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어느 밤의 일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종로3가 지하철역이었다. 나는 그를 닮은 사람을 보았다. 혹시 그인가, 아는척 하고 싶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지금 어디에요?
상대로부터 답이 왔다.
-의정부요. 왜요?
-종로3가역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보았어요. 그래서 혹시 당신인가 싶어 물어봤어요.
이렇게 그와 잠깐 대화를 하면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서는 그런데, 잠깐 생각해야 했다. 나는 정말 길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보고 '그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문자메세지를 보낼 핑계를 만들려고 부러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때도 명확히 답을 내리지 못했는데 어제 오늘 불쑥, 그러니까 그게 벌써 몇 년전의 일이야, 한 십삼년쯤 된것 같은데, 그 때 종로3가 지하철역을 걷던 내가, 그렇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 그거 진짜였어? 그를 닮았던 사람을 보았다던 거 말야, 나한테 물었다. 그리고 그때도 그랬지만, 사실은, '그렇게 닮거나 한 건 아니었다'고 답을 내렸다. 이게 솔직한 답이다. 그를 닮았다는 사람을 보았다고 해서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는 것, 나는 그 뒤가 중요했기 때문에 부러 구실을 만들었다, 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십삽년이나 지나서 생각난건데, 그 때 의정부에서 그 문자메세지를 받았던 사람은, 그런 내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날 닮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해지만, 나한테 말걸고 싶었던 거지, 라고, 그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갑자기, 불쑥, 그 밤이 떠올랐다. 구실을 만들었던 밤이, 그리고 그것이 구실이었다는 것을 그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이 뜨거운 주말에.
이제는 그런 구실도 통하지 않는 거리에 우리가 있다. 물리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그렇다면, 다른 구실을 만들어야하는데, 거기까진 해놓았지만, 이제는 용기가 없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종종 묻곤 한다. 어린아이에게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니?'를 묻는게 아니라, 앞으로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 에 대한 것.
나는 계속 책을 읽고 싶고, 책 읽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끊임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술을 마시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늘 다정하게 지내는 것도 물론 내가 살고 싶은 삶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1995년 가을 마침내 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이후 나는 그동안 이뤄보고 싶었던 꿈을 실현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문학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일곱 명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내어 문학토론을 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에 우리 집으로 초대하였다. -p.13
지난 주말에는 친구네 집에 갔다. 친구가 이사해 살게된 새로운 집에 우리를 초대한건데, 그 집에 방문하는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을 챙겨왔다. 그렇게 명란젓, 애플파이, 메론, 와인, 막걸리, 치즈, 꽃다발이 각자의 가방에서 꺼내어져 테이블 위에 놓였고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음식을 마련해두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같이 음악을 들었던 시간은 너무 금세 흘렀다. 바깥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삶에 찾아왔을까, 나에게 어떻게 이런 운이 있나,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날부터 읽기 시작한 '아자르 나피시'의 책에서 나는 저런 구절을 보는 거다. 매주 목요일에 문학토론을 위해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이야기. 마침 나 역시 친구의 집에 다녀오지 않았던가! 이걸 너무 하고 싶은 거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나는 언젠가 욕실이 두 개있는 30평대의 아파트에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이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가시니 어쩌면 나의 독립은 요원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내심 3-4년 후에는 그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터다. 돈 열심히 모아야 되는데. 방 세칸짜리 집을 마련해서 한 방에는 책상과 책장을 두고 하루중의 일정 시간을 그 공간에 들어가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느날에는 친구들을 초대하는 거다. 굳이 문학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어떤 명목이 됐든 좋아하고 다정한 이들을 초대해 큰 식탁앞에 앉혀두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는 일은,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지 않은가! 내 집이니 초대하는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지난주에 친구 집에는 일찍 만난다고 세시에 만났는데도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해 너무나 아쉬웠다. 아자르 나피시는 아침에 학생들을 초대한다. 나도 아침에 초대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방 세칸, 욕실 두 개인 집에 살면서 최소한 6인용 식탁을 길게 마련해두고, 그리고 아침부터 초대하는 거다. 음식은 뷔페식으로 준비해놔도 될 것 같다. 자, 저기에 음식 있으니까 다들 먹고 싶은 거 가져와서 마음대로 먹어. 와인 냉장고는 그 때가 되면 200개입 냉장고로 바꾸고 싶은데, 그것도 가능해질까. 냉장고 한쪽 면은 소주와 맥주로 채워둬도 좋겠다. 뭐든 술이 마시고 싶을 때 없어서 사러 나가는 건 너무 싫어. 늘 준비되어 있는 삶!
그렇게 실컷 먹고 놀고 마시고 이야기한 뒤에 헤어지면서는 '함께 해서 즐거웠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조카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랬거든. 오늘 더 어린 남자 조카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모 사랑해, 함께 해서 즐거웠어, 라고 말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 귀여워....
6월의 같이읽기 도서인 에코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읽어야지. 오늘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으니 시작해야지. 책 두꺼워서 한숨이 나오고, 세상에, 서문 다음에 또 서론도 있다고 해서..(뭐 다 그렇죠) 시작하기가 두렵지만, 그래도 한 장이라도 읽고 자야지.
일요일 밤, 용기가 필요한 밤, 인내가 필요한 밤, 그리고 여름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