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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 프로젝트 - 정규 2집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노래 / 파스텔뮤직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에피톤 프로젝트의 「눈을 뜨면」을 아주 좋아하는 여동생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대체 이사람은 어떤 사랑을 한걸까, 하고. 나는 동생에게 그가 별다른 사랑을 한게 아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같은 혹은 너같은 여자를 사랑했을 것이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음악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라고. 사랑이란게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비슷비슷하다. 별다를게 없다. 그러나 그 사랑에 빠진 당사자, 그리고 그 사랑을 끝낸 당사자에게는 특별하다. 그걸 표현해내는 걸 에피톤프로젝트가 한다.
이번 앨범을 받아들고 시디를 재생시키고서 처음엔 좀 당황했다. 내가 전(前)앨범에서 좋아했던 「눈을 뜨면」이나 「이화동」만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 곡이 없어서. 전체적인 만족도로 기존 앨범에 못미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피톤프로젝트에 실망을 했다거나 앞으로 좋아하지 않겠다거나 하는건 결코 아니다. 아마도 반복해서 듣다보면 내 귀에 특별히 더 좋은 노래가 생길것이고 더 익숙한 노래가 생길것이다. 아직까지는 대표곡인 「새벽녘」만 좋아서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방안에 이 앨범을 걸어두면 전체적으로 만족도는 높다.
앨범의 타이틀이 『낯선 도시로의 여행』인데, 아,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걸까. 아니면 사랑하고 헤어졌던 연인이 먼 곳으로 가버린걸까. 그녀가 먼 곳에 있음을 나타내는 가사들이 귀에 들어온다.
우연히 들은 소리를 괜히 흥얼대듯
무심코 접한 한 줄의 글에 이끌리듯
손닿은 모든 것들이, 시간에 바래지 않길
나는 너에게 진심을 다해 말해
너를 끌어안고 순간에 맺힌 기억,
열 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
어떤 모습일지, 잊혀 지진 않았을지
이제 여기에서 어떤 말들을 시작할까? - 「이제, 여기에서」 中
언젠가 먼 훗날의 나도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거라는 막연한 다짐때문인지 '열 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 하는 가사를 그냥 넘길수가 없다. 이 노래를 듣고 났더니 「새벽녘」의 가사도 예사로 들리지가 않는다.
밤새 내린 빗줄기는
소리 없이 마름을 적시고
구름 걷힌 하늘 위로
어딘가 향해 떠나는 비행기
막연함도 불안도
혹시 모를 눈물도
때로는 당연한 시간인 걸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함께했던 시간을 꺼내놓고
오랜만에 웃고 있는 날 보며,
잘 지냈었냐고 물어 보네 - 「새벽녘」 中
어딘가 향해 떠나는 비행기, 를 그는 허투루 넣은게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빗줄기가 '그녀를 혹은 그시간'을 떠올리게 했다면 비행기는 '먼 곳에 있는' 그녀를 떠올리는게 아닌가.
역시 한 가수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곡을 듣기 보다는 앨범 전체를 듣는게 도움이 된다는 당연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여행'이라는 앨범 타이틀에 걸맞게 제목들도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혹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나타낸다. 「터미널」, 「초보비행」, 「국경을 넘는 기차」, 「떠나자」등이 그렇다. 「믿을게」란 제목을 가진 노래도 있는데, 새삼 에피톤프로젝트란 얼마나 믿을만한 음악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하고, 그 앨범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 듯하다. 그는 전 앨범에서도 아팠고 이번 앨범에서도 아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둘 사이에 놓여있는 물리적 거리도 또 마음의 거리도 감당하기 힘들다. 열 한시간을 걸려 그곳으로 날아가도 그가 할 수 있는건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일 뿐이다.
나는 아직 이 앨범의 모든 노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앨범에 실린 노래들의 가사들을 가만히 읽어보노라면,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노래로 듣지 않아도 나는 이미 공감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아름다운 음악에 아름다운 가사로 듣는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것, 하나의 스토리가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 그래서 앨범의 발매소식만 들어도 가슴 떨린다. 이게 에피톤프로젝트의 능력이며 힘이다. 내가 그의 음악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아주 오랜만에 시디에 딸려온 포스터를 버리지 않았다. 방 문에 붙여둘 것이다. 나는 이 앨범을 오래오래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