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과 일요일은 잠을 대박으로 자야 하는데 사실 오늘은 잠을 설쳤다.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는 잠을 못자고 이불만 씹어댔다. 다시 자려고 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 결국은 일어나서 신문을 좀 훑어보고 밥을 먹고.. 

그러니 컨디션이 좋을리가 없었다. 심신이 좀 너덜너덜해졌다.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지하철 안에서 무슨 책을 읽을까 생각하다가, 읽고있던 창비세계문학선 영국편을 마저 읽을까, 하다가 아니야 지금은 문학을 읽고 싶지 않아 나 그럼 좀 힘들것 같아, [고등어를 금하노라]를 들고 나가 쉽게 읽어주자, 했다가 아니야 어쩌면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조금쯤 더 건드려주는게 좋을지도 몰라, 하고 결국 [가든파티]를 가방에 챙겨넣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나는 이 책 속의 단편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에 흠뻑 빠져서 정신없이 밑줄을 그었고 푹 빠져버렸다. 그의 고민이 남의것처럼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사실 그의 고민을 읽으면서 나는 좀 신났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는 상황에 만족했다.

   
  매일 아침 나는 길 쪽 응접실 바닥에 누워 그녀가 사는 집 대문을 지켜보았다. 블라인드가 문턱에서 2센티미터도 안되게 낮게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내 모습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녀가 계단으로 나오면 가슴이 뛰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얼른 책가지를 낚아채고 뒤를 쫓아갔다. 갈색옷을 입은 그녀 모습을 내내 눈에서 놓지 않았고, 서로 길이 달라지는 지점이 가까워지면 걸음을 재촉하여 그녀를 앞질렀다. 이런 일이 아침마다 계속 되풀이되었다. 몇마디 의례적인 말 말고는 제대로 말을 걸어본 적도 없지만, 그녀의 이름은 나의 어리석은 피를 온통 끓어오르게 만드는 소환장 같은 것이었다.(p.113)   
   

그렇다. 그는 한 여인을 흠모하고 있었다. 말한번 걸어보지 못한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오, 그는 얼마나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걸까! 

   
 

나는 스스로도 종잡기 힘든 이상한 기도와 찬송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수시로 불쑥불쑥 되뇌었다. 눈에는 자주 눈물이 가득 고이고(그 까닭은 나도 말할 수 없었다) 때때로 심장에서 피가 확 솟구쳐 가슴으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앞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걸 수나 있을지 어떨지, 말을 건다 해도 나의 혼란스러운 연모의 감정을 어떻게 전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의 몸음 하프이고 그녀의 말과 몸짓은 하프줄을 뜬는 손가락 같았다.(pp.114-115) 

 
   

눈에는 자주 눈물이 가득 고이는데, 그 까닭은 본인도 말할 수 없다니! 

그러던 어느날 흠모해 마지않던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그에게 바자회가 열리는 '애러비'에 갈거냐고 물었고, 나는 갈 수 없는데 너는 갈 수 있으니 좋겠다, 고 한다. 이 짧은 대화는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날 저녁 이후 자나깨나 나의 생각은 얼마나 숱한 어리석음에 휩싸였는지! 공연히 중간에 끼어든 그 지루한 날들 따위는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학교 공부는 짜증스러웠다. 밤에는 내 방에서 낮에는 교실에서 억지로 책을 읽어보려 해도 책장 위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p.115) 

 
   

고백하자면 나 역시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날들이 있다. 억지로 책을 읽어보려 해도 책장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적이 있다.  

그녀와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언제쯤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런 상태에 빠진 그에게 누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쳐 왔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지나쳐야 하는걸까?  

 

나는 그의 어깨를 좀 두드려주고 싶고, 

나는 요즘 수면양말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중이고, 

 

그리고 나는  좀 반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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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마지막 키스 2011-03-30 08:58 
    엊그제 저녁, E 와 함께 오사카짬뽕을 먹고 있었다. 홍합을 골라내고(싫어..) 전복을 건져 먹고 면발을 먹는데 갑자기, 정종집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의 가사가 귀에 쏙- 들린다.좋아했어요-나는 오사카짬뽕을 먹다 말고 E 에게 물었다. 이거 휘성이야? 아, 모르겠는데요? 휘성 새노래 나왔대? 글쎄요.. 목소리가 휘성인데? 잘 모르겠어요.. 나는 스마트폰으로 휘성의 새노래를 검색해본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노래의 제목이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고, 휘성
 
 
뷰리풀말미잘 2010-02-2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다락방님 팬들을 대표해서 물어보겠는데요. 무슨 반칙?

2. 내 어깨도 좀..

다락방 2010-02-21 10:51   좋아요 0 | URL
1. 아하하 그건 음, 말미잘님같은 미소년에게는 말해줄 수 없는 그런 반칙이에요. 저만 아는, 지극히 개인적인 반칙.

2. 글 속의 남자는 지금 힘들고 고민이 많잖아요. 그래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던 거고. 그런데 말미잘님도 제가 어깨를 두드려 줄 만큼 고민이 있는건가요?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분 아니셨나요? 제가 어깨를 두드려서 좀 나아질 수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해드릴 의향은 있습니다만. :)

3. 어제 로얄럼블에서 숀 마이클스가 중간에 탈락했어요. 아, 슬펐어요.

야클 2010-02-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관심두고 계신 남자분의 애칭이 '수면양말'인가요?

다락방 2010-02-21 10:51   좋아요 0 | URL
오, 수면양말이라, 좋은데요! 제가 만약 알라딘을 탈퇴하고 다시 들어오게 된다면 그때는 닉네임을 수면양말로 할게요. 야클님은 저를 알아봐주셔야 해요!!

... 2010-02-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aby는 제가 페이퍼 썼던 Dubliners (더블린 사람들)에 세번째로 실린 단편이예요. 이 작품이 The Dead와 함께 Dubliners에서 가장 유명할껄요? 나중에 기회되면 더블린 사람들 읽어보세요. 더블린에 사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하거든요.

무슨 반칙? (2)

... 2010-02-21 16:0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빨간색 칠하신 부분을 영어로 옮겨드릴께요.
"My eyes were often full of tears (I could not tell why) and at times a flood from my heart seemed to pour itself out into my bosom"
위의 굵은 글씨는,
"I had never spoken to her, except for a few casual words, and yet her name was like a summons to all my foolish blood."

다락방 2010-02-21 10:52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저 [더블린 사람들] 있어요. 비도덕적인(?)방법으로 절판된 책을 구했답니다. 이것이 저의 반칙일지도 모르겠군요. 흣.


2010-02-21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2-21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표지의 드레스자락과 페이퍼 제목~ 절묘하네요.
수면양말의 행복은 우리 가족 모두 누리는 중인데, 다락방님도 그 맛을 아셨군요.^^

다락방 2010-02-21 10:57   좋아요 0 | URL
저 발이 참 시려운데 그래서 잘때도 고통스러울 때가 많은데 수면양말 좋아요. 전 원래 집에서도 양말 신는거 별로 안좋아했거든요. 그런데 한번 신어보고 뿅 갔어요. 물론 새벽에 자다가 깨서 벗어 던지지만 말입니다. 헤헷 :)

L.SHIN 2010-02-2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는 잠을 못자고 이불만 씹어댔다."
"아니야 어쩌면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조금쯤 더 건드려주는게 좋을지도 몰라"

나는, 책 속의 내용보다 다락님의 이 문구들이 더 문학적이며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만.(웃음)

다락방 2010-02-21 10:57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요 L.SHIN님.

이 글은 L.SHIN님께 맛있는 글이 된건가요? :)

L.SHIN 2010-02-21 14:15   좋아요 0 | URL
당연하죠.
다락님의 글이 내게 맛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웃음)

다락방 2010-02-21 16:34   좋아요 0 | URL
:)

비연 2010-02-21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면양말..저도 완전 좋아라 해서 눈에 띌 때마다 자꾸 사게 되고 색색깔로 전시해두며 갈아신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반칙은 정말 무슨 반칙? 궁금궁금...책장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감정을 잃어버렸음에 못내 서러운 비연이..이 새벽에.

다락방 2010-02-21 10:59   좋아요 0 | URL
반칙은, 비밀입니다. ㅎㅎ

저는 눈에 띌때마다 사는건 아니고 딱 두개 있어요. 하나는 백화점에 갔다가 제가 산 것이고 또 하나는 엄마가 왜 백화점에서 비싼돈주고 사냐며 싸고 좋은것도 얼마든지 많으니 신어보라며 사다준 것이죠. 뭐 그 두 양말이 별로 다를바 없더군요. 지금도 신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두시가 넘은 야심한 밤에 대체 잠도 안 주무시고 왜 서러워하셨어요.

그나저나 책장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도 고민, 그렇지 않아도 고민, 뭐 이런 결론이 나오는군요!!

moonnight 2010-02-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메마른 저입니다. -_-;;;
이제는 그런 어지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하네요. 호홋. (왠지 슬퍼지는군요;;;)

다락방 2010-02-21 22:1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이 되지요. 그러나 해결이 되면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그런 감정을 다시 갖고 싶어지기도 하니, 우리 인간에겐 고민이란 끝도 없이 주변을 맴도는 것인가 봐요. 그러니까 뭐 이래도 슬프고 저래도 슬프고 그런것 아니겠습니까.

내일 출근해야되는데, 잠을 자면 내일이 올까봐 잠을 못자고 있어요. 흑 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