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시절 우린 사이가 아주 좋진 않았지만 엄연히 연인 사이였고 무미건조한 감정 외에는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는 연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던 걸까. 나는 화를 냈다. 우리가 권태기일지는 모르지만 4년이나 사귄 정이 있는데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건 너무 무례한 것 같다고. 무주는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고 물었다.

무례? 너 ... 화나긴 해? 그러면 잡아봐.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 말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

뭐가 미안한데? 너 진짜 화나? 날 죽이고 싶다거나 내가 만나겠다는 남자를 죽이고 싶다거나 그래?

무슨 소리야. 

거봐 아니잖아. 넌 그렇게 안 할 거야. 그냥 내 행동과 결정을 흥분도 하지 않고 비판하겠지.

그리고 무주는 떠났다. (p.45-46)




남자는 업무차 오스트리아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스위스에 거주한다는 걸 알고있던 터라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어떤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래서 그렇게 7년간 잘 지켜왔지만,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 지금 자신이 머무르는 곳 근처라고 하니 뭔가 참을 수 없게 된거다. 연락하지 않은 채 7년을 잘 버텨왔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메일을 보낸다.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답장이 올까 기다리고 자신이 왜 메일을 보냈을까 수십번 생각하고 후회하면서 남자는 일을 한다. 나는 순식간에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이 되어 같이 초조했다. 그리고 이건 사실 괜찮은 방법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자니? 라는 문자를 보내는 건 좀 찌질할 수 있지만, 7년이나 지났는데, 7년이 지난 후에 이메일로 '나는 지금 네가 산다는 곳 근처에 와잇어' 라고 보내는 거는 좀 괜찮지 않나.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거다. 물론 내가 그런 이메일을 보내게 된다면, 그리고 그가 사는 곳 근처에 가게 된다면, 그건 업무상은 아닐 것이다. 내 업무는 출장이 필요없는 일이고, 그러니 출장으로 업무차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어느 한 도시에 가게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나는 그에게 '마침 여기에 와있고 여기는 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네 생각이 난다'는 메일을 보내려면, 사실 부러 가야한다. 부러 그곳에 가서는 마치 우연히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것처럼 꾸며야 한다. 마침 여기에 오게 되었어, 네 생각이 나네.


남자는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어떡하지 자책을 오만번쯤 할 무렵 그녀로부터 답장이 오고, 그녀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올 수 있다면 오라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그 뒤의 일정을 포기한 채로 그녀에게로 간다. 헤어진 옛 연인을 7년만에 만나게 되는 거다. 기차에서 내려 저기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녀라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랑 살겠다고 떠났긴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 빼꼼, 아이가 나온다. 그 사이, 7년이라는 시간동안 여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남자는, 옛 연인과 재회 했으나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이고 또 어떤 아이의 엄마인 것을 알고 보게 되는 거다. 그러면, 그러면 마음이 다 정리될까?



나 역시 그런 식으로 그와 재회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사는 나라에 부러 찾아가서 '어쩌다 보니 여기 오게 되었고, 여기는 당신이 사는 곳 근처이니 마침 당신 생각이 나네' 라고 이메일을 보내 말을 걸었을 때, 그로부터 만나자는 답장이 올 수 있겠지. 그래, 우리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 네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나갔을 때, 그는 옆에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것이 현실적인 미래일 수도 있을 테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들이 변하니까. 어떤 사람들의 환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의 배경은 아주 크게 변할 수 있으니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상태에서 어떤 조건이 변하진 않았지만, 상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수 있다. 긴 시간이었으니까,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 새로운 집을 찾아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그전과는 아주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날 나로부터 불쑥, 이메일이 도착할 수도 있겠지. 이 책속의 남자가 그런것처럼, 나 역시 그런 상태의 전연인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겠구나. 그러면 마음 속의 모든 것들이 그냥 훅- 정리될까? 그런식으로라도 그를 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게 나을까.



그렇게 처음 시작으로 말랑말랑 내가 나를 넣고 읽을 수도 있는 이 책에서 나는 저 위의 인용문을 보게 되는 거다. 4년간 연애했던 연인이 만나고 싶은 다른 사람이 있다고 이별을 통보하고, 이에 남자가 그것을 무례하다고 말하는 일. 그런데 여기에대고 여자는 너 진짜 화나긴 하냐면서, '날 죽이고 싶다거나 내가 만나겠다는 남자를 죽이고 싶다거나 그래?' 라고 묻는 거다. 여자는 마치 그렇게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정도로 화가 나야만 우리가 사랑했었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람에 대해 죽이고 싶다는 감정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내가 죽이고 싶다는 격한 감정을 품게될 때는 그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경우에 한했다. 이를테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나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화는 나겠지, 서운하겠지, 배신감을 느끼겠지, 너무 속상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사랑했던 애인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느끼나? 나는 이게 너무 이상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이고 싶어진다고?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나?


내가 무척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달랐고,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바라는 만큼 그가 나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랑 헤어진 뒤로 사랑하게 될 그 사람의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왜 책 속의 여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생겨 떠나면서, 이런 자신에게 죽이고 싶은 감정이 드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걸까? 죽이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다, 는 마음 같은 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될 수 있을까? 나는 나랑 헤어진 사람이 계속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다. 내가 바라는대로 우리가 오래 함께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마음은 정말이지 전혀 없다. 내 연인이 안될거라면 죽어 없어져버려! 이런 마음이, 도대체 왜 생기는걸까?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하는걸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히 내게 이별을 말하다니, 화가 난다고 연인을 찾아가 염산을 뿌리고 해를 입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뉴스에서 종종 듣게 되는 일들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게 정말이지 이해가 안된다. 왜 그러고 사는걸까. 다른 사람의 발을 실수로 밟아도 우리는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염산을 뿌릴 수 잇을까? 상대도 염산으로 큰 타격을 입고 평생 힘들게 살겠지만, 염산을 뿌린 나는? 헤어진 애인에게 염산을 뿌린 자신은 대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나?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싶다,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망치고 싶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지 않다니'에 대한 그 다음 감정으로 발생할 수가 있나.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가 나를 떠난다고 햇을 때 내가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감정도 아니고 바른 감정도 아니다. 책속의 여자가 울부짖듯이 그것이 나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따라와야 할 감정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속상하고 아프고 화가 나겠지만, 슬퍼서 엉엉 운 채로 두 달간 밥도 못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떠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마음이 자신 안에 생긴다면 그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내 과거의 연인들도 나를 찾아와 죽이고 싶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죽이고 싶어할까? 죽이고 싶어하면서 그것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와, 그거 사랑 아니다. 그런 사랑 하지 마라.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사랑이라니, 대체 그런 게 어디있나. 



여자는 7년만의 재회 후에 그에게 '그당시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마 그녀가 다른 사람과 떠나고 싶었던 이유일 것이다. 계속 혼자 그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해 수치심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다른 남자와 떠난다고 해도 그는 나를 죽이고 싶어할만큼 화가 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난다?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다? 그것은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책속에서 이렇게 나오다니. 사실 이것이 일반적인 감정인가? 사실 사람들은 아주 많이,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는가?


어제 여러명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 때 물어보고 싶었는데 까먹고 물어보질 못했네. 보통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면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어지나요? 아, 나는 정말이지 '화가 나긴해? 죽이고 싶고 그래?' 라고 물어보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살고 싶고 나를 떠난 연인도 살기를 원한다. 나는 행복하고 싶고 나를 떠난 연인도 행복하기를 원한다. 물론, 나랑 지낼때만큼은 말고.. ( ")  쿨럭.




비가 오는데도 굳이 나가 빵을 사왔다. 커피랑 먹고 싶어서. 세수도 하지 않고 나갔다. 으하하하. 아직도 세수는 하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만큼은 세수를 하지 않고 지내볼 것야. 일요일은 그러라고 있는 날이 아닌가. 그렇지만 뭔가 더러운 이 기분...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씻을까.....





만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다.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보고 시다.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왜 만나면 안 되는 건지 의문을 품고 있다. 마음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어 이쪽으로 저쪽으로 뒤척거리기만 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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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1-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가 오는데도 굳이 나가서 전과 막걸리를 사왔어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ㅋㅋㅋ 빵과 커피하고는 참 다른 듯하지만 비오는 날 빵과 커피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이죠? ㅎㅎ

저는 헤어진 사람을 죽이고 싶다거나 그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헤어지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상대에 대해 아무 마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데, 아마 사귀는 동안 줄 수 있는 마음을 다 줘서 더는 미련도 후회도 없어 그런 거 같습니다.

다락방 2019-11-18 08:49   좋아요 1 | URL
저는 어제 이 글을 쓰고난 뒤에 샤워를 했습니다. 깨끗한 일요일 저녁을 보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저도 뭐 매순간 그의 행복을 바란다..이런 건 없어요. 그건 제 영역이 아니죠. 그렇지만 야속한 마음에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와 저는 그것은 정말이지 상대의 배신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 너는 죽어버려.. 이런 마음은, 와, 너무.. 괴상하잖아요?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인건데.. 어휴..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서 돌아서버렸다면 물론 너무 슬프지만, 아무튼 참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런 마음이요.


잠자냥 님의 댓글을 읽으니 ‘짙은‘의 노래가 생각나네요. <잘 지내자, 우리> 라는 노래인데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분명 언젠가 다시 스칠 날 있겠지만
모른 척 지나가겠지
최선을 다한 넌 받아들이겠지만
서툴렀던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꾼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기적을 꿈꾸는데... 어흑 ㅜㅜ
아무튼 거시기한 날입니다.

심술 2019-11-1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사랑 잘 안됐다고 한 때 사귀던 이의 죽음을 바라는 건
정신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병 앓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거죠.

고미숙 <호모 에로스>를 중학교 교과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9-11-18 16:58   좋아요 0 | URL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들고 슬픈 일이지만, 그걸 인정못하고 계속 집착을 보이는 건 분명 정상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대로, 그러나 그 병을 앓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 호모 에로스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지금 검색해보겠습니다.

심술 2019-11-19 17:02   좋아요 0 | URL
훌륭한 책입니다.

고미숙 모든 책 읽은 건 아니지만 제가 읽은 고미숙 가운데 가장 좋았어요.
아, 물론 다른 책들도 좋아요.
10점 만점에 평균 8점 쯤 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9-11-19 17:03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어제 구입했습니다. 전자책으로 샀어요. 조만간 읽어볼게요!! 추천 감사합니다. :)

심술 2019-11-20 11:41   좋아요 0 | URL
즐겁고 행복한 독서 되시기를.

다락방 2019-11-20 12:11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9-11-18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8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