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재단이 빵빵한 중학교를 다녔다. 그렇다고 그 학교가 돈 많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거나,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거나 한건 아니고, 그냥 삥삥 돌려 배정받아 간 학교다. 다만 운이 좋아서 돈 많은 학교에 갔을 뿐.
그 학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전교생을 강당에 모아놓고 영화를 한편씩 보여줬다. 『시네마 천국』도, 『정복자 펠레』도 다 중학교시절 강당에서 본 영화다. 그리고 중학교시절 내가 강당에서 처음 보았던 영화는 '탐 크루즈' 주연의 『레인맨』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러니까 커다란 화면으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채 알지도 못했던 그 열네살에, 무방비상태에서 맞닥뜨린 탐크루즈의 얼굴 클로즈업은, 와우,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밑에서부터 카메라가 그를 잡기 시작했고, 그 카메라가 탐 크루즈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을때, 전교생들이(죄다 소녀였다. 여중이었거든.)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던 것을. 그리고 그 안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어 있던 것을. 그의 코는 얼마나 높았던가! 나는 도대체 그런 코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키스를 하냐며 친구에게 물었었고, 친구는 악 너는 왜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해, 하고 나를 놀려댔었다. 학교 앞에는 탐 크루즈의 사진을 파는 사람들이 좌판을 늘어놓고 있었고, 나는 차마 사지는 못하면서(영화배우의 사진은 사면 안되는건줄 알았다) 구경하다 집에 돌아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칵테일』을, 『폭풍의 질주』를 봤고, 또 중학교 3학년 졸업전에는 학교 강당에서 『Far ane away』를 봤다.
I loved you from the first time I saw you.
영화의 마지막, 탐 크루즈가 죽은 줄 알고 니콜 키드먼이 내뱉었던 대사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어요.
그가 주연한다는 영화 『Endless Love』는 그가 주연이 아니었다. 『바닐라 스카이』에서 그가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당신이 웃는걸 보면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아'라고 말할때는 와, 진짜, 그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내가 미칠 뻔 했고, 『탑건』에서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미소를 지을때는, 나는 그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고 착각했다. 그는 절대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음, 내 로맨틱한 상상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가 지나치게 잘생긴게 그 이유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 '잘' 생겨서, 현실이 될 수 없었고, 내 상상속의 주인공도 될 수 없었다. 『미션 임파서블』2편과 3편을 보고는 그를 거의 잊고 지냈는데(3편은 정말 구렸어..) , 나는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그를 만난다.
이것은 무슨 쌩구라액션 쯤이라고 해둬야 할 것이다. 만약 거침없는 액션이 보고 싶어 이 영화를 선택한다면 어어, 이게 뭐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러니까 뭐랄까,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액션이 코믹하다. 아니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믹이라는 말이 맞다. 총알이 퓽퓽퓽퓽 날아다니는 순간에도 이 영화속의 탐 크루즈는 입 놀리기에 바쁘다. 말이 많다. 당신 드레스가 예뻐요, 결혼식이 토요일이라고 했죠? 그는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는 순간 조차도 말이 많다. 지금 이 상황이 안좋아 보이겠지만 곧 나아질거에요, 나를 믿어요. 여자의 허락도 없이 여자에게 비키니를 입혀놓고서도 나는 눈감고도 옷을 갈아입힐 수 있어요, 물론 눈을 감았다는 건 아니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웃겨. 나는 액션 영화(를 가장한 코믹이었다)를 보면서 어찌나 웃었는지!
당신과 섹스하고 싶어요.
약 먹었어요?
네.
물을 많이 마셔요.
아 서운해. 당신과 섹스 하고 싶다는데 약 먹었어요? 라니. 아 서운해.ㅠㅠ 물론 카메론 디아즈가 약을 먹은건 사실이지만.. 이 말 많은 남자가, 카메론 디아즈가 자신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때, 이렇게 말한다.
"생각보다 더 가슴이 아프네요."
아, 갑자기 그가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다음은 『스플라이스』.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어떤 예고를 본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상상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랬다. 그러니까 남자과학자와 여자과학자가 변종생물체를 만들어내고, 그 생물체는 자신을 만들어준 남자 과학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아, 흥미롭고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영화는 내 상상과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도 어이없고 보고나서도 어이없는 영화다.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니 그저 지저분해질 것 같고, 뭐 이렇게만 얘기해야겠다. 이 영화가 말하는게 무엇이든, 보여주는게 무엇이든, 그것은 내 상상보다 재미없다. 이 영화에 관해서라면, 내 상상쪽이 훨씬 재미있다. 설령 그것이 꽤 진부한것이라고 해도. 참.. 송충이 같은 영화였다.
얘기가 길어지는데, 길어진 김에 더 길게 써야지, 안그랬다가는 하루에 페이퍼를 두개 쓰게 된다. 페이퍼는 하루에 한개만 쓰라고 친구가 내게 그랬다. (응?) 그러니까 길게.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틀면 내 방까지 그 바람이 다 들어오질 않는다. 아무리 방문을 열어두어봤자 내 방은 좀처럼 시원해지질 않는다. 외출후 샤워하고 침대 위에 앉아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더웠고 그래서 조금 끈적해졌는데, 와, 이 책을 읽었더니 끈적끈적끈적끈적...빨리 읽히는 책이고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고 게다가 퍽 재미있어서 앉은자리에서 당장에라도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이것을 단숨에 읽어내기는 좀 뭐랄까, 숨이 차다. 실재로 나는 한 두번쯤 책장을 덮고 시원한 거실에 나갔다 왔고, 책장을 덮고 냉수를 한잔 들이켜고 왔다.
이 책 재미있어, 라고 하면 가끔 사람들은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줄거리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얘기하고 싶은데 줄거리가 뭔데? 라고 물으면, 유부녀가 총각이랑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사랑......어김없이 뭐야 불륜이야, 뻔한 로맨스야, 등의 반응이 나오기 쉽다. 그렇지만 그 책을 읽어본 사람은 그 책이 단순히 그런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만약 어떤 줄거리냐고 물으면 사춘기의 소년이 새엄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새엄마도 그 아이를 사랑하지...라고 말해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이 책은 무슨 변태소설 같잖아..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춘기의 소년이 새엄마에게 에로틱한 마음을 품는데, 그래서 끈적거리고 홧홧거리는데, 숨이 막히는데, 그러면서도 전혀 불쾌함이 느껴지질 않으니, 아, 이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 저자의 [판탈레온 특별봉사대]책을 선물 받아 가지고 있는데, 책장에 꽂아두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오, 읽어봐야겠다. 아니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책을 여름에 덜컥 내놓은걸까. 아주 추운 겨울에 내놔야지. 대체..출판사들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깐.
소년은 새엄마를 사랑하고, 새엄마도 소년을 사랑하고, 아버지도 새엄마를 사랑하고, 새엄마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포스트잇을 붙이고 밑줄을 그었는데, 그건 이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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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가 고백했다. 뺨은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저 여인이 숲에 나타날 때마다 나뭇잎들은 샛별이 되고 꽃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뜨거운 영혼이 내 몸으로 들어와 피를 끓어오르게 해요. 그녀를 쳐다보면 땅위에 가만히 서 있어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것 같아요."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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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땅 위에 가만히 서 있어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 나도 안다. 그건 마치 구름위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과도 같은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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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할 수 없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지만, 분명한 것은 그토록 상냥하고 정다우며 완벽한 외모에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내 눈이 그의 곱고 우아한 뺨, 깨끗한 이마나 인자함과 지혜로 가득한 커다란 두 눈에 달린 긴 속눈썹에 머물 때마다 나는 내 얼굴에 따스한 새벽 기운을 느꼈다. 이런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여자들이 사랑에 빠질 때 드는 느낌일까?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육체 안에서, 심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그런 온기일까? (p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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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나 이런것도 안다. 그토록 상냥하고 정다우며 완벽한 외모에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하아- 숨막힌다.
자, 마지막 인용은 좀 길다. 그러니 읽고 싶지 않으면 패쓰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 마지막 인용속의 여자는 음, 마치 나 같아서 도무지 줄을 긋지 않을래야 ... 뭐, 달리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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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가 나를 선택한 것일까? 나는 내가 형편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마을에는 나보다 훨씬 예쁘고 열심히 일하며, 훨씬 힘세고 똑똑하고 용기 있는 여자들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내가 선택된 것일까? 가장 말이 없고 가장 겁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인내심이 많기 때문일까?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기 때문일까? 내가 애정을 가지고 산양의 젖을 짜고, 집 안을 청소하거나 과수원에 물을 주고 부모님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 같은 일상적이고 단순한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기끼 때문일까? 나는 내가 그런 것 이상의 가치와 장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장점이자 미덕이지 결점은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다. 데보라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마리아, 넌 야심이 부족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는 것 자체가 좋고,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는 그렇다. 그건 내가 항상 골치 아픈 일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어느 정도 열렬한 소망은 가지고 있다. 가령 나는 내 산양이 결코 죽지 않기를 바란다. 산양이 내 손을 핥을 때면, 나는 언젠가 그 산양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내 가슴은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또한 나는 아무도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pp.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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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느 정도 열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열렬하면서도 은밀하기에 적지는 않겠다.
참고로, 내가 이 책속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 책속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소년과 새엄마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 속에는 소년과 새엄마에 관한 얘기 말고도 삽화와 그 삽화에 따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주로 그 부분들에서 인용된 구절들이다.
밤이 더 길게 느껴지겠지만, 더 끈적이겠지만, 이 책은 정말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