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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ㅣ 창비세계문학 6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제목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있지만 제목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책들도 있다. '딩링'의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이 책의 작가인 딩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고 준비해뒀던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는, 대체 안개마을에 있을 때 뭐가 어떻게 됐다는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안개마을에서 안개라니, 은둔하기 좋아 쓴걸까, 그 마을에서 사랑을 한걸까, 그 마을에서 혁명을 한걸까.
표제와 같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중국인 여성 위안부 '전전'이 등장한다. 그리고 위안부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편견도.
오래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여옥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자고 있는 집으로 마을 남자가 침입한다. 그리고는 '어차피 너는 버려진 몸'이라며 강간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이 정서.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거나 성폭행을 당했던 여자에 대한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 정서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에도 드러난다. 이 소설의 화자는 휴양차 안개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일 년전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 전전을 만나게 되는데, 전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됐고 또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첩자가 되기도 하는데, 나라는 그녀를 이용했고 마을 사람들은 남녀할것 없이 그녀에 대해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다니는 여자가 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을 깨끗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녀는 그렇게나 부당하게 가족들의 수치가 되었다. 우리가 진작 결혼했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이라도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전전의 남자동창 '샤다바오'는 그녀를 구해주려고 하는 착하고 의로운 남자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끌려가고 강간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드는 이도 남자이고 그런 여자를 구원해주고자 하는 것도 남자인 셈. 여자의 인생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더렵혀지고 혹은 구원되어 지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숱한 영화와 책속에서 드러나는 바다. 그토록이나 여성을 혐오하던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피부병을 지적받자 '이걸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걸 욕하면 어떡해' 라고 항변하는 영화 《히트》에서도 알 수 있고,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형사가 등장하는 책 《스틸하우스 레이크》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걸 안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가 끌려간 것이 자명한 사실이고 지금 나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는 것 역시 자명한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구경하고' 또 '혐오한다'.
책 속의 화자는 이 마을에 처음 올 때 자신과는 다른 정치사상을 가진 여자와 함께였다. 그것은 딱히 즐거울 리 없는 동행이었지만, 그러나 전전의 삶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공통된 감각이다. 전전의 삶은 전전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흘러갔고 그것이 부당하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통제하지 못하는 여성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감각은, 동시대를 살고 있던 다른 환경의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각인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고통 앞에 통곡을 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리고 통제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전전이 무너지기를 선택하지도 않고, 남자에게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픈 몸이 낫기를 원하고 그리고 나름의 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해오는데도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가 전전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길에서 그녀는 그녀의 동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화자는, 그녀의 동지가 되어주길 자처할 것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여성은 그 다음 단편인 <병원에서> 에서도 등장한다. '루핑'은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했지만 자신에게 의사일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대학에 들어가 정치공작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공산당원이 되지만, 당에서는 그녀를 이제 막 개척하고 있는 병원의 의사로 보내버린다. 이 역시 그녀의 의지도, 의사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갔는데, 그 병원의 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의사로 일하고 있고 온갖 기구들은 소독되지 않은 상황이며 그 누구도 청소를 하지 않아 더럽기만 하다. 일단 환자들을 낫게 하고 건강한 출산을 하게 하려면 환경부터 바꿔야 하기에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보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나 그녀의 열성적 태도로 환경이 바뀌기는 커녕, 사람들은 그녀를 음해하려고 한다. 이에 그녀는 처음의 의지를 잃게 되지만, 며칠 풀죽어 있다가 다시 의지를 다진다. 그녀는 삶의 매순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고난 속에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세번째 단편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는 소년병이 주인공인데, 내전중인 자국의 군인에게 발견되어 총살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총알 하나를 남겨두는 게 좋겠소. 남겨두었다가 일본 놈과 싸우시오! 나를 칼로 죽이고!" (p.97)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군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고작 열세살의 소년이 자신이 죽을 위기 앞에 공통의 적인 일본을 죽이는데 총알을 쓰라고 말할 수 있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네번째 단편 <두완샹>은 읽으면서 가장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계모에게 학대받아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하다가 열세살에 시집을 가는 두완샹이, 그곳에서도 다른 며느리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열심히 일하는 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며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이 대가족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수고를 했다' (p.106)
그런 그녀의 마을에 해방군이 들어와 토지개혁을 하겠다고 하고, 그녀는 토지개혁 업무중인 중년의 부인과 매일밤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가족과 마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에 헌신하고자 하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과 이런 생각이 일치해 좋은 동지가 된다. 이 부부는 며칠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는 개척지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우 성실히 일하고 꼿꼿한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그녀가 모범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랜 진심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배움이 짧았지만 스스로 깨우쳐 다른 사람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면서 이 소설은 끝나는데, 이 모든 삶의 굴곡에서 그녀에게 성장이 있었고 또 깨닫는 바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지만, 이 단편 내내 '두완샹에게 삶의 기쁨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하는 것, 모두에게 이로운 것, 그것이 그저 그녀 삶의 기쁨의 전부란 말인가. 왜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고 또 하고 쉬지 않는 것이 궁극의 선이 된것일까.
이 책에는 이렇게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모든 단편들에서 중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핍박받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고 또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이는데도 결코 그들은 좌절속으로 혹은 절망속으로 끌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 가득 으르렁 거리는 불꽃을 품고 세상을 보는 의지가 단단히 새겨질 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대단하다, 그들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후의 결론은 될 수 없다. 그 삶이 핍박이었던 것, 고통이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이 언제든 나라는 사람을 후려칠 수 있지만, 이토록이나 심하게 후려치는 것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시스템이 한 개인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으게 만들고 그렇게 방전되게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의지를 다지는 것은 시스템의 도움이 아니라 나 개인의 몫이라니. 이 얼마나 피곤하고 한심한 일인가. 이들 모두가 후려치는 삶 앞에 꺾이지 않고 살려는 의지, 한 발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분명 높이살만한 것이지만, 오히려 나는 그간 내 생각과 다르게 삶에 있어서 때로는 도망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그건 모르겠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방송을 보노라면, 도시에서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자연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괴롭히는 건 사회적 시스템이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온 병이기도 하고, 자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그저 물과 나무가 있는 자연으로 숨어드는 것은 그들이 생각해낸 그들이 남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딩링' 의 소설속 단편들은 이미 드넓은 땅 안에 있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 넓고도 넓은 땅에서, 게다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는 게 이 나라 전체를 둘러싼 어떤 사상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숨어들것인가. 정작 휴양을 위해 찾아간 안개마을에서도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나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내 눈에 이글거리는 독기를 품는 것 말고는 남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사는 일은 이토록이나 고되다. 어쩔 수 없이 강함을 내 안에 욱여넣어야 비로소 버텨지기도 하는 것이다. 맞서려고 하는 강인한 자들 앞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삶의 고됨을 느낀다. 고되고 고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