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두 번의 큰 수술을 앞두고 계신다. 아빠의 입원도 그리고 수술도 처음은 아닌 터라 그렇게 걱정되거나 긴장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아빠를 두고 돌아다오는데에는 눈물이 나더라. 게다가 전신마취와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일시적 치매가 찾아올 거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얘기도 들은 터라 걱정은 더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내내 우셨다. 우리는 모두 남동생네 집으로 갔는데 남동생네 집에 가니 지난번과는 또 다르게 훌쩍 성장한 아가 조카가 방긋 웃으면서 제 할머니를 할미 할미 따라다녔다. 우리는 또 모두 함께 웃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누군가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데 또 어느 누군가의 존재는 점점 커진다. 아빠가 수술을 무사히 받고 나오시길 바라고 회복되길 바라면서 그간 아빠에게 내가 너무 못된 딸이었던 것 같은 생각에 괴로워졌다. 그런 한편 내내 울던 엄마가 아가 조카의 존재에 웃는 걸 보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단일한 진실 앞에 오직 인간만이 저마다의 이유로 상실과 고통 그리고 행복과 축복을 느끼는구나 했다. 그리고 여기, 죽음을 앞두고 있는 윌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런 윌을 지켜보는 루이자의 이야기를 읽는다.
지난주 우리가 읽어야 할 분량에서 드디어 루이자가 윌의 안락사 결정을 알게 된다. 그리고 루이자의 마음은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찾아오며 괴로워진다. 영어로 천천히 읽었기 때문일까. 그간 나는 윌에게 정이 들어버려서, 이 결정을 알게 되는 루이자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이제 어떡하지. 나보다 더 윌에게 정들었을 루이자를 어떡하지. 그런 한편, 오늘 출근하면서는 번역본으로 이번주 할당량을 시작했다. 윌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자식의 사고와 그리고 안락사 결정을 마주하는 엄마의 마음.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그러니까 자식의 죽음이 고통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자식이 나에게 그저 지금의 어른 윌로서만 보이는게 아니라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마주쳤던 수많은 순간들과 그 순간들이 가져온 그 수많은 감정들, 그 모두가 윌이었던 거다. 윌의 엄마에게는. 그런 엄마가 윌의 안락사 결정을 듣고 그 결정을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때, 그 때는 어째야 하나. 나는 오늘 이어폰을 통해 이 책을 들으면서 또 울고 싶어졌다.
몇해 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책이 잘 쓰여진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재독을 하면서 '잘 썼구나' 했다. 무엇보다 내 팔과 다리를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불편은 내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이렇게나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구나. 루이자는 윌을 지켜보면서 윌의 불면에 대한 걸 알게 된다. 다음날 피로가 겹겹이 쌓인 눈을 보며 루이자는 생각한다. 밤에 잠이 안와도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누운 그대로 그 밤을 지새야 하는 것에 대해서. 불면은 그 자체로도 불면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인데, 그런데 오로지 뜬 눈으로 그리고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불면을 맞이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불편일까. 그러게, 미처 생각도 못했어.
어제 친구는 이 영화의 어느 한 클립을 보내주었다. 영상 속에서 루이자는 슬픔과 서운함으로 윌을 두고 돌아서고 있었다. 나는 남겨진 윌을 생각했다. 저기에 저렇게 저 사람 두고 가면 어쩌라는건가. 오늘 아침 읽은 책의 분량에서도 엄마가 윌을 두고 나오면서 자신은 자신의 마음대로 윌을 두고 나올 수 있음에 대해 언급한다. 그저 돌아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조조 모예스가 보여주고 있다. 조조 모예스, 잘 썼구나.
이 책을 같이 읽는 친구와 윌의 선택에 대해 얘기 했었다. 윌의 입장에서는 안락사가 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우리 둘다 뜻을 같이했지만, 그리고난 후 뻗어나가는 생각들은 다른 방향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윌의 선택을 이해하고 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에 나라면? 을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단호하게, 고민 없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택할 거야' 라는 답이 나왔다. 그러나 이 답은 나온 후에 그대로 머물지는 못했다. 그 다음에 대해서는 윌과 나의 상황이 달랐으니까.
윌은 부자였다. 자신이 일을 잘 해서 벌어들인 돈도 있지만 애초에 부자였다. 돈을 많이 가진 그리고 사회적 지위도 가진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윌이 치료받고자 한다면 그 모든 지원을 해줄 부모가 윌에게는 있었다. 지금도 윌의 부모는 간호사를 고용하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정신적 파트너인 루이자도 고용한다. 윌의 부모는 윌을 위해서 병원비도 대줄 수 있고 집에 별채를 마련할 수도 있고 윌을 위해서라면 최상의 도움을 줄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윌이 삶을 선택한다해도, 윌의 마음만 아니라면, 문제될 게 없는 거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윌과 같은 상황에서 삶을 선택한다면, '그 다음은?'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나는 윌의 부모와 같은 부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내가 윌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나는 돈이 없다. 윌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지원을 나는 받을 수 없다. 나는 좋은 병원에 들어갈 수도 없고 나를 위해 일해줄 좋은 간호사나 보호사를 고용할 수도 없다. 설사 고용할 수 있다 해도 어느 순간 그만둬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돈은 윌만큼이 아니니까 윌만큼의 질적으로 좋은 간호나 케어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주변 그러니까 가족 구성원중에 누군가가 나를 케어해야 할 것이다. 나를 케어할 돈도 나 대신 누군가가 벌어야 할 것이고. 내가 선택한 삶은 나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돌봄 노동과 경제 노동을 필연적으로 불러올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경우보다 더 심하게, 더 많이.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삶은, 그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살고자 함으로써 다른 누군가에게 더 고통스러운 삶을 준 것은 아닌가. 아니 그래도 사랑하는 네가 살아있으니 그것만으로 감사해, 그렇게라도 살아줘, 라고 언제까지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내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나는 나 아닌 사람들의 힘든 시간들을 지켜보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결정에 후회하게 되진 않을까?
막상 다른 가족을 놓고 본다면 나는 기꺼이 돌봄노동과 경제노동을 자처하겠지만, 그러나 내가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아 몹시 괴로워지는 것이다.
예전에 원수연의 만화 <풀하우스>에서 여자주인공 '엘리'가 자신의 집에 이미 살고 있는 '라이더'(주인공들 이름 정확히 기억 안남)를 보며 이렇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다. '내 것을 찾는게 당신 것을 빼앗는 것이 되었네' 라고. 내 삶이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아 버리게 되는 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소중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 몹시 괴로워진다.
책 산 얘기나 해보자.
책을 샀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일전에 친애하는 알라디너의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 기억해 제껴두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 책이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오, 소설이었어? 흐음 그렇다면 읽어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내 독후감도 그 분과 별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보면 소설 읽은 감상이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도 히틀러 관련 해서 하나씩 뽀개보자.
《가치 있는 삶》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마리 루티'의 책이다. 마리 루티의 책이라면 그간 두 권을 읽었고 지금은 마리 루티의 책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을 읽고 있는데 정말 너무너무 좋다. 다만, 다소 온건한 것 같아.. 그 점이 살짝 아쉽지만...
《오늘을 잡아라》는 장바구니를 결제하기 바로 직전, 짧게 이 책을 읽다 감상을 남기신 알라디너 b 님 덕에 부랴부랴 구매하게 됐다. 평소 신뢰하는 리뷰어분이라 뭐 고민할 게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은 강준만의 책. 그간 읽어본 강준만의 책들이 나는 좋았고 이번 책도 어쩐지 그럴 것 같다. 아직 읽어본 것도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나 짜증에 대한 언급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렇게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나'에 취하는 건 너무 싫은데, 바로 그 지점을 얘기해주지 않을까 싶다. 나는 행동에서 보여지는 그 사람을 신뢰한다, 그렇게 '보여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피씨한 나, 에 취한 인간들이 너무 싫다.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는 읽어보고 싶어서 샀다. 뭐, 다른 책은 안그랬냐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일전에 읽고 아마도 뭔가 감상을 남겼을텐데, 내가 그 때 놓친게 있었던 것 같아서 다시 읽어볼라고 다시 샀다. 제기랄..
《숭배와 혐오》도 읽어보고 싶어서 샀다. 물론 다른 책들도 읽기 싫지만 산 건 아니다.
《어두운 시대의 삶》은 한나 아렌트 라서 샀다. 한나 아렌트 일단 닥치고 사고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도서관엘 갔다. 내가 사려고 한 책들이 이미 품절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는 이런 책들을 빌렸다.
《감겨진 눈 아래에》는 여자가 군대에 가는 단편이 있다고 해 어떤 이야기를 하나 싶어 빌려왔다.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짐작하건대,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악과 게으름 그리고 멍청함과 연관된 글일 것 같아서 빌려왔다.
《중독 사회》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둘다 구매할 의사가 이천프로 였는데 품절이어서 빌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다. 나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