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 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지음 / 한뼘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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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뉴욕여행 갔을때 미술관 몇 군데를 혼자 다녔었다. 미술관마다 내가 혼자 거기에 이르렀던 사연들이 있어 모두 특별하고 좋았지만, 그림 자체만으로 내게 감동을 준 곳은 가장 규모가 작았던 <노이에 갤러리>였다. 애초에 건물 자체가 작았는데 3층은 리모델링인지 그림 교체라고 했는지 아예 전시가 없었고 2층에 그림들이 꽉 차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클림트의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 같다.


클림트라고 하면 워낙 몇가지 그림이 유명하기도 해서 반가웠지만 내 눈앞에 그가 그려낸 그림들의 화려한 색채가 펼쳐지는데 너무 놀랐다. 그림들을 보면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한참이나 그의 그림들 앞에 서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키스>그림도 그랬지만, 그중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The Dancer>라는 그림이었다. 그 분홍빛의 화려한 색채가 눈이 부셨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고, 어떻게 색을 이렇게 썼을까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런 한편, 그런데 왜 젖가슴은 드러났을까. 춤을 추는데 옷이 벗겨질 리도 없는데, 설사 옷이 벗겨지는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왜 대부분 옷을 입고 추는 댄스에서 하필이면 가슴을 드러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그 화려함만을 간직했다.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갤러리에서 나오기전 기프트샵에 들어가 그림의 책갈피를 샀고,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로 보냈다. 나 한 개, 너 한 개. 나 이그림 너무 좋아! 미국에 사는 친구는 내 추천에 노이에 갤러리를 방문했고 나와 마찬가지로 클림트의 그림을 본것만으로도 그 작은 미술관은 소임을 다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감탄한 그림의 포스터를 사서 내게 보내주었다. 그 일은 내게 큰 기쁨이고 소중한 해프닝이며 평생 기억할만한 일이 되었다.


포스터를 꼭 내 방에 걸어두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냥 포스터만 붙이긴 아쉬워 액자를 하나 구입하려 했는데, 액자가 너무 비싼게 아닌가. 지금은 부모님 집에 살고 있으니 그냥 벽에 붙여두고, 나 독립하는 날 액자 사서 근사하게 거실에 혹은 꾸미게 될 서재에 걸어두어야지, 하고 일단 지금은 내 침실 벽에 포스터를 붙였다.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나는 자꾸 이 여성의 가슴이 신경쓰였다. 이 그림이 너무 좋고, 클림트 대 화가이고, 이 그림은 명작이겠지만, 그런데 저 가슴이 저렇게 드러난 건 불필요해보였다. 어떻게 가릴까 싶었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걸 가려? 하는수없이 그냥 그대로 벽에 딱 붙여두었는데, 내가 붙이는 걸 본 엄마가 보시더니, 보자마자 이러시는 거였다.


"젖통이 다 나왔네."


나는 깔깔 웃으며 엄마, 젖통이 뭐야 젖통이..가슴이라고 해야지! 라고 대꾸했는데 엄마는 다음에 이렇게 물으셨다.


"꼭 그렇게 젖통을 내놓고 그려야했대니?"


나는 그 말에 아무말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내가 클림트가 아니니 대답할 수 없기도 했지만, 꼭 젖통이 나와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체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장면에서는 반드시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이 그림이다.





나는 이 질문이야말로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게 가슴을 내놔야만 했다니? 라는 물음. 


이충열의 이 책,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는 우리엄마의 이 물음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왜 남성 화가들은 그림에서 여성들을 기울이고 눕히고 멍하게 그려두었을까. 세계적 명화라는 것들 속의 여자들은 왜 하릴없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 가슴은 결국 누구에게 보여지는가, 그 벗겨진 가슴을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충열은 명화들을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한 여자들의 포즈를 따라해본다고 한다. 이 동작 자체가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남성화가들이 그린 그림속 여성들의 포즈는 실제 여성들이 현실속에서 자주 취하는 포즈도 아니었을 뿐더러, 애시당초 따라하기 어려운 포즈들도 많았다. 특히나 나도 보면서 이해 안되는 그림이 있었는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이 그것이다.



이충열은 묻는다. 항아리에 든 물을 버릴때 저런 포즈로 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냐고.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 여성은 항아리에 든 물을 다 벗고서 저런 포즈로 버리는 것인가. 왜? 저거 누가 저렇게 하라 그래도 못하겠는데 굳이 들어올려 한쪽 어깨에 얹어서 저렇게 따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렇게 할 필.요.가 없었는데, 굳이 저렇게 그려야 했다면, 왜, 누구를 위해 그러해야 했는가.


왜 그림속 여성들은 저런 포즈들을 취해야 했는가. 


적장의 목을 벤 '유디트'를 다룬 그림들조차도 유디트는 벗고 있고 표정은 단호함과 거리가 멀다. 남성화가들이 그린 유디트는 적장을 죽인 용맹한 여성이 아니라, 팜므파탈적 요소를 가진 여성이었다. 이런 여성에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메세지. 



지은이의 이름이 '이충열'이라서 나는 남성작가가 뻘소리한 책이라 짐작하고 이 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이 작가는 안그래도 이름 때문에 남성으로 오해를 받는 여성작가라고 한다. 작가소개를 보면 미술을 포기했다가 문과와 이과를 거쳐 결국 현대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그러는 동안 그림들속의 여성혐오를 발견하고 자기 안에 여성혐오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충열이 그림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묻는 것은, 그간 그림을 보고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했고, 현재에 이르러 시각적으로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대상화 시키는것까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충열은 '벡델테스트'처럼 '충열테스트'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묻기를 제시한다. 앞으로 그림을 보게될 때 이렇게 세가지를 물으라는 것.


1. 필연적인 노출인가?

2. 표정과 동작의 의도가 명확한가?

3. 직업, 나이, 성격등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있는가?



이중 두 가자 이상의 질문에 '아니오'란 답이 나온다면 그 그림은 단순 누드라는 거다. 그렇게 다시 그림들을 보면서 그 질문들에 답을 해보자니, '필연적인 노출인가'라는 1번 질문부터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는 그림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클림트의 댄서 라는 그림에 있어서도 그랬다. 필연적인 노출인가? 물으면 결코 그렇다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엄마의 질문도 생각났다. 젖통을 굳이 드러내야 했다니? 이것은 이충열의 제1질문과 똑같은게 아닌가. 그 노출이 반드시 필요했는가?


놀랍게도 대부분의 여성노출 그림에 '응 필요했어!'라고 답할 수 있는 그림이 없더라. 그렇다면, 그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왜 그토록이나 열심히 그려댄 것인가. 그걸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커버칠 생각이었는가. 그 그림을 보는 이는 누구이며, 그 그림을 보면서 현실 여성에 대한 관점과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해 이익인가. 

물론 이충열은 '남성'화가들만 그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남성 주체의 시각에 길들여진 여성 화가들도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기도 했다고. 그래야 남성 소비자들에게 팔리니 그런 시선에 길들여지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이었을 거라는 거다.

그 숱한 여성혐오적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아버지의 강압과 아버지 친구의 강간, 그 모든 싸움을 해내면서 주체적으로 여성주체적 그림을 그려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화가를 알게된 건 큰 수확이었다. 


짧은 책인게 아쉬울만큼 좋은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좀 더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좀 더 많이 질문하도록 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나 이만큼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나는 앞으로도 미술관을 종종 찾을 생각인데, 그 때마다 노출된 그림들 앞에서 스스로 질문할 것이다. 필연적인 노출인가?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는 그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 너무 좋다. 이런 책을 읽게 되어서. 그림을 볼 때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서. 무엇보다 미술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로 써줬다는 게 너무 짜릿하다. 세상 곳곳에서 모든 현상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책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아직 질문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덕분에 질문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는 ‘누드‘를 이렇게 정의하고자 합니다.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를 기준으로 한 남성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적 욕망의 소유자라는 입장에서,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놓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이미지‘라고 말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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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감동적이죠. 전 피렌체에서 저 유디트를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수가 없어요. 같은 미술관에 있는 카라바조의 유디트와는 정말 다른..... 아 이게 진짜 그림이구나 하는 느낌. ^^

다락방 2020-10-04 15:59   좋아요 0 | URL
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숱한 남자화가들의 유디트와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주체적이면서 여성연대적이었어요!! 저도 언젠가 제 눈앞에서 그 그림을 직접 보고싶네요. 이런 코로나 상황에서 그런 날이 언제올지 알 수 없지만... ㅠㅠ

syo 2020-10-0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클림트는 아니지만, 제 생각에 클림트한테 저 가슴을 드러내는 게 꼭 필요했니? 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에 관련된 미학적 이유를 댔겠죠.

클림트가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가정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저 가슴 노출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다락방님의 견해고 관점인 것 같아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클림트의 견해고 관점이듯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어느 한쪽의 관점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왜 필요하지 않은 것을 그렸는가?˝ 가 아니라, ˝여성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생각했는가?˝가 아닐까요? 물론 두 질문은 결국 같은 과녁을 겨냥하겠지만요.

다락방 2020-10-04 18:59   좋아요 1 | URL
클림트의 저 그림은 제가 제 방에 걸어둘 것이지만,
클림트가 아닌데 클림트에게 이 가슴 노출은 필요했을 것이다, 라고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시점에 불필요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데 자기 입장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것이 필요하다고 답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뭐 클림트만 그렇겠습니까.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그래야 했어, 라고 답하겠지요. 그렇다면 반복되는 문화와 반복되는 세상이 이어질 것이고요. 저는 굳이 클림트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라고 가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진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리는 주체, 그리고 감상하는 주체가 남자였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저것이 꼭 필요했는가, 라는 물음은, 쇼님이 같은 과녁을 향한다고 했을때도 어쨌든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쇼님이 바꿔서 질문하고자 한 그런 질문이 나오기 위해서라도 질문했어야 하는 것이고요. 가슴 노출이 꼭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본질적이죠. 자연스레 따라나오니까요, ‘누구에게‘, ‘왜‘ 가요.



˝창조주가 세상 만물을 만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한 것처럼, 자신이 ‘보기에 좋은‘ 여성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남성 화가의 욕망과, 아름다운 여성 그림을 주문하고 소유함으로써 여성 신체를 소유하고자 했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욕망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바로 누드화였습니다.˝ (p.107)


syo 2020-10-04 19:32   좋아요 0 | URL
저는 ‘클림트에게 저 노출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가정한 게 아니라, ‘클림트는 스스로 저 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가정한 거구요. 그거 두 개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클림트가 저렇게 그렸잖아요. 그럼, 스스로 이렇게 그릴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그려야지- 하고 그렸다기보다 자기는 자기만의 이유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렸다고 보는 게 납득이 가지요. 그래서 그 생각을 비판하자는 거구요. 작가가 자기가 필요해서 그렸다고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면 그걸 듣고 나서는 비판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음, 화가가 자기 입장상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렸다고 하더라도 비판할 부분은 비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핑계없는 무덤 없다는 말 있듯이 자기 입장 없는 사람 누가 있느냐, 그렇게 봐주면 안된다˝라는 말씀은 정확한 반론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자에게 입장이 있건 없건 별로 안 봐주는 스타일입니다. 오죽하면 다자이 오사무 <사양> 비판할 때도 시대 상황 고려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겠어요. 제 말대로 클림트가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건 그렇지 않건, 아니면 심지어 다락방님 표현대로 클림트에게 그게 필요하다고 가정하건 그렇지 않건, 비판의 여지가 있으면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우리는 비판해야 한다는 같은 견해입니다.

가슴 노출이 꼭 필요했는가- 라는 질문은 전혀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은 때로 필요하지 않은 것도 하니까요. 만약 클림트가 스스로 가슴 노출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걸 그렸다면, 가슴노출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의 답은 클림트가 저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요. 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클림트가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인식해서 저걸 그렸고, 그래서 그 인식을 격파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본질적 질문은, ˝왜 남성 화가들은 여성의 그림을 그릴 때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다락방 2020-10-04 20:19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쇼님의 댓글을 읽고 클림트에게도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라고 받아들였어요. 저는 그 이유까지 제가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고요. 그렇지만 지금도 ‘필요했을 것이다‘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가 다른가? 라고 하면 그렇게 다른 말 같지도 않아요. 필요는 생각에서 오는게 아닌가요? 어떤 이유가 있으니 그렸을 것이고 그것은 그 이유를 생각한 것이며, 필요인 것이겠지요.

요약하자면 어쨌든 비판해야 한다는 견해는 같은데 본질적 질문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이군요. 저는 궁극적으로 쇼님이 질문한 것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질문에서 더하고 덧붙이면 결국 그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본질적이란 단어에 대해서 어쩌면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본질적 질문이라고 한 건, 그 그림을 보자마자 나오게되는 즉각적 반응에 대한 것이었어요. 저 그림을 딱 보았을 때, ‘저 가슴은 왜그렸지?‘ 가 되고 저희 엄마는 ‘그 가슴을 꼭 그려야했대니?‘ 라고 물었다 했잖아요. 제게 본질적 질문이란 그런 뜻이었어요.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질문이요. 결국은 ‘왜 남성화가들은 여성의 가슴을 노출하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에 이르긴 하겠지만, 그리고 결국 이렇게 이르는 질문을 쇼님은 본질적이라고 했지만, 저는 ‘뭐야 왜 저렇게 그렸어‘가 먼저 튀어나오거든요. 이충열은 왜 여자들 다 눕혀놨을까? 라고 질문한것처럼요. 저는 그런 질문을 본질적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오고 나서야 답을 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찾아간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쓰다보니까 좀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