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시, 올리브》는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요즘 친구들과 원서 읽기 하느라 재독하고 있다. 원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를 읽기 전에 번역본을 읽는건데, 다음주가 이 책의 네번째 단편 <엄마 없는 아이> 였다. 다음주에 원서 읽기 전, 번역본 읽어둬야지. 나는 어제 고메 짬뽕을 끓여먹고 걷기로 한 바, 이어폰을 꽂고 이북으로 '들었다'


이북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말 그대로 글자를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내용에 감정이 실리거나 하지 않는 기계적 목소리가 그저 글을 읽어준다. <엄마 없는 아이>라는 단편을 이미 읽어본 적이 있어 내용을 알고 있고 처음 읽을 때도 되게 좋아했었는데, 이번에 이북으로 들으면서 걸을 때는, 별 내용도 아닌 것 같은데 핑 눈물이 돌아버렸다.


올리브가 앤에게 엄마의 안부를 물었는데 몇 개월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 일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할 때, 올리브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했지만 여전히 힘들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핑 도는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 죽어서 그 존재가 내 옆에서 떠나버린다는 것이 갑자기 훅- 치고온 거다.



"엄마는 자신을 돌보는 분이 결코 아니었어요. 그러니 엄마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게 놀랄 일은 아니죠." 앤이 잠시 기다렸다가, 올리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는 놀랐어요. 저는 지금도 놀라워요."

올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그렇지." 잠시 뒤 올리브가 덧붙였다. "그런 일은 늘 놀라운 것 같아. 그런 감정이 몇 달 이어지는데, 결국 사라지긴 하더라. 하지만 무척 힘들어." -<엄마 없는 아이> 中




이 단편 전에 읽은 건 <청소> 였다. '케일리'라는 8학년 여자아이가 동네 노인 들의 집을 청소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 중 한 집에서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는 걸 들켜버리고 만다. 할아버지는 계속하라고 말했고, 케일리는 그 할아버지의 눈빛이 따스하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지 않아, 그 앞에서 가슴을 내보이고 만진다. 이 일로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돈을 준다.


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쓴걸까를 이 책을 읽으면서 진짜 찢어지게 고민해야 했다. 머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이야기 자체가 나는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 전에 썼던 《에이미와 이저벨》에서도 남자 성인 교사와 '사랑하는' 소녀 이야기를 그린 바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극도로 꺼려하는 이야기.


케일리가 그 할아버지 앞에서 가슴을 만지는 일이, 그것을 반복하는 일이, 케일리의 잘못은 아니다. 케일리는 세상에서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생각했던 아빠를 잃었고, 엄마는 아빠 만큼 자신을 사랑해주지도 않으며 자신의 슬픔 속에 침잠해 우울해하고 있다. 그나마 자신을 좀 예쁘게 여겨주던 '미스 미니'라는 늙은 여성은 요양원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의지할 데가 없고 사랑받지 못하며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따스하다는 느낌을 할아버지로부터 받는 거다. 그런 참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것, 자신에게 온 관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존재가 마땅히 취하는 행동이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도 그렇고,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에 그런 시간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래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성인이 되어 큰 트라우마를 만들기도 한다.


케일리는 그 행동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또 아마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이 일을 십년후 이십년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나는 계속 생각해야 했다. 괜찮을까. 그것을 '내가 원한 거니까'라고 말하게 될까.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을 '내가 그 때 왜그랬을까' 본인을 자책하며 지내지 않을까. 그 점이 내내 신경 쓰이는 거다.



그래서 나는 미성년들의 그런 지점을 노리고 접근하는 어른들이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싫다. 자신들이 한 것은 '서로 사랑한'것이며, 상대 미성년자도 '원했다'고 하는 그런 변명들이 정말 같잖다. 취약한 지점을 노려 공략하고서는 '걔도 원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어른답지 못하고 비열하기만 하다. 정말 찢어죽이고 싶다.



아주 복잡한 마음으로 읽어야하는 단편이었다. 내심 그러지말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공허한 케일리의 영혼이 느껴졌달까.



케일리에게는 '브렌다'라는 언니가 있다. 브렌다 언니는 케일리에게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그러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브렌다는 늘 섹스만 원하는 못생긴 남편 때문에 힘들어한다.



"우리 모두 너를 사랑해. 이제 잘 들어." 브렌다가 뜸을 들이며 비밀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내 동생, 너는 똑똑해. 그거 알고 있지? 나와 다른 자매들은 엄마를 닮았어." 그러고는 자신의 말이 진짜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댔다. "하지만 너는 아빠를 닮았지. 그래서 똑똑해. 그러니 케일리, 내 동생, 학교에서 계속 잘하면 네 앞에 미래가 펼쳐질 거야. 진짜 미래."

"진짜 미래라니 무슨 뜻이야?"

"네가 의사나 간호사나 뭐 그런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케일리."

"정말로?"

"정말로." 브렌다가 말했다. -<청소> 中




토요일에는 나의 여행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코로나 이후로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었고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마음 먹고 호텔에서 하룻밤 자자, 한 터다. 일전에 삼성역에 있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업무차 들렀던 적이 있는데 그 크고 좋아보이는 호텔에 마음을 빼앗겨서 '여기서 한 번 자보겠다' 생각했었다. 친구에게 얘기하니 그러자고 하였고, 그래서 비싼돈을 주고 하룻밤을 예약한 거다.

우리는 오전에 만나 오전의 일정을 마치고 체크인을 하고 드러누웠다. 오전 일정이 우리에게 나름 빡세서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의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티비 채널을 돌리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 너무 좋다, 행복해를 연발했다. 이 시간이 필요했어. 집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안해도 왜 이런 편안함과 느긋함이 없을까. 그렇게 우리는 채널을 돌리다가 수다를 떨었다.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 1번 채널에서는 호텔 소개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걸 듣자마자 온 몸에 기쁨이 가득 스며들었다. 여행가서 티비를 틀면 어느 여행지든 가장 먼저 호텔 소개가 나오는데, 그 때 느꼈던 감정이 확 올라오는 거다. 아 너무 좋으네 너무 좋다. 여행온 것 같아!


우리가 틀어둔 티비에서는 조인성과 차태현이 어느 시골(?)에 가서 슈퍼마켓 겸 식당을 하는 거였고 골퍼인 박인비가 남편,동생과 게스트로 출연해 있었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을 처음보았는데, 모든 영업을 마치고 그들 모두가 한 데 앉아 맛있는 걸 먹고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걸 보는게 너무 좋았다. 너무 행복해 보였다. 인간에겐 저런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친구와 이제 저녁 먹으러 나갈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고기집에 들어갔다. 와인과 소주를 시켜두고 번갈아 마시면서(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밀렸던 이야기들과 좋았던 이야기들. 친구는 새삼 요즘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지 이십년이 됐더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우리가 여전히 존대를 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며, 우리가 이렇게 사이좋게 계속 지낼 수 있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거봐, 이십년이 지나도록 우리가 존대말을 쓰는데, 어느 누구도 '말 놓아라'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지내잖아' 했더니 친구는 내게 '너는 처음부터 언니 동생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고 거리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둘이 실컷 먹고 마시고 걷다가 숙소로 돌아와 창원에 사는 나의 친구들과 줌으로 미팅을 가졌다. 우리 역시 만나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있었는데, 다들 오랜만에 만나서 좋다고 실컷 수다를 떨면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 감사해했다. 서로 좋았다 감사했다 말을 하면서 서로의 좋은 소식들에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한 친구는 자신의 삶이 우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며, 우리를 만난 후로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고맙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밤이 깊었고 술도 줄어드는 가운데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자기 직전 이런 톡을 동생들에게 보내둔 것을, 다음날 아침에 보았다.




자기 직전 내 인생 짱이라고, 술 취해 톡할 수 있다니. 정말 짱이지 않은가. 어떻게 내 인생 짱이라고 말할만한 친구들이 내게 있을까.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 생기는 일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대화를 하는 삶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원서를 읽다 보면 영어 공부도 되겠지. 계속 계속 공부할거다. 여성주의도 영어도. 좀전에 정희진 책 리뷰에 썼듯이 내가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정희진처럼 되진 않겠지만, 분명 나는 작년의 그리고 3년전의 나와 다르다. 일년 뒤, 십년 뒤 돌이켜보았을 때 또 '이만큼 까지 왔구나' 하고 행복해할 수 있도록 지금 열심히 걸어야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절대 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게는 인생의 목표이고 멈추고 싶은 생각이 지금은 전혀 없다. 그 과정에 좋은 친구들이 항상 도움을 주고 있어서, 힘이 되어주고 격려가 되어주고 있어서 인생이 개꿀인것 같다.


잘 살것이다.


사실 월요일이라 개우울..

아니, 출근은 언제나 우울..

그치만 힘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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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4-19 1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존대말을 쓰는 여행친구, 섣불리 언니 동생 하지 않는 거, 딱 이런 친구가 저도 있었으면 좋겠어요...이번 주도 화이팅!

다락방 2021-04-20 07:40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자마자 서로의 나이를 묻고 호칭 정하고 이러는게 너무 싫어요, 블랑카님.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말 놓는 순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존대말로는 욕을 못하면서 반말을 하면 욕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거리를 두는 걸 친구들이 싫어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둬줘서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좋아요. 친구들 만세만세 만만세에요. 으흐흐흐흐.
블랑카님도 화이팅입니다!

바람돌이 2021-04-19 1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월요일이라 개우울, 내일부터 조금씩 우울강도 낮아짐요. 금요일 오후는 아 환상적인 기분.... ㅎㅎ
열심히 읽고 쓰고 심지어 영어공부하며 원서까지 읽는 다락방님을 응원합니다. ^^

다락방 2021-04-20 07:38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어제는 너무 우울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퇴근 후에 삼겹살에 소주 먹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 핑계가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화요일이 왔고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보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 한 주 잘 보내봅시다, 바람돌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