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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은 펠리사아는 다른 풀타임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빠와 오빠들은 펠리시아가 파트타임 잡을 구해 가사노동을 온통 펠리시아가 도맡아 주기를 바랐다. 백살이 된 할머니를 돌보는것 까지도. 이런 답답한 펠리시아의 삶에 사랑은 한줄기 빛이었고 구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바라봐줄까 했던 펠리사아에게 다가와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 '조니'가 나타난 것이다. 일주일간 매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고 혹시 모를 임신에 대한 걱정을 할라치면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고 조니가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사랑에 빠져 조니를 믿었다. 조니와 펠리시아는 사랑하니까 앞으로 이 사랑으로 서로에게 행복이 되어줄 터였다. 펠리시아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몸이 아픈 엄마를 방문하기 위해 고향에 들르는 것이 전부였던 조니는 다시 자신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했다. 주소를 알려달라고 편지를 쓰겠다고 펠리시아는 요구했지만 주소를 알 수 없었고 그는 자신이 먼저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펠리시아의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내내 애를 태우던 펠리시아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깨닫고 조니의 엄마를 찾아가 조니가 사는 곳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나에게는 그가 필요하다고 애원해보지만 조니의 엄마는 그녀에게 내 아들을 그냥 두라고 말하며 그녀를 쫓아낸다. 열일곱 펠리시아의 임신은 펠리시아의 아버지도 알게 되고, 아버지는 펠리시아에게, 자신의 딸에게 창녀라고 소리친다. 펠리시아는 집을 나온다.
너무나 전형적인 나쁜 놈이 나온다. 피임하지 않았으면서 그러나 걱정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임신하지 않는 육체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빈번히 생각하지만, 만약 임신이 섹스후에 랜덤으로 오는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반드시 여자만 임신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남자들은 지금보다 콘돔 쓰는데 더 열심이었을 것이고, 세상에 섹스의 횟수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임신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섹스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러나 임신은 여자만의 몫이고 아이를 배안에서 키워가거나 혹은 병원에 가 낙태를 하는 일도 여자만의 몫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때로는 귀찮아서, 콘돔 사는 걸 까먹어서, 콘돔을 끼면 느낌이 살지 않아서, 너무 욕망이 강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피임에 소홀한다. 그들에게 섹스는 절실하지만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러면서도 괜찮아, 내가 다 조심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그러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그야말로 세상 찌질한 남자가 된다. 조니는 펠리시아가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로 임신시켜두고 떠났고 사실 펠리시아랑 다시 또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펠리시아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지만 조니에게 그것은 잠시잠깐 고향에 내려가서 욕구를 해소한 것 뿐이었다. 아, 하나의 모험담으로 추가될 순 있겠다.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말야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하고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겠지. 친구들은 껄껄 웃을테고. 그런 모험담속의 소재가 펠리시아였다.
초반에 한 남자의 모험담 속에 등장하는 여자라면, 그 후에는 힐디치 씨라는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트로피 여친이 된다. 아니, 펠리시아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 남자의 여자친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그럴 의도도 아니었으며 또한 자신이 그렇게 보일 거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봐도 집을 나왔으며 갈 곳 없어 보이는 듯한 열일곱 펠리시아에게 중년의 퉁퉁한 사내 힐디치 씨는 다가왔고, 온갖 선함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선의를 베푼다. 네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줄게, 너를 배불리 먹여줄게, 나의 집에서 쉬게 해줄게, 너의 남자친구를 찾아줄게 등등. 그러면서 그는 수시로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원하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녀와 함께 병원에 가서는 '나의 여자친구'라고, 물론 펠리시아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것이 너무 짜릿하고 즐겁다. 그녀가 인정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관계를 설정하고서는 그 혼자 그 관계에 뿌듯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싶어한다. 나는 너에게 잘하고 있으니 너는 나랑 오래 잘 지내고 나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러나 이 젊은 여성은 사실 처음부터 그가 두렵긴 했다. 누군가의 선의를 이렇게 단번에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것은 반드시 되갚아야할 것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간직한 채로, 그것에 앞서 이 중년의 남자가 '혼자서', '혼자인' 나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것을 받아들여도 되는가, 이 사람의 차에 타도 되는가, 이 사람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도 되는가. 이런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이는 까닭은 펠리시아가, 그리고 그전에 펠리사아 같았던 다른 젊은 여성들 모두가 다른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돈이 없고 그렇게 갈 데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면 더이상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본인의 갈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렇지만 이제 가야겠어요.
이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뿌듯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베푼 것이 선의라고 믿었던 힐디치 씨는 자신이 돌봐주고 도와주었던 그녀들이 그렇게 말을 할 때마다 너무나 너무나 서운했다. 왜 이 관계를, 이 집 안에서 너와 나의 단단한 관계를 너는 더 유지하려 하지 않지? 자신이 베푼 선의에 대해 자신이 기대한 답을 받지 못하는 힐디치 씨는 그래서 자신 안의 악에 몸을 푹 담근다. 한 발은 원래 담그고 있었던 터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일상이, 그녀들의 떠나겠다는 말에 무너지는 거다. 뭐라고? 날 떠나? 내가 널 그냥 떠나게 둘 수 있겠니?
힐디치 씨에게 관계-그는 그것을 우정이라 말한다-란 그런 것이었다. 직장에서 성실히 일 잘하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두루두루 좋은 사람인 듯, 평범한 사람인 듯 보였지만, 그가 맺는 관계라는 것, 친밀함이라는 것은, 이 밀폐된 집 안에서 단 둘이 있으면서 서로 결속되는 것이어야 했다.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되고 이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사는 삶. 필요한 걸 모두 자기가 해주고 있으니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족해야 했다. 내가 아껴주잖아. 그가 그런 관계를 자꾸만 시도하고 실패에 절망했다 또 상대를 물색해 시도하는 것은, 그가 어릴적부터 맺어왔던 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금되어지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하고 그러면서 입 닥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여야 했던 삶. 그 삶은 힐디치 씨를 어른이 되어 자신이 당한 일을 그대로 하게 만들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어느 순간 바뀌어버린 것. 거기에, 자신의 길을 찾고자 나섰던 펠리시아가, 그리고 펠리시아 이전의 베스, 샤론, 보비, 게이, 엘시, 재키가 걸려들었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중간에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여자가 길을 떠난다는 것은 왜 이다지도 어렵고 험난한걸까.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선의는 선의가 아닌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든가. 나아가지 않으면 가사노동으로 허리가 휘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 기다리고, 사랑을 찾아 그것이 구원이 되겠다 싶으면 사실 남자는 임신시키고 도망쳐버린다. 늙은 남자의 선의는 그저 나를 장식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고, 길을 다니면서도 숱하게 바로 악의 구렁텅이로 직행하는 손길이 자꾸만 뻗쳐온다. 거기에서 열일곱살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간신히 하나를 피해 도망쳤다한들 또 만나게 될 위험에서도 도망친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또 오늘의 희망과 빛을 끌어안으려 노력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에너지일까. 어떻게 펠리시아는 햇볕을 쬘 수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책의 말미에서 선의를 얘기한다. 보통 사람들의 크지 않은 선의. 그러나 햇볕을 쬐도록 도와주는, 고통을 덜어주는 진정한 선의. 선의를 가장한 악의로부터 빠져나와서 다시 햇볕을 쬘 수 있는건, 그 선의들을 보고 받았기 때문에 가능햇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의 펠리시아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간 살아오며 다른 사람의 삶의 형태에 대해 내 기준으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는 걸 배웠지만, 그런데 그 후의 펠리시아는 어떻게 됐을까를 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쬘 수 있는 건 다행한 일이지만,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책의 해설에서 정부는 펠리시아 같은 사람들을 위한 구제책을 마련해 성공했다는데, 펠리시아는 그 수혜를 받았을까. 내가 어릴 적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이제는 남자의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 여자가 되었을까.
열입곱살 여자에겐 더 많은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 그 남자를 따라 숲에 가지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하고, 그 남자를 따라 차에 타지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물론 열일곱살 남자에게도 그런 어른은 필요하다. 힐디치 씨에게도 방향을 알려주고 끌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우정이란 어떤건지 몸소 보여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뒤에 다른 소녀들에게 가해질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아이들이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그 길을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걸 이루어내는데에 있어서 악의가 끼어들어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길을 펼쳐 보여주고 혹은 길을 물었을 때 옳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하는 몫이다. 길을 떠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주저 앉혀서는 안된다. 떠나는 걸 원한다면 가도록 해야한다. 여정을 떠난 여자아이들이 밑바닥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자아이들의 여정은 힘차게 계속되어야 한다. 원하는 것을 비로소 찾아낼 때까지.
여아자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 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p.306-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