나는 1학년때도 2학년때도 3학년때도, 정말이지 3년 내내 단 한번도 그 초청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예쁜애들에게만 나눠주는건가,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마다 한 번도 받은적이 없어서 나는 거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래서일까, 상처받은 내 자존심은 초청장을 받지도 않은 곳에 갈 필요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단 한번도 다른 남자고등학교의 축제에 가본일이 없다. 아,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 ㅠㅠ


에너지 음료를 못받았더니 과거의 아픈 추억이 떠올라 버렸어. 그 에너지 음료, 시중에서 보기만 해봐라. 내가 안티할테닷!



















어제 오늘 출근길에 읽었던 책은 무라카미의 에세이인데, 아, 나는 정말이지 하루키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루키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렇게까지 많이 웃게 하지는 않는다. 사랑합니다, 하루키님. 님 덕에 제가 웃고 살아요.



하루키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는 에세이에서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이 의욕적인 우머나이저(색한)로 유명하다는 일화를 밝히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심농 씨 본인은 노벨문학상을 노렸던 모양인데 결국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삼 년 전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농이 섹스마니아였다는 것은 전설이 되어 문학사에 찬연히(는 아닌가) 빛나고 있다. (p.122)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나는 앞으로 심농이 섹스마니아였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것 같다. 심농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아서 그의 책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그렇기에 그가 위대한 작가인지 어떠한지도 모르지만, 그가 섹스마니아였단 사실만큼은 잊지 못할것 같다. 아, 하루키는 그런걸 궤뚫고 있는거다.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을! 


순무 이야기를 읽다가 진짜 빵터져버렸는데,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일본의 [곤샤쿠모노가타리]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옛날에 교토에서 도쿄로 향하는 남자가 있었다. 밤중에 모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격렬한 성욕이 밀려와 '안 되겠다, 더는 참을 수 없어' 하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때마침 그 옆에 순무밭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 커다란 순무를 쑥 뽑아서 구멍을 만들어 그 순무와 유희를 즐겼다(유치원 놀이극에는 맞지 않는다). 몇 분 뒤 "아, 좋다"하고 남자는 그 순무를 밭에 던지고는 여행을 계속했다. 순무는 가엾지만, 뭐 소녀를 강간하는 데 비하면 훨씬 죄가 가볍다.

다음 날 아침, 밭주인의 딸(열다섯 살)이 그곳에 왔다가 그 구멍 뚫린 커다란 순무를 발견했다. 그리고 "어, 뭐지? 구멍이 뚫려 있네" 하면서 그걸 먹어버렸다. 그랬더니 몇 개월 지나 배가 볼록하게 불러왔다. 명백한 임신이었다. 부모는 "너 대체 무슨 망측한 짓을 저지른 거냐"하고 다그쳤지만, 딸은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 (p.178)


아. 순무와 해버린 남자, 남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순무, 그저 '먹었을' 뿐인데 임신해버린 소녀. 모두 가엾다. 가여워 미치겠어. 불쌍하지 않은 자 그 어디에 있는가. 물론, 위로 들어간 정액은 수정 되는게 아니라 소화가 된다. 그러니까 순무를 먹었다고 임신하는건 불가능한 얘기. 그렇다한들, 오오, 어쩐지 있을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버스안에서 아, 이들을 어쩌나 싶었다. 다들 가여워. 흑흑. 순무를 먹고 임신했다고 아무리 말해도 누가 믿어주겠어. 모두 가여워, 모두. 흑흑. 



스페인 사인회 얘기도 무척 재미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인회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것으로, 두 시간 가까이 사인했는데도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여자아이들이 책에 사인을 받은 뒤 "무라카미 씨, 키스해 주세요" 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거짓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뺨에 키스를 했다. 계속 그렇게 하니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사 사람은 "시간 없으니 키스까지는 하지 마세요" 라고 했지만, 그런 기회는 흔치 않으므로 "아뇨, 작가로서 마지막까지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라고 주장하며 원하는 대로 키스해주었다.

사인하고 악수를 청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키스를 원한 것은 스페인 뿐이다. 게다가 멋진 아가씨들이 많아서 ‥‥‥아,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해야지. 세상의 미움을 한몸에 살 것 같다. (pp.109-110)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사인회를 통 좋아하질 않아서 직접 가서 사인을 받는다거나 하는일이 없는데,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구나. 사인을 받고 키스까지 요청하다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그걸 '작가로서의 의무'라고 하는 하루키라니. 하하하하하하하하. 


무엇보다 나는 하루키가 맥주 이야기를 할 때 제일 좋았다.


그래도 세상의 모든 신 앞에 정정당당하게 맹세하는데,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p.142)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나는 캔에 마시는 맥주를 싫어한다. 집에서도 캔맥주를 마실 때면 대부분 유리컵에 따라 마신다. 캔에 들어있는 맥주는 어쩐지 짝퉁같은 기분이 들어서..물론 귀찮을 때는 그냥 마시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는 맥주는 유리컵에 따라 마시는 맥주다. 그 빛깔을 눈으로 고스란히 보면서 마시는 맥주. ㅋ ㅑ ~~~~~~~~~



맥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은 날씨가 이러니만큼 매일 맥주를 마시면서 지내고 있다. 어제도 마셨다. 그러다가 오늘 알라딘에 접속해서 어제부터 하루특가였던 믹스넛트를 주문하고 말았다. 매일 맥주를 마시는 날이 앞으로 적어도 한달간은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여동생 집으로도 하나 보냈다. 히히히히히. 요즘 여동생 부부도 저녁에 곧잘 맥주를 마시는 모양인데, 먹으라고. ㅋㅋㅋㅋㅋㅋㅋ 아, 빨리 와서 맥주 마셨으면 좋겠다. 희희희희희.



어제 집에가니 알라딘 박스가 도착해 있었다. 으응? 나는 뭐 주문한 게 없는데? 박스 안은 이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꺅 >.< 완전 짱좋아! 안그래도 하나씩 사모아야지, 막 이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생일이 좋긴 좋구나. 간절히 바라는 게 손에 들어오기도 하고.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동감동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떻게 알고 이걸 보낼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이 다섯 권 모두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남자고등학교 축제에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지만, 하루키 에세이 다섯 권을 선물 받는 어른이 되었다. 훗. 이게 더 낫다. 아무리 생각해도.




댓글(5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blanca 2012-08-1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인회와 순무 얘기에 ㅋㅋ 쓰러집니다. 이 귀여운 솔직함이라니! 그리구요 다락방님 생일이 9월달 언저리 아니였던거가요? 저랑 비슷하셨던 것 같아서. 에세이 다섯 권 선물 받는 여자가 저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데요. 에너지 음류 한 박스보다요^^;;

다락방 2012-08-10 13:21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아니요, 8월달, 사자자리 입니다, 블랑카님. ㅎㅎㅎㅎㅎ

그쵸. 저는 에너지 음료도 못받았지만 에세이 다섯권을 무려 세트로 받았어요! 꺅 >.< 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지요. 훗.

저는 순무 얘기가 웃기다가 슬프고 슬프다가 웃기고 그랬어요. 하하하하핫

얼음장수 2012-08-1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이지 글썽이며 글을 읽었습니다.
저도 하루키 에세이 (일단) 2권 주문했습니다.
페이퍼를 읽으니 마구마구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다락방 2012-08-10 15:36   좋아요 0 | URL
얼음장수님, 저를 동정하지 마세욧!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뭐, 그래도 해피엔딩이 됐으니까(무슨말인지...) 괜찮아요. ㅎㅎ

오, 하루키 에세이 주문하셨군요! 주말에 읽으시게 될까요? 재미있게 읽으세요. 좀 키득키득 거리면서 말이죠. 훗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