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임감이 무서웠다. 초등학교시절, 반장선거를 하면 나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반장으로 나를 뽑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반장이 되어 학급을 대표한다는 생각만 하면 무서웠고,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실망할지도 모르니 내가 선택한 합의점은 부반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한번도 반장을 해본적이 없다. 내가 다 아이들한테 나를 뽑지 말라고 해서 그런거지, 나는 뽑았다 하면 반장일테니까, 라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했었던 건 부반장과 회장과 부회장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었나, 전교부회장 선거가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나가보라고 하셨다. 학급 임원들만 모여 전교 회장과 부회장을 뽑는데 회장은 6학년 중에서 부회장은 5학년 중에서 후보가 나와야 했다. 나는 부회장 후보로 나갔고, 후보에는 나를 포함하여 네명이 올라있었다. 나는 답답했다. 전교 부회장이 되면 어떡하지? 싫은데.. 전교 부회장은 너무 커...감당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모인 5,6학년 임원들은 다들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었고 그래서 나는 나를 뽑지 말아 달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뽑힐텐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데, 오, 이런! 

 

나 뒤에서 두번째였다. 부회장 된 애는 총 34표를 얻었고 나는 단지 10표를 얻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나는 부회장이 될 수 없었고, 나는 그때 패닉이었다. 나...... 원래 표 못받는 애였던거구나! 내가 그동안 반장을 하지 않았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구나. 나는 반장으로는 표가 나오지 않는 그런 아이었구나! 아무말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냥 부반장 정도였던거구나. 그러나 그마저도 안되었던게 중학교에 올라가서 투표를 할 때는 이도저도 못했다. 후보에 간신히 올라(여섯명 올랐는데 6등했었음) 표는 세번째였나 네번째였나...난....안 뽑히는 애였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한 투표에서 나는 임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완전 충격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친구에게 참으로 말이 많았었던 것 같다. 엄마를 붙들고도 얘기했었다. 내가 .. 안될 수도 있는거였는데, 몰랐어, 라고.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점심시간 때의 일이다. 절친이나 베프라고 부를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했던 한 친구가 다른 아이로부터 나에 대한 험담을 듣게 됐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전하면서 '정말 다락방이 나쁜 아이일지도 몰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쁜 아이이든 아니든 '나의' 친구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순간 나에 대한 가치 판단을 달리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어떻게 그러지? 대체 어떻게? 그 말을 전해들은 친구는 '야, 너 다락방한테 들은 말 아니잖아. 왜 그아이 말을 들어.' 라고 대응했다고 했는데, 내 충격은 쉬이 가시질 않았고, 결국 5교시가 시작하고 나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수업이 끝나기 직전 소리내서 울었다. 아주 크게. 도무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울음을 참을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 친구가 다른 사람말로 휘둘리지? 어떻게? 나는 엎드려 통곡을 했고 결국 선생님은 수업을 그만두셨다. 나는 내내 울었고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나가셨다. 6교시 시작할때는 울음을 그쳤었다.  

나에 대해 나쁜말을 했던 친구에 대해서는 워낙에 무관심 했었던 터라 그 뒤로 졸업할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한마디에 휘둘려 버린 친구에 대해서는 오해를 풀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게 되었다. 신뢰를 잃었으니까. 나도, 그 친구도. 설사 그 일이 없었다 한들 우리가 지금까지 친구였을까, 를 생각해본다면 그랬을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나는 그 뒤로 모든 맹세를 믿지 않게 되었다.  너 어차피 그래봤자 한마디에 휘둘릴 수도 있을 걸, 이라는 생각을 늘 가슴속에 하고있다. 내 앞에서 나를 좋아한다고 아무리 외쳐봤자 그것이 굳건할거라는 믿음 같은것도 그다지 가지고 있질 않다. 너는 어차피 한번에 떠날수도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은 연애할때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나는 연인으로부터 비싼 선물을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 안에 가치가 담겨있다면 더 못받을 것 같았다. 한번은 좀 오랜시간 만난 연인이 왜 대체 너는 뭐 사달라는 말을 하질 않냐고 갖고 싶은게 없냐고 물었다. 니가 뭔가를 사달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그를 사귀어 오면서 사달라고 했던 건 시디 한장이 다였으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얘기했다. 반지를 사달라고. 그러자 그는 알았다고 했다. 이번주에 반지 사러 가자고 했다. 그 때는 5월이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말고 12월달에 사줘. 12월에 당신 인센티브 받으니까. 그때까지 우리가 헤어지지 않으면, 그때 사줘, 라고. 나는 항상 헤어질걸 전제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리고 그와는 8월에 헤어졌다. 

당연히 반지는 받을 수 없었다. 

 

 

어제 오랜만에 남자사람친구녀석 둘을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가 한 얘기는 자연스럽게 연애와 이성에 관한 얘기였는데, 나의 시덥잖은 연애 몇건에 대한 얘기를 듣던 한명이 어제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병신' 이었다. 누나 병신이다, 진짜 병신이다. 남자 말 못알아듣네, 라고.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집에 가는 동안 내가 모르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모르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내가 앞으로 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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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편지 101015-for re-approval-r1
    from Blue veil 2010-10-15 12:55 
    사랑을 할 때 어떤 점이 중요할까. 어떤 이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껏 늘 나에 대한 상대방의 마음이 중요했다. 한번은 나는, 내가 예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나의 어떤 모습에 반응하는지, 어떤 눈빛과 어떤 말에 반응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가와서 어깨를 감싸주고 싶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그가 모든 것을 깨뜨렸다.&#
 
 
치니 2010-10-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나는 이 좋은 글에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네요. ^-^

다락방 2010-10-15 16:44   좋아요 0 | URL
음..댓글은 달리지 않고 즐찾만 늘었네요. ㅎㅎ

2010-10-15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5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0-10-15 17:33   좋아요 0 | URL
알아요. ㅎ


2010-10-15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6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5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6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0-1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글을 비공개로 했습니다.

다락방 2010-10-16 22:13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하세요.

2010-10-1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6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