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필요로 했던 가장 맞춤한 책
젠장, 사진을 올려도 어떻게 틀리게 적은걸 올렸을까. 제보가 들어왔다. height 는 [헤이트]가 아니라 [하이트]라고. 나는 영국발음은 헤이트니까 뭐 저것도 틀린건 아니겠지, 하고 멍- 했다가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영국이든 미국이든 저 단어는 [하이트]로 발음한다는 걸 알게됐다. 아 ... 쪽팔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그 글을 읽었는데...... 다들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height 가 헤이트라는것에 전혀,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건 강한 확신이었다. 확신이 와르르 무너졌다. 너무 부끄러웠지만, 그래서 왜 하필이면 저길 사진 찍었을까 싶었지만, 바꿔 생각해보니 이거야말로 천만다행인거다. 만약 내가 다른 단어를 사진 찍었다면 나는 저 단어가 평생 헤이트인줄 알았을거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을테니까. 이제라도 누군가 나타나 그걸 지적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제 집에 가서 부랴부랴 책을 꺼내 고쳐 쓰고 붙였다. 속이 다 시원하다.
나는 야구에 전혀 흥미가 없고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어서 이 책을 읽기전에 살짝 걱정스러웠다. 나처럼 야구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읽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야구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내가 이 책을 읽고나서 조금이나마 야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 그런데 나는 이것이 '본격 야구 미스터리' 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해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야구에 대한 승부조작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마음을 파고드는 것은 '질투' 이다. 질투가 한 사람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질투와 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인 바,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냐. 처음부터 나 같은 놈의 공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공이었어. 그래서 난 지독히 참담해졌어. 아, 저놈 때문에 내가 오리올스에서 쫓겨나겠구나 했지. 그래도 난 오리올스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어. 오리올스에 쫓겨나면 나 같은 선수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테니까. 쓰레기나 마찬가지지. 사와무라, 넌 상관없어. 오리올스든 어디든 넌 상관없다고. 그런데 왜 하필 오리올스에 온 거야. 대체 왜." (pp.258-259)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주인공은 학교의 가장 예쁜 아이에게 다이어트바를 건네준다. 그 여자아이는 그것을 먹지만 자꾸 살이찐다. 알고보니 그건 다이어트 바가 아니라 살을 찌우는 바였던 것. 그러나 이 여자주인공은 나중에 깨닫는다. 상대가 뚱뚱해진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표면적으로는 '그사람 때문에' 로 보일것이다. 그렇게 생각될 것이다. 저 아이만 없으면 내가 1등할 수 있었는데, 저 아이만 없으면 내가 제일 인기가 많을 수 있었는데, 저 아이만 없으면 내 잘못은 드러나지 않을텐데, 저 아이만 없으면 내가 가장 예쁜 아이일텐데.
그러나 백설공주를 죽인다고해서 마녀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게 아닌것처럼, 그사람의 존재자체가 없어진다고한들 내가 가장 빛나게 되는건 아니다. '누가 없어서' 내가 빛나는 건, 진짜 빛나는게 아니지 않나. 그 사람이 있든 없든 나는 나 자체로 빛나야 하는게 아닌가. 야광토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나.
만약에 내가 너를 그녀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그래도 넌 그녀를 택했겠지 난 그냥 아닌거지 (-야광토끼, can't stop thinking about you 中 에서)
그녀가 있어서 나를 택하지 않은게 아니다. 나는 그냥 아닌거다. 나는 그에게 아닌거다. (아...갑자기 야구방망이로 가슴을 맞은것 같은 기분이다.)
나 역시 많은 것들을 질투한다. 누군가의 찬란한 젊음을 질투하고 누군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질투한다. 어떤이의 잘 쓴글을 보면 내 페이퍼들을 몽땅 내리고 싶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질때도 있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질투하고 근사한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여자를 질투한다.
첫사랑
-정세훈
녀석이 나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
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왔을 적
난 그만
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섧게 울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섧게 울어도 그녀는 내 친구와 결혼하는 법. 살찌게 하는 바를 친구에게 건네도 내가 날씬해지는 건 아닌 법, 내가 그 앞에 분명 먼저 나타났지만 그가 나를 선택하지는 않는 법. 그럴때마다 '다 너 때문이야'라고 원망하며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섧게 울고 화도 나지만, 그 순간은 건강하게 이겨내야 한다.
건강하게 이겨내려고 해도 사실 쉽지는 않다. 이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에서 여자는 자신이 먼저 그 남자를 봤고 사랑했지만 다른 여자에게 그 남자를 뺏기고 만다. 아니, 빼았었다는 사실을 상대는 모르니 이건 빼앗겼다고 말하기에도 난처한 상황. 그녀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이천 번 생각한들 결과가 달라질까. 그녀가 설사 나타나지 않았다한들 여자를 택했을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긴 해도 부질없다. 그러나 그녀 때문에, 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어디 쉬운가. 포스터에서 나타난것 처럼 둘이 키스하는 걸 볼 때마다 다정한 걸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질투의 마그마가 용암이 되어 흘러내릴텐데. 그러나 여자가 그녀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든 남자에게 그녀는 애인이고 사랑이다. 여자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 아니다.
"어찌 됐건 당신의 냉정함에는 놀랐어." 불여사가 말했다.
냉정이라. 타인의 내면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꼈다. 사실 내 마음은 망망대해에서 돛이 부러진 요트처럼 엄청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p.85)
고요해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고 고요하고 편안한건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건 아니다. 이 책은 요란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크게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듯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어제 혼자 올림픽공원을 걸으면서 그리고 오늘 출근하면서는 내내 '포미닛'의 「볼륨 업」을 반복해 들었다.
막 좋아서 펌업더볼륨업~ 하고 따라 불렀는데 흐음, 무대는 별로네? 멤버들이 다 똑같이 생겨가지고..........내 옆자리에 앉아서 밥 먹어도 포미닛인줄 나는 전혀 몰라볼 것 같다는 생각이 이 동영상을 보면서 들었다. 아, 밥 먹어도 라고 하니까 며칠전의 점심 식사가 생각난다. 동료 한 명과 나는 둘이서 고등어구이와 대구탕을 시켜두고 먹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뚱뚱한 고등어살을 밥과 함께 한 입 가득 넣고 씹는데 막 행복한거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입 가득 생선살을 발라 넣고 먹는걸 본다면 분명 누군가는 며느리 삼고 싶어하겠다, 는. 그러니까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은 젊은 남자들이 보면서 '사랑하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보면서 '며느리 삼고 싶다' 는 느낌을 줄 것 같다는.... 실제로 을지로의 허름한 호프집에서 나는 한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왜....왜 주겠다는거야.....나는 됐다고 했다. 아놔...orz
요즘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은 재이슨 스태덤이 싱글이라는 것, 유일한 절망은 그러나 재이슨 스태덤이 나의 존재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삶이 기쁨이었다가 절망이었다가 한다. 뭐,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