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것을 싫어한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가 약속시간에 늦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남자에게 더이상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할 정도로 시간을 지키지 않는것에 예민하다. 이건 내가 늦을때 더하다. 내가 시간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때는 상대가 지키지 못할때보다 스트레스가 배로 쌓인다. 어제의 내가 그랬다. 여섯시 퇴근을 당연히 생각하고 약속시간을 일곱시로 잡았던 거였는데, 어제 사무실에서 여섯시 오십분에 나가야 했다. 종로까지 일곱시에 도착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늦을거라 연락을 해두었는데, 그는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고 한다. 일곱시반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는데, 일곱시부터 일곱시반 사이의 나는 신경질로 가득 차있어서 만약 그때 누군가가 나를 툭, 하고 건드렸다면 신경질이 우두두두 떨어졌을 거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나는 도착했는데 너는 어디있니 보이지 않는다, 고 하자 그는 나에게 쌈지길 **약국(기억이 안나....)으로 오라고 한다. 아 어쩔.
"나 쌈지길도 모르고 ** 약국도 몰라요. 그거 말고 다른거 뭐 없어요?"
라고 하자 그는 웃더니
"거기 있어요, 그럼. 내가 갈게요." 라고 말했다. 삼십분간 차곡차곡 쌓여져 있던 신경질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동동주와 파전을 주문하고 그는 내게 나를 기다리는 동안 샀다며 선물이요, 하고는 부채를 내밀었다. 포장을 뜯고 부채를 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하고 미안해했고 예쁜 부채를 보고 고맙다고 했다. 늦었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웃으면서 기다리는동안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하는 남자라니. 나는 그러니까 언제나 제대로 된 놈들만 사랑했었구나.
-그는 나의 '몇년전의' 남자다. 우리는 그러니까 한 2년만에 만나는 것 같다.
-서로 잘 지냈냐는 등의 안부를 건네고 너는 늙었구나 너도 만만치 않게 늙었어 등등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웃으면서 나는 유쾌하다고 했고, 만나지 말걸 그랬나 하는 말도 했다. 이렇게 즐겁게 웃고 떠들면 어떡해, 당신은 갈 사람인데, 라고도 얘기했다. 그는 다음달에 이민을 간다.
-우리는 '최고의 찬사'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자신이 이성에게 받은 최고의 찬사는 '당신의 몸이 좋아요' 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완전 뿜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는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에로스적인게 아니에요. 실루엣을 얘기한거라구요." 란다. 아 증말. 내가 언제 에로스적인걸 생각했다고! 하고 버럭하자 그는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한다. 아, 미치겠다. 아닌게 아니었다. (이건 뭐라는거지.)그는 내게도 물었다. 당신이 이성으로부터 들은 최고의 찬사는 뭐에요?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아, 인생 헛산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성으로부터 받은 찬사가 하나도 떠오르질 않는거야. 나, 찬사를 들어보지도 못한채로 살아왔던건가. 나는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성에게 해준 최고의 찬사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이성에게 했던 최고의 찬사를 이렇게 얘기했다.
"너가 너무 빛나서 니 주변까지 빛나!."
상대는 그 찬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자기딴에는 이성에게 해준 최고의 찬사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내 당신은요? 하고 내게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추리닝 입은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라고. 나 역시 상대는 그 말을 그냥 흘려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거기에 내 진심이 다 들어가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가 나에게 그랬다.
"당신 얼굴 빨개졌어요."
하하하하. 아 나 병신인가. 촌년병인가. 왜 이런 말에 얼굴이 빨개지는거야. 아 증말 ㅠㅠ 얼굴 빨개질 말이 대체 뭐냐고. ㅠㅠ
-무슨 얘기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얘기를 하다 말고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은 여자 같아요. 기특해."
그러자 그는
"맞아요, 정말 그래요."
라더니 내 머리를 같이 쓰다듬는다. 건방지게..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사실은 너의 연락이 너무 뜬금없어서 보험을 들라고 한다든가, 차를 사라고 한다든가, 혹은 피라미드에 들어간건 아닐까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세상에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봤냐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니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기 보다는, 세상은 원래 그런거니까...라고 하자. 그는 CMA 통장이나 하나 만들어요, 한다. 그는 증권회사에 근무한다. 나는 진정 뿜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밤이 깊었고, 식당안에는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집에 갈 준비를 했는데 그는 내게 아무도 없으니 도망가자고 했다. 하하. 나는 웃으며 진심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일단 빨리 먼저 나가라고, 자기도 곧 뒤따라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들키면? 그러면 돈 내죠 뭐. 란다. 나는 이런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진지하게 술값을 내지말고 도망가자고 하니까 또 어쩐지 그래야겠다 싶어서 콩닥콩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식당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가시는거에요?" 라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으이크. 나는 놀라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너무나 대담하게 네, 안녕히 계세요, 하는거다. 그러더니 돈도 내지 않고 나를 데리고 나간다. 계산..이라고 얼버무리는 내게 그는 계산은 이미 했다고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아, 그럼 지금 나 가지고 논거냐고, 돈 다 내놓고 도망가자 그런거냐고, 그런데 나는 거기다 대고 동조하고 도망갈라고 한거냐고 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아 놔..진짜..orz
-그는 걷는 내내 손을 잡는 남자고, 잡은 손이 따뜻한 남자며, 내가 손을 놓으려고 하면 이내 다시 힘을 주어 꽉 하고 손을 잡는 남자다. 가까이 걷는 내내 내가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잊지 않게 하는 남자다. 같이 걸을때는 같이 걷는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만큼, 딱 그만큼이 마음의 거리가 아닐까.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는 내게 안아달라고 했고 나는 그래서 알았다고 하며 그를 안아줬다. 그는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아주 나를 꼭 끌어 안았고 나는 나를 안은 그의 등을 톡톡 두들겨 주며 잘가요, 라고 했다. 이제는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을테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 듣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은 그래서 쥐약이었다. 이런 노래는 오늘 듣지 말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출근길 내내 그 노래만 반복해 들었다. 사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인데, 이 노래까지 듣고 있노라니 자꾸만 울컥해질라고 한다. 그래서 다 큰 여자는 울지 않는다고 말하는 노래가 생각났다. 그 노래를 들어야 오늘 하루를 무사히 잘 넘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찾아 들었다.
다 큰 여자는 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