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여인 2 창비세계문학 61
알베르 코엔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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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7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를 내가 정할 순 없었지만, 태어나고 난 후부터는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하나를 결정하면서 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이만큼의 돈을 벌고 지금 이 위치에서 어떤 사람을 친구로 두고 또 어떤 사람과 연인으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지는 그러니까 나의 어느 한가지 면 때문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진 복합적인 내가 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1920년대에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2000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도 없었을 것이며 친구도, 연인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단순히 '지금의 나'가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내가 있다. 나였기 때문에, 이 나이의 이 모습의 이곳에 사는 나였기 때문에 당신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의 진행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이 선택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내가 한 일이라는 거다.



쏠랄도 마찬가지였다. 쏠랄은 부하직원의 아내 아리안을 만나 사랑을 했다. 뜨거운 사랑을 했다. 아리안 앞에 처음에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랑을 얻고자 했던 일, 세상이 힘에 굴복한다는 사실, 자신의 외모가 가져오는 유리함 그러나 자신의 외모에서 어쩔 수 없이 티나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이 모든 것들이 그를 이루고, 그렇게 이루어진 쏠랄이 아리안을 사랑했다. 아리안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과거의 삶이, 환경이 아드리앵 됨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그 남편과 사는 삶이 쏠랄을 사랑하게 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는가는 단순히 지금 내 기분 하나에만 의지하는 게 아니고, 내가 상대를 향해 사랑이란 감정을 품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 태어난 나와 이렇게 살아온 내가 있다.



쏠랄과 아리안은 사랑했고, 사랑의 도피를 했고, 서로에게 열중했지만, 세상과 소통할 순 없었다. 처음에 그것은 의지였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이 이 연인을 배제한 것임이 드러난다. 불륜이어서, 국제연맹 사무차장이라는 직업도 잃어서, 프랑스의 국적도 박탈당해서,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처음,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책의 말미에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고통과 괴로움은 없었을 거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인생은 한 번 뿐인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는데, 이제와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야말로 부질없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사랑,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랑은 활활 타올랐던 것도 잠시. 지쳐버리고 무너져내리고 꺼져버린다. 그란 쏠랄과 아리안에게 남은 것이 서로가 전부이며 또 그들이 시작한 사랑만이 전부였기에,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그 사랑을 붙든다. 그렇게 붙들지만 그 사랑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이 책은 1,2권 두 권인데 두 권다 너무 두껍고 게다가 수시로 문장 부호도 없는 긴 장광설이 등장한다. 1권의 아드리앵 됨의 장광설과 2권의 마리에뜨의 장광설은 깔깔대며 웃기에 좋고, 그들의 장광설은 신분과 계급과 사회를 비웃는다. 아리안의 장광설은 과거의 사랑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또 현재의 사랑에 대한 열정을 퍼붓고 또 퍼붓는다. 그리고 쏠랄의 장광설은 힘과 사랑에 관한 것이며 그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사랑과 질투와 화해와 연민이 결국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이르고, 그 정체성만으로도 자신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이라,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며 나를 반성에 이르게 한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저렇게 혼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고민하며 걷는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에 나 역시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는건 아닌가. 존재하는 사람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세상 속에서 당사자는 그 존재가 드러날까 숨어다녀야 한다. 그가 혼자 외출하고 혼자 걸을 때, 벽에서 유대인에 관련된 낙서를 볼 때, 술집에서 유대인에 관한 사람들의 숙덕임을 들을 때, 쏠랄은 이 세상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캐서린 맥키넌의 말이 생각났다.



'백인 전용'이라는 간판은 '유대인 사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차별행위로 간주된다. 인종 격리는 "나가!" "당신은 여기 못 들어오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 상대를 높이는 것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나 모두 의미 있는 기호나 의사 전달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 《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맥키넌, p.36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으라는 말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쏠랄이 한 명의 연인만 보고 살아가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책장을 덮으면서 힘들었다. 여전히 묵직하다. 이유있는 장광설들이었다.



그런 참에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승환의 노래 얘기가 나왔다. 오늘 아침, 말 나온김에 들어볼까, 하고 재생하는데,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읽었던 쏠랄의 이야기가 훅- 다가왔다. 노래의 모든 가사가 쏠랄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갑자기 슬퍼졌다. 이승환은 어떻게 사랑이 그러느냐 물었지만, 나는 쏠랄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졌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오늘은 쏠랄 때문에, 쏠랄을 위해, 술 한 잔 해야겠다.


마음이 막 너무해 ㅠㅠ




사랑이 잠시 쉬어 간대요
나를 허락한 고마움.. 갚지도 못했는데
은혜를 입고 살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마지막 사랑일거라 확인하며 또 확신했는데
욕심이었나봐요
난 그댈 갖기에도 놓아주기에도 모자라요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한단 말 만번도 넘게
백년도 넘게 남았는데
그렇게 운명이죠 우린
악연이라 해도 인연이라 해도 우린..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안돼요 안돼요..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행복한 거짓말 은밀한 그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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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복명가왕에서 차지연이 부른 버전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는 걸 알려드리려 굳이 댓글을 답니다. 사랑 가득한 아침이에요. 근데 슬픈 사랑....

다락방 2020-11-26 10:09   좋아요 0 | URL
아오.. 아침에 제대로 허우적대네요. 이 노래 출근하면서 내내 반복해 들었어요.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ㅠㅠㅠㅠㅠㅠㅠㅠ엄청 절규하잖아요? 엉엉 ㅠㅠ 아주 지금 가슴속을 헤집어놔가지고 제 마음이 갈 곳을 잃고 헤매입니다... 아아 이 마음......

간절한 그리움
은밀한 그약속

울자 울어버립시다 단발머리님.


이승환의 그 뭣이냐, <사랑이 떠나가네>도 옥주현 버전이 더 좋았는데, 이 노래는 차지연 버전이 더 좋군요? 한 번 찾아서 들어야겠어요. 그리고 또 울겠습니다. 오늘은 운다.......

단발머리 2020-11-26 10:14   좋아요 0 | URL
옥주현 버전의 이승환 노래는 <천일동안>이 되겠습니다. 물론 <사랑이 떠나가네>도 너무너무 좋지만서도요.

울면서 쓰는 댓글입니다.
다락방님, 우리 울어요. 그냥 막 울아버립시다!!! 엉엉!!!!!

다락방 2020-11-26 10: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맞다 천일동안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이 떠나가네는 김건모죠 ㅋㅋㅋㅋㅋ 아무튼 천일동안도 이승환보다 옥주현이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울다가 웃어버렸네. 똥구멍에 털나겠어요 ㅠㅠ

Forgettable. 2020-11-2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쏠랄이(!!!) 이 쏠랄이 되었군요. 별 5개라 좀 놀라며 읽었는데 ㅎㅎ 유대인이 그렇게 천대받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아랍인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유대인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수학적 지식이 나라의 부강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후 다시 스페인 왕가가 복귀하면서 유대인을 다시 천대하며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이 못된 차별주의자들!! 궁금했던 이 이야기의 한 면모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락방 2020-11-26 10:29   좋아요 0 | URL
뽀 댓글 읽다보니 제가 얼마전에 [유대인의 역사]를 사놓고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퐉 떠오르네요. 하아.. 이것이야말로 부질없다. 왜 사는가..책을 왜 사는가, 왜..

어휴 막판에 너무 감정이 휘몰아치더라고요. 쏠랄이 어디에도 갈 데가 없고 설 데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고 속할 곳도 없어서 혼자 움츠리며 걷는 시간들이 너무 훅 오는 바람에 힘들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책장 덮는데 ‘그러지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주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너무 감정 쏟아지는 독서였어요. 그 쏠랄이 정말 이 쏠랄이 되었네요. 휴.. 지금 감정이 너무 거시기해져서 이 감정을 좀 어떻게 해놔야지 안되겠어요. 그래도 예정대로 저녁에 술은 마실겁니다. 훗. 혼와인 너무 기대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