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대의 '엘레나'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병. 약을 먹어야만 비로소 뇌가 보내는 신호가 나의 팔다리에 도착하는 그런 병이다. 그나마 약효의 지속도 몇시간 뿐인지라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내가 아무리 팔을 들어올리고 싶어도 내가 아무리 걷고 싶어도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고개는 언제나 푹 숙여져 있어서, 앉아 있다면 상대의 다리만 볼 수 있고 서 있다면 상대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약을 먹어도 고개는 들어올려지지 않는다. 화장실가서 소변을 보는 일도 어렵고 언제나 침을 흘리고 지낸다. 그런 그녀를 사십대의 딸 '리타'가 돌보아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약을 챙겨주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챙겨주고 건강보험을 챙겨주고 … 그런 딸 리타가 어느 날 성당 종탑에 목을 매달고 죽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했다. 모두가 자살이라고 한다. 그러나 엄마 엘레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다. 아니, 걔가 비오는 날 성당에서 자살한다고? 그건 말도 안돼, 걔는 비오는 날에는 성당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애야, 어릴 때 제아비로부터 비오는 날 성당의 종탑 밑에서 피뢰침 맞고 죽은 신부의 이야길 듣고 비오는 날이면 성당 근처로는 절대 안가는 애라고, 그런데 비오는 날 성당에서 자살했다고? 아니, 아니란 말야!


그녀는 경찰에게 이건 자살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경찰은 이미 사건을 종결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엘레나는 이제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일을, 분명 자살이 아닐테니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킨슨병은 그녀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해. 내가 생각도 하고 추리도 할건데, 그런데 이 몸으로는 안되겠다, 몸이 필요하다. 내 대신 조사해줄 몸, 육체가 필요해. 엘레나는 생각 끝에 이십년 전 인연을 소환한다. 그래, 맞아! 그 여자! 이십년전 리타가 구해준 여자, 리타에게 빚을 진 여자! 그녀는 우리에게 빚을 갚아야지, 그녀에게 사정을 얘기하자, 리타가 죽었다고 얘기하자, 그러면 그녀는 나를 도와줄거야! 지금 시급해진 일은 일단 그녀를 찾아가는 일이다. 약을 먹고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고, 자 이제 한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있다, 다음 다리도.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간 맞춰 기차를 타러 가자. 간신히 기차를 타면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할지를 알고, 거기서는 택시를 타야겠다, 나는 그녀의 집을 알아, 일단 가서 얘기만 하면, 그 다음은 그녀가 도와줄거야.



엘레나에겐 가족이라곤 리타 뿐이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몸은 어떤 몸인가.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다.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다. 뇌의 신호를 전달하는 도파민에 오류가 생긴 몸이다. 그런 그녀를 리타가 수족처럼 도와줬는데, 돌봐줬는데, 그런 리타가 없다. 앞으로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 몸으로 혼자 살아야 할 엘레나는 딸의 죽음이 비극이지만, 혼자 남은 삶도 힘겨울텐데. 


그런 한편 나는 리타의 죽어감을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죽었든, 죽기 직전 그녀가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죽기 싫다'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하게 '우리 엄마 어떡하지?' 가 아니었을까. 나 아니면 밥도 약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사람, 나의 돌봄이 강렬히 요구되는 사람, 내가 아니면 나처럼 돌볼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우리 엄마. 그런 엄마를 두고 죽어가는 리타의 마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죽기 직전까지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나는 책이 막 시작된 부분에서, 엘레나가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다리를 움직이기도 전부터, 리타의 죽음을 생각했다. 죽어가는 그 마음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우리 엄마, 를 두고 죽어가는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엘레나의 처방전은 이제 누가 받아다주나.


그렇게, 기어코 엘레나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몸이 되어줄 상대를 찾아갔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딸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까? 


처음 몇장만으로 이 책은 파킨슨병에 걸린 육십대 여자가 딸의 살인범을 찾는 추리소설로 읽힌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이, 그런 엄마의 옆에 있을수밖에 없는 리타의 돌봄이 드러난다. 어라, 이것봐라? 종국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너 내 딸에게 빚이 있잖아, 이제 그걸 갚을 때야. 그런데 상대가 말하는거다. 내가 네 딸에게 빚이 있다고?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그리고 다시, 몸의 이야기. 여자의 몸이 놓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 책의 마지막에 이르면 아픈 몸, 갇힌 몸, 살고자 몸부림치는 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난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아픈 몸이어서가 아니라, 건강한 몸이어도 마찬가지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파킨슨 병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엘레나의 몸은 파킨슨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파킨슨을 만난적 없던 다른 여자의 몸은 남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몸은, 그렇다면 누구의 몸인가. 



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처음엔 리타를 죽인 범인을 찾아라! 그러나 몸이 불편한 엘레나가 찾을 수 있을까? 했다가 책장을 덮을 때면, 왜 나의 몸, 나라는 이 여자의 몸을, 그러나 내가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인가, 생각하게 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내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피해자로만 두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억압받는 몸이기만 했나, 억압받는 내 몸으로 타인의 몸을 다른 식으로 억압하지 않았나. 



이 책은 아르헨티나 작가의 책이다. 분량도 적어서 금세 읽히는데, 그러자 나는 이 이야기가 원서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번역서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이 이야기가 더 깊게 들어오지 않을까 했던 것. 그러나 아르헨티나 작가라서 원서는 스페인어였고, 나는 스페인어는 el beso 밖에 모릅니다.

















왼쪽의 <Elena Sabe> 는 스페인어, 오른쪽의 <Elena Knows>는 영어책이다. 아무튼 그래서 원서도 영어책도 안샀다는 이야기. 그런데 엘레나 사베 표지 너무 좋지 않나요? 비록 표지속의 여자는 걸음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말입니다.



일요일에 이 책을 읽고 전형적인 표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좋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권할 때 쓰는 클리셰.


'일독을 권한다'


여러분,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번역된 이 작가의 책은 이거 한 권 뿐이던데 다른 책들의 번역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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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13 0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포일 안 하려고 애쓰신 게 느껴지고 ㅎㅎ 궁금하네요. 추리물로 시작된 소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세상에 재미난 책 왜이리 많은가요 기쁘고 슬픕니다 ㅠㅠ

다락방 2023-06-13 08:47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스포일 안하려고 엄청 애를 썼어요. 그걸 느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책이었어요, 독서괭 님. 아 정말 책읽는 거 너무 즐겁지 않나요? 전 너무나 좋습니다!! 꺄울 >.<

건수하 2023-06-13 09: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급박해집니다.

El beso 가 뭔지 몰라서 찾아보았어요. 전 El Nino를 압니다! ^^

다락방 2023-06-13 11:20   좋아요 3 | URL
저 지금 또 급박해져서 책 사러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맹의 섹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13 13:05   좋아요 0 | URL
그게 뭐죠... 동맹속의 섹스???

다락방 2023-06-13 14:14   좋아요 3 | URL
네, 동맹 속의 섹스! 정희진 오디오 매거진 듣는데 쌤이 언급하시더라고요. 뭐 그런 제목의 책이 있어? 검색했더니 있길래 잽싸게 장바구니로 고고!! ㅋㅋ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1853

잠자냥 2023-06-1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l beso ㅋㅋㅋㅋㅋ 유일하게 아는 스페인어가 그렇게 쓰였군요!
아휴 이 급박자들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6-13 11:56   좋아요 1 | URL
관심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