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언제나 지적인 사람들을 동경해왔는데, 어린 내가 생각했을 때 지적인 사람의 완성된 형태가 바로 대학교수가 아닌가. 대학교수라고 하면 바로 똑똑하고 지적인 사람, 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 오랜 시간을 들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됐을 때 쯤에는 교수라는 꿈을 쉽게 포기했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노력하는 것도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교수는 내 길이 아니야, 교수를 하는 사람은 타고나는 거야, 나는 아니야..


이렇게 포기했으면서도 사실 너무 오래된 꿈이라 그런건지 계속 저기 배꼽 근처 어긴가에 남아있는가 보았다. 이 책, 《보이지 않는 가슴》의 저자 '낸시 폴브레'는 매사추세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데, 책 틈틈이 교수로서의 일화가 언급될 때마다 너무 부러운거다. 별 얘기도 아니었다. 그저 교수로 일하면서 강의실에 학생들이 정원보다 많이 들어와 의자가 모자란 얘기를 한다거나,  학생들과 함께 뭔가를 논의해보자 얘기를 했다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들일 뿐인데. 그런데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다시 또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든다. 아, 나도 하고 싶다. 나도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만나고 학생들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가르쳐주고 또 학생들과 함께 얘기하면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찾아드는 거다. 누군가 나에게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은 거 너무 말하고 싶다. '낸시 폴브레'는 경제학과 교수인데 호주국립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사회정치이론 프로그램 객원교수이기도 하단다. 세계은행 자문의원이기도 하고, 뭐가 맡은 게 많아...


게다가 옮긴이의 말을 읽노라니, 옮긴이 윤자영 도 메사추세츠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낸시 폴브레 교수랑 공부중이란다. 아아... 내가 되고 싶었지만 굉장히 쉽게 포기했던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어...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정신차리자.



















어제 퇴근 후 집에 가서 밥을 먹고는 이 책을 들고 침대에 들어가 앉았다. 조금 읽다가 [낭만닥터 김사부2]를 볼 예정이었다. 주말에 조카에게 가면 김사부 얘기를 할 수 있을테지. 그 때까지 한시간 반동안 이 책의 남은 부분을 다 읽자, 오늘 다 끝내버리자,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잠이 쏟아졌다. 안돼 읽어야해,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보지만, 잠이 쏟아지고 쏟아지고 계속 쏟아져서... 아, 모르겠다. 나는 책을 던지고 자버린 것이다. 책 안녕, 김사부 안녕, 나는 자겠네... 그리고 자버렸어. 밥 먹고 금방 자버리니 소화가 될 틈이 있나.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밥 생각이 없는 거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네?)






샌드위치 왜케 쪼꼬미야. 햄치즈프렌치토스트도 샀다... ♡ (두 개 다 내꺼!)



출근하는 길에 어제 못다읽은 책을 집어들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데 아 진짜 너무 좋아. 집중 캡 잘돼. 아아...역시 지하철에서의 독서가 짱이다, 최고야. 특히 아침 출근 시간의 지하철, 그 안에서의 독서는 효율 백만배다. 아아,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르면서, 이렇게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교수... 라는 생각을 하다가, 아아, 됐다, 포기해, 자꾸 쳐다보지마...하였던 것이다.



자, 어쨌든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았다. '돌봄 경제학'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책이니 당연히 돌봄 노동에 대해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고, 책의 처음은 그렇게 생각한대로 시작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아이들의 교육 문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 그리고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해야할 복지에 대한 부분으로 막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다. 단순히 아이를 양육하고 노인을 돌보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구나, 이야기는 어디만큼 확장되는걸까 궁금했다. 물론 돌봄 노동에 대한 게 단순히 개인의 문제, 또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국가의 복지 차원까지 나아가 누진세 , 기업의 고용해고 까지 얘기하다니, 이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는걸까. 그리고 결국 낸시 폴브레가 하고 싶은 말을 나는 이렇게 알게 된다. 국가의 복지를 얘기하고 기업의 인원감축을 얘기한 건, 당연하게도,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작은 복지 국가와 같다. 소득 이외의 일들을 우선시하고, 자녀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시간과 돈의 측면에서 소득에 대해 높은 세율을 감내한다. 감원을 풍자한 글들 가운데 『뉴요커』에 로버트 설리번이 쓴 단편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아빠가 보낸 편지"라는 단편인데, 아버지가 식탁에 가족들을 불러 앉혀 놓고 식구를 줄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시간제로 돌리면 음식과 우유 소비가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내 생각에 네 어머니도 17세인 너는 옛날만큼 귀여운 애가 아니라고 인정할 거야"). 시어머니의 위치는 단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간부인 아버지의 봉급은 올라간다.

증대된 자본 이동은 가정생활의 의무를 갉아먹고 있듯이 시민이 해야 할 의무를 갉아먹고 있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다국적 기업이 왜 이 나라에 남아 세금을 내면서 인간의 능력과 자질을 배양하겠는가? 습관의 힘과 낡은 충성심 때문에 한동안은 이 나라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쟁의 법칙은 기업 국가처럼 새로운 기회를 이용하는 데 먼저 뛰어든 기업이 단기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주에서 승리할 것임을 시사한다. (p.276)




세금을 걷어서 아이들의 교육에 투자하고 근무시간을 줄여 부모 모두가 돌봄노동에 같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결국 그 아이들이 자라서 기업의 근로자가 되고 돌봄노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굳이 낸시 폴브레의 책을 읽지 않더라도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단순히 GDP의 지수 만으로 그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살기 좋은 나라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낸시 폴브레는 얘기한다. 그 GDP 안에는 돌봄노동이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거기에 당연한듯 따라오는 인간 감정의 가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것 없이 과연 살기 좋은 나라 라는 것은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인가.




국가 간의 경제 경쟁력을 비교하는 데 전적으로 GDP 에만 의존하는 것은 너그럽게 봐 준다고 해도 유치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장난감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가 이긴다는 뜻 아니겠는가? 철학적 논쟁에 개입하는 것보다는 장난감 숫자를 세는 일이 더 쉽겠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다. 다같이 성숙해질 필요가 있으며 경제 복지 지표MEW 에 무엇이 들어가는 것이 좋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현재의 GDP 지수는 실제로는 해를 끼치는 것들에조차 긍정적인 경제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대량으로 유출된 기름을 청소하는 데 돈을 썼다면 GDP 는 상승한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은 가마우지나 물개는 아무 '가치'가 없으므로 GDP 를 감소시키는 걸로 간주하지 않지만, 기름으로 범벅이 된 해안을 청소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GDP에 산입된다. 홍수나 태풍이 집과 건물을 파괴할 때 돈으로 평가한 가치가 손실되었다고 한다. 자원의 감가상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해가 수질이나 공기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기후의 변화를 야기하면 가치의 손실이라고 계산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자연 자원에는 가치를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삼나무가 캘리포니아 원시 우림에서 잘려 나갈 때는 생산된 통나무가 팔린 액수만큼 GDP 가 증가한다. 나무 자체에 체화되어 있는 자연 자원이나 생태학적으로 나무들에 의존하고 있던 식물과 동물 종들의 가치의 손실은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생산되지 않은'것들로 간주된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을 우리 자신의 어머니처럼 당연시한다. (p.110-111)





언제나 그렇듯 좋은 책읽기였다. 경제학 공부를 하거나 경제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나보다 더 재미있게 읽고 또 가져갈 것들도 더 많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역시나 경제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좋았고. 나는 비록 교수도 될 수 없고 그저 책만 읽을 뿐이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읽으면서 배워나가는 건 너무 좋다. 이 책에서 읽은 게 저 책과도 연결되고 또 저 책에서 읽은 게 이 책과도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마다 짜릿해진다.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교수는 될 수 없지만 단단해지기는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다.




자, 여러분 3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는,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여러분. 아 그런데 어려울 것 같아서 쪼그라든다.. 그래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는 게 낫다는 걸 확신한다.


















어째서 감원 대상이 될 위험이 없는 사람들은 ‘감원‘이 경제에 건전한 영향을 미친다며 입에 마르게 칭찬하는 것일까? 자신은 공동선을 위해 해고당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안심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러셀 베이커, 『뉴욕 타임스』, "시장이라는 신" 칼럼 中 - P275

인공유산 반대 운동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수사들은 여성이 태어날 아이의 욕구보다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결정을 하는 데 대한 분노가 바탕이 되고 있다. - P279

보수주의 남성들은 책임에 대한 대가로 지도자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책임을 지는 대신, 여성에게 양자택일의 선택권을 준다. "나에게 권위를 주면 당신을 돌봐 줄 것이다. 내 권위를 빼앗으면 너와 아이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 P279

근대 사회주의의 기원은 보통 로버트 오웬의 추종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세기 초 영국 공장 지배인이면서 자수성가한 자본가로서 아동 노동 금지 투쟁을 이끈 사람이다. 오웬과 그 추종자들은 사람들이 공공선을 얻기 위해 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동료 시민을 형제자매로 일컬으며 자매도 형제와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조롱을 받았지만, 그들은 단지 국가 계획 경제에 의존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로 이름 붙여진 사람들뿐 아니라 소위 자본주의 경제의 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은 의도만 좋으면 결과도 좋을 것이라는 순진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함께 실질적인 이론을 겸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P287

마르크스는 여성이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활요구를 만족시키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데 쏟아 붓는 시간과 노력을 사회적인 측면이 아닌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 P288

교회를 경멸하기로 유명했던 마르크스는 한때 종교를 이 땅의 정의를 천국의 보상으로 대체해 버린 ‘대중의 아편‘으로 보기도 했다. - P289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이해한다고 너무나 자신하는 조직은 그 욕구를 충족기시킬 가능성이 별로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양 극단의 선택 말고는 다른 선택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 화가 나서 나는 조직을 나와버렸다. - P291

이윤 극대화의 압력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몇몇 제도에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병원이 환자의 권리와 돌봄의 질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학교가 오직 시험 점수만 중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양로원이 비용을 삭감하기 위해 우리 부모를 홀대하기를 원치 않는다. - P300

여성주의자들은 가족 정책에 대해, 전통적으로 양분된 태도를 취해 왔는데 양쪽 입장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가족 노동을 지지하는 정책은 종종 여성을 가정에 묶어 놓기 위해 입안된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유급 휴가를 제공하는 것이 그 예다. 다른 한편 여성을 집밖으로 끌어내는 정책은 전통적으로 비시장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해 왔다. 시장 노동을 하는 조건으로 공적 부조를 제공하는 정책이 그런 예다. 가족의 돌봄 노동을 보상하고 동시에 성 평등을 촉진할 정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남녀가 모두 시장 노동과 가족 노동을 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남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능력과 여성의 개인적 성취를 위한 능력을 함께 개발하는 새로운 노동 분업을 지향한다. - P306

여성은 때로는 재생산 의무를 방기해 저출산을 야기한 이기적 여성으로 또는 이기적 가족주의와 모성의 화신인 학부모로 비난받는다. 전자는 돌봄 노동을 완전히 회피 또는 포기한 집단이며, 후자는 돌봄 노동을 과잉 공급하고 있는 집단으로 불 시 있다. 그러나 두 집단은 돌봄의 의무를 개인과 가족에게 맡기는 사회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양극단일 뿐이다. 개인과 가족이 태어날 또는 태어난 아이의 경제적 복지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아예 아이를 안 낳기로 하거나 아이의 경제적 기회와 미래를 위해 내 아이에게만 지나치칠 정도로 부모의 자원을 투입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개인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경제적 복지가 부모에게 달려 있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옮긴이의 말 中 - P343

모든 어린이들이 적절한 돌봄을 받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는 것은 개인 간 부의 격차를 완화하는 해결책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옮긴이의 말 中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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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2-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ㅎㅎ 3월 책은 표지부터가 도전의식(?)을 일으키는... 흠냐. 좀 일찍 시작해야 하나 하고 있슴다..ㅜ

다락방 2020-02-26 15:51   좋아요 0 | URL
저도 3월 책은 좀 일찍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좀 일찍 시작해도 오래 걸릴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제 우리 표지만 봐도 느낌 알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쫄려요 ㅋㅋㅋㅋㅋ

카스피 2020-02-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척중에 포항공대 교수님이 있으셨어요.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 서울대를 졸업하고 포항공대 교수를 하셨던 분으로 친척들 사이에서는 수재로 유명하셨떤것 같아요.학창시절에도 열심히 공부를 하셨지만 교수가 된 후에도 정말 열심히 연구를 하겼다고 하던데 그 떄문인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대학교내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아무튼 교수라는 직업이 밖에서는 방학기간도 길고 편해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 보더군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