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을 잘 하는 성격 탓인지, 하고 싶은 말을 그때 다 쏟아내지 못하면 나중엔 그 절반의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어제도 엊그제도 하고싶은 말이, 쓰고 싶은 글들이 잔뜩 였다. 그러니까 2009년에 읽었던 책들을 정리도 하고 싶었고,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바빴다. 정말 바빴다. 어제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힘들고 피곤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다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문득 펼쳐 들었다가 오호라, 했던 동시.
닭발 볶음
이상교
고추장을 넣어
호되게 매운
닭발 볶음.
오종종 오종종
서른개도 넘을
닭발.
뼈를 다 추려 내
걷지 못하는
닭발.
고추장이 너무 매워
걷지 못하는
닭발.
이상교 동시집인 [고양이가 나 대신]이라는 시집에 실린 동시다. 고추장이 너무 매워 걷지 못한다니, 아, 이런게 바로 동시구나! 나는 동화책도, 그림책도,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제대로 감상하질 못하는 것 같다. 그런쪽에 유독 취약하달까. 그것은 그림에 있어서도 그렇다. 전시를 보러 가도 나는 글쎄, 다른 사람들처럼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연극이나 뮤지컬도 마찬가지. 그것들은 내게 큰 울림을 주진 않는다. 이건 뭐, 그냥 냅두기로 했다. 뭐 어쩔 수 없잖은가. 대신 뭐 나는...음....뭐.....다른게 있겠지 뭐. 나는 그래서 신은 누구에게나 남들보다 잘하는 무언가를 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신은 누구에게나 남들보다 못하는 무언가를 준다는 말을 신뢰한다. (이런 말 없나? 내가 지금 만든건가?) 그러나 어쨌든, 동시를 읽어내기엔 무리가 없다. 뭐, 제대로 느끼든 말든, 내가 좋으면 됐지. 게다가 또 한편의 동시는,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잠이 안 온다
이상교
학교 담 밑을 지나오다
팔랑팔랑 흰나비를 보았다니까
명실이가 말했다.
"봄 들어 맨 처음 흰나비를 보면
식구 중 누군가가 죽는다더라."
명실이 말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면 안 된다.
아빠도 안 된다.
엄마도 안 된다.
언니도 안 된다.
나도 안 된다.
우리 강아지도 안 된다.
잠이 안 온다.
잠이 안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외계인들이 지구를 파괴하러 왔는데 내가 지구를 구하는 꿈을 꿨다. 그 어린 나이에 만약 지구가 위험에 처한다면 내가 시험을 잘 보는것 따위를 걱정하느니 지구를 구하려는데 힘써야 하는건 아닐까 하고 심하게 잠도 못자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유능한 사람들이 구해주겠지, 나는 도망가야겠다, 하고 생각하지만. ( '') 나이를 먹을수록 순수함을 잃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그런데 또, 나이를 먹고야 말았다. 으이크.
불과 몇해전만 해도 티비에서 여자들이 나이먹는거 걱정하고 보톡스 맞고 하는걸 보고는 '아니, 나이들면 늙는게 당연한데 왜 그게 싫어서 저렇게 몸부림을 칠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지!'하고 한심해 했었는데, 나는 와, 이제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알겠다. 아무리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천상 보통사람이다. 나이 먹는게 싫고 끔찍하다. 아무것도 해놓은게 없는데 나이만 먹고 있어서 무섭기까지 하다. 거부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시간이 흐르는 것에 내 모든 거부권을 던지겠다. 시간아, 내게서 만큼은 흐르지 말아다오.
동시가 좋다. -.-
역시 방법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 뿐! 에드워드 만세, 칼라일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