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피곤했는데도 술을 마셨더니 어제의 피로도는 정말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저녁을 늦게 먹은 터라 소화시키고 자야한다고 거실 텔레비젼 앞에 앉았지만 수차례 하품만 해대니 엄마가 얼른 들어가 자라고 하셨다. 그 때 시간이 밤 아홉시. 나는 잘게,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앉았다. 아홉시 반까지 책을 읽다 자야지, 하고 출근길에 읽던 책을 펴들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인데, 나는 이 책을 이렇게 뒤늦게 읽기 시작한 것. 몇장 읽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앞부분인데, 나는 읽다가 49페이지의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된다.





이미 앞서 버지니아 울프는 남자를 M 이라고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니 여자를 W 이라 일컫는다고 하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저 괄호안의 문장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저 분홍 형광펜 그은 문장을 여러차례 읽었다. 여성을 W 라 부른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왜 '간(肝) 결함' 때문일까... 이게 이해가 안되는거다. 도대체 저기에 숨은 뜻은 뭘까? 왜 여성들은 간에 결함이 있다는걸까. 그 당시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간이 약했나? 왜 남자는 M 이라고 부른다고 했으면서 여자는 간 결함 때문에 W 라고 부른다는걸까... 아 글 왜이렇게 어려워 ㅠㅠ 이렇게 됐던거다. 그러다 또 꾸벅 졸고, 다시 저 문장 읽고, 왜 간 결함 때문에 W 라 부를까... 간 결함에 대한 약자인가..그냥 우먼 약자 아닌거야? 간하고 결함이 대체 영어 단어로 뭐길래 w 야.. 간 리버 아니야? 결함은? 결함이 내가 모르는 단어가 w 로 시작되나... 꾸벅 졸다가 다시 저 문장 읽고..를 몇차례 반복했을까. 그냥 집어던지고 잠을 잤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

나는 지하철에서 다시 이 책을 꺼내든다. 그리고 다시 저 문장을 읽으면서, 아이참, 왜 여자들 간에 결함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또 이랬다가 갑자기, 퍼뜩, 앗!!


간결함!!

간결함 이구나, 간결함!!

네이버 어학사전에 의하면 '간단하고 깔끔한' 의 뜻을 가진 그 간결함. 영어로는 concise의 그 간결함. 아, 간결함이었어!! 윗줄에 '간' 있고 밑에줄에 '결함' 있어가지고 내가 '결함 오브 간' 이라고 생각했어. 아아 나여........... 내가 진짜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ㅠㅠ 출근길에 결함 오브 간을 concise 로 비로소 이해하고 나서 아아, 출근길의 독서에 대해 새삼 감탄하게 된다. 잠자리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을 출근길에 이해한다... 독서여.......


흑흑 ㅠㅠ

어제치 나의 멍청함을 반성합니다 ㅠㅠㅠ

피곤해서 그랬어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직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은 진짜 짜릿하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연을 요청 받는다. 여성과 픽션에 대해 좀 자료를 찾아보려고 대학의 도서관에 들렀는데 여성은 입장할 수 없다는 얘기에 돌아서고야 만다. 씁쓸한 마음으로 다음날 런던으로 가 대영박물관으로 간다. 거기에서 그녀는 '남성에 의해 쓰여진' '여성에 관한 책'이 매우 많다는 데 경악한다. '여성에 의해 쓰여진' '남성에 관한' 책은 한 권도 없는데 말이다. '여성과 픽션'이란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건데 그녀는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지, 왜 여자들은 가난한지, 왜 여자들은 자기만의 방이 없는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걸 이렇게 글로 풀어낸 거다.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글을 써댈때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했던걸까. 그녀에게 여성과 픽션이란 주제를 던져준 것은, 픽션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고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많은 남성들이 대체 왜 여성들에 대해 얘기하는가. 그리고 그들 모두가 주장한 여성에 대한 특성이 왜 이렇게도 극과 극인가. 여성은 가르쳐봤자 열등하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없다고 하는 남자들이 있고 여성들이 월등해서 남자들을 이길거라 교육 받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대체 여성들은 뭐기에 남성들은 여성의 특성에 대해 이다지도 말들이 많아? 그녀는 이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X 교수'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형체를 그리고 있었지요. 그것은 '여성의 정신적, 도덕적, 신체적 열등성'이라는 제목의 기념비적 연구서를 집필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X교수의 얼굴이자 형상이었습니다. 내 그림에서 그는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남성이 아니었지요. 그는 육중한 몸에 턱살이 매우 늘어졌으며 거기 균형이라도 맞추는 듯 눈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아주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그의 표정은 어떤 불쾌한 벌레를 죽이듯이 펜으로 종이를 찌르게 하는 감정에 휘둘려 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그 벌레를 죽였을 때조차도 만족한 듯 보이지 않습니다. (p.49-50)




당시에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교육을 받고 더 돈이 많으면서도 대체 '왜!' 여성들에 대해 글을 쓰는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 자료들을 가져와 보여주는 걸까? 그런 글을 쓰는 걸까?



그것들은 진실의 흰빛이 아니라 감정의 붉은빛으로 쓰였으니까요. (p.52)



연구 가치도 없는 것을, 읽을 가치도 없는 것을, 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험담 그 자체를, 여성이 얼마나 열등한지를 빡쳐서 쓰는 그 글들을 도대체 왜 이놈이나 저놈이나 써대는가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기에  X교수를 소환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본인의 열등함을 감추기 위한 방법'임을 드러낸다. 내세울 게 없고 자랑할 게 없고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를 드러내기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스스로가 생각한 유일한 방법. 그건, 다른 사람을 내 밑으로 깔아뭉개기.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익히 해왔던, 하고 있던 '여성 깔아뭉개기'에 동참함으로써, X교수는 그들과 동지가 된 느낌을 가질 것이고, 그들과 한편인 느낌을 가질 것이고, 아무리 자기의 외모와 능력이 어떻든간에, 그래도 어쨌든, '열등한 여자들보다는' 나은 남자니까, 스스로의 자부심을 북돋기 위해 저런 짓거리를 해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도 그러했으니, 그런 그를 부둥부둥 해주며 그것이 글이 되고 책이 되는데 힘을 보탤 것이고, 또 그것을 모여앉아 가운데 두고서 여자들은 역시 열등해, 하고 낄낄댈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명민한 사람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명민한 여성들은 이미 '안다'.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것이 본인의 열등함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매의 눈으로 캐치하는 것이다. 으으- 정말이지 너무 싫고 소름 돋는 방법이다.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기.



이건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1900년 대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지금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갑인걸 드러내기 위해 을을 뭉개는 것도 그렇고,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이 발현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나는 잘났어. 왜냐하면 너가 못났기 때문이야."



스스로의 자랑스러운 점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상대를 아래로 아래로 짓밟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그 멍청함, 미련함. 자신의 그 미련함과 열등감을 인지하지 못하는채로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히죽히죽거리기... 정말이지, 이런 못난이 습성은 어쩌면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해 이렇게 아무말이나 아무때나 막 하는 이유, 그런 책을 쓰는 이유,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 이 모두에 대해 현상을 보고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왜' 그런건지도. 그리고 '여성과 픽션'에 대해 말하기 위한 이 글에서, 그 모든걸 지적한다.




권력과 돈과 영향력은 그의 것입니다. 그는 외무대신이며 재판관이고 크리켓 선수입니다. 그는 경주마와 요트를 소유하고 있고 주주들에게 200퍼센트의 배당금을 지급하는 회사의 중역입니다. 그는 자기가 운영하는 대학과 자선단체에 수백만 파운드를 남겼습니다. 그는 여배우를 공중에 달아맸습니다. 그는 고기 자르는 도끼에 붙은 털이 인간의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것입니다.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해 석방하거나 아니면 유죄를 선고해 목매다는 것도 그 사람입니다. 안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듯합니다. (p.54)



아아, 여러분,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세상 똑똑하지 않습니까. 버지니아 울프, 제가 다 읽겠습니다. 듣자하니 《등대로》도 그렇게나 좋다던데, 제가 차근차근 다 읽어볼게요. 일단 자기만의 방과 3기니 먼저 읽고요.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p.56)



여성이 남성들이 쓴 픽션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매우 다양하며, 영웅적이거나 비열하고, 빛나거나 천박하며, 무한히 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가증스럽고, 남성만큼 위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 생각엔 남성보다 더욱 위대한 이물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픽션에 나타난 여성입니다. 실제로는 트리벨리언 교수가 지적하듯이 방에 갇혀 구타당하고 내동댕이쳐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영감이 풍부한 말들, 심오한 생각들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p.67-68)




여자를 교육시키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할까봐, 사실을 알게될까봐, 잘못된 걸 바로 잡으려고 할까봐, 세상에 대해 소리지를까봐 그리고 자기들이 사실은 지지리 못난 열등감 투성이 인간이라는 게 들킬까봐. 크- 버지니아 울프 진짜 만만세입니다.



우엇. 이런 게 있는데... 살까? (  ")








음.. 20만원에 육박하는데... 한꺼번에 사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사서 다 채울까? 생일되면 생일선물로 내가 나에게 선물할까? 음..하나씩 사서 모으는 게 낫겠지? 아 혼란스럽다...



자기만의 방 내가 너무 늦게 읽는 것 같긴 하지만, 바로 지금 읽어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우히히...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P60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3-1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이 걱정되니 간결함이 간 결함했군요... ㅋㅋ다락방님 페이퍼를 보니 저도 아직 안 만나본 버지니아울프를 만나고 싶습니다. 집에 댈러웨이부인도 굴러다니고 전자책 보관함엔 자기만의 방도 나를 기다리는데 난 왜 안 읽고 있는지...저만의 방이 없어 그런지...

다락방 2020-03-11 11:17   좋아요 1 | URL
제가 한 이십년전에 댈러웨이 부인을 아주 힘겹게 읽었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는 버지니아 울프를 애써 잊고 살았어요. 이 [자기만의 방]도 몇해전에 사두었다가 또 멀찌감치 밀어뒀었구요. 그런데 읽어보니, 와, 세상 재밌네요. 너무 명민한 여성인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나는 너무 늦게 읽는 것 아닌가, 했는데 저같은 사람이 또 있었군요. 반유행열반인님, 이제 읽으십시오. 때가 되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3-11 11:30   좋아요 0 | URL
말씀 들으니 정말 때가 된 느낌이네요! 오늘 전자책 한 쪽이라도 펼쳐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03-11 13:16   좋아요 1 | URL
읽으신 후에 감상 남겨주세요! >.<

비연 2020-03-1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는데.. 예전에.. 왠지 손이 안 가는.
버지니아 울프는, 좋은데.. 이상하게 문장으로 읽으면 거리감이... 근데 좋다니까 읽어봐야겠네 싶네요!

다락방 2020-03-11 13:22   좋아요 0 | URL
저도 좋다는 말을 그렇게나 들었으면서도 손이 안갔거든요. 방치 몇년째.... 그런데 읽어보니, 아,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건 이유가 있구나! 싶었어요. 비연님, 비연님에게도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으하하하하

공쟝쟝 2020-03-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살아ㅋㅋㅋ 버지니아 울프 전집 세트 ㅋㅋㅋㅋㅋ 저거 진짜 이쁘기까지해서 저도 살려다가 퍼뜩 정신차렷어요. 영화 디아워스 보셧어여? 니콜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로 나와여! 겁나 연기 잘하는데...!!!

다락방 2020-03-13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한꺼번에 못지르겠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등대로] 만 우선 주문했습니다. 오늘 올거예요. 그렇게 차근차근 한권씩 한권씩 결국은 다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으하하하.

니콜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로 나오는 건 알지만 디 아워스 보지는 않았어요. 저는 일단 울프 책 좀 더 읽어야겠어요. 지금은 <3기니> 읽고 있는데, 이것도 재밌어요!! >.<

공쟝쟝 2020-03-13 21:14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이 댈러웨이 부인 읽어요 ㅋㅋㅋ 읽구나서 디아워스도 읽어요 ㅋㅋㅋ (두권다 있는데 안읽은자)

다락방 2020-03-14 14:35   좋아요 0 | URL
저 댈러웨이 부인은 20년전에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청 지루하게 오만년 걸려 읽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