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요가 센터에서는 매타임마다 프로그램이 다르다. 한 달 시간표가 나오고 그 시간표대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그래서 나는 시간표를 보고 내가 갈 수 있는 시간대에 가고 싶은 운동에 가면 된다. 핫요가, 빈야사, 아쉬탕가, 테라피, 아디다스, 펠비스, 비트 그리고 소도구 필라테스..까지. 나는 이 모두를 한 번 이상씩은 들어봤고 핫요가를 매우 좋아해 일주일에 한 번 가게 되면 그것을 핫요가로 선택할만큼 자주 했다. 시간대가 잘 맞지 않아 아쉬탕가는 해본적이 별로 없고, 펠비스와 테라피를 가급적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간 쓰지 않았던 곳의 근육들을 움직여주는 거라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라테스... 아아, 필라테스여..
처음엔 필라테스가 싫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근육 운동이고, 빈야사나 아쉬탕가를 한 후에 다음날 근육통를 사랑하는 것처럼, 필라테스를 한 후의 근육통 역시 내가 사랑하니까. 근육통은 사랑 아닙니까?! 그렇지만.. 필라테스는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어서.. 언젠가부터 멀리하게 되었다. 시간표 보고 필라테스가 있는 날이면, 그 날은 '안가는 날'로 정해놓아버려.. 어느날은 복근에 어느날은 다리에 어느 날은 팔에 집중적으로 근육운동을 해줘서 근육이 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괴로우면 흑흑 ㅠㅠ 헉헉대면서 하는데까지 따라해보지만 ㅠㅠ 그 힘든 게 너무 짜증이나 싫어 ㅠㅠ 흑흑 ㅠㅠ 그래서 나는 필라테스 싫어, 안가, 너무 힘들어! 이렇게 되어서 최근 몇 개월간 필라테스를 가지 않았다. 듣지 않았어. 그리고 11월달에는 필라테스가 월요일이다. 주말에도 운동을 안하는데 연속해서 월요일까지 빠지겠구만, 나는 시간표를 보자마자, 필라테스가 있는 날은 요가 안가는 날로 정하고 제껴버렸다.
그런데!!
토요일에 《터미네이터:다크페이트》를 봤다. 아버지 모시고 가서 둘이 봤다. 아빠, 액션이 대단하대! 하면서 아빠를 모시고 보러 갔단 말이다. 아아..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브스)는 대니(나탈리아 레이즈)를 구하기 위하여 2042년에서 2020년의 지구로 보내진다. 대니를 죽이기 위해 같은 미래에서 역시 Rev-9 터미네이터(가브리엘 루나)도 보내지는데, 이 기계가 너무 강하다. 시간이 흘러 '터미네이터 사냥꾼'이 된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도 대니를 지키는 데 합류한다. 미래에서 온 강화인간 그레이스와 그간 한층 더 강해진 사라 코너가 함께 대니를 지키는 거다. 이 내용이야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보아온 사람이라면 다 짐작 가능한 내용일 터. 아, 그런데 그레이스.. 이 그레이스를 어쩐단 말입니까. 아니 글쎄 그레이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너무나 완벽하다. 뭐 이런 여자가 다있지 정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레이스는 미래에서 전사로 싸우다가 자원해서 강화인간 수술을 받는다. 보통의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센 사람이 되어서 대니를 지키기 위해 현재의 지구로 오게된 거다. 대니를 지키는 게 목적이고 어떤 걸로도 터미네이터를 죽일 수가 없어서, 그레이스는 계속해서 터미네이터랑 싸우다가 도망치고 싸우다가 도망치면서 대니를 지키기에 최선을 다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우월한 신체적 능력이 그대로 보여지는데, 아, 근육맨이여 ㅠ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근육 빡빡 장착된 인간인데, 흑흑, 막 높은 데도 훌훌 뛰어넘고, 총을 연속해서 발사하고, 쇠사슬 손에 감고 빙빙 돌리다가 휘익- 휘둘러서 터미네이터 부숴버리고 ㅠㅠ 차에서 내리는 대니의 손을 잡아주고, 대니 다칠까봐 감싸안아주고 그러는데 진짜 ㅠ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 그 자체인것이다.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바로 그레이스인 것이야 ㅠㅠ 눈동자는 어쩔거고 진짜, 근육 어쩔거고 ㅠㅠ 왜이렇게 커요? 정말이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완벽한 인간보다 그 이상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ㅠㅠ 나는 너무 정말이지 그레이스라는 존재 자체에 너무 너무 감동을 먹어가지고 ㅠㅠ 영화를 보고나서 그녀의 인스타를 들여다보기 위해 검색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트윗도 못찾겠고 엉엉 ㅠㅠ 그녀가 1987년생이며 캐나다 출신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흑흑 ㅠㅠ 뭔가 맥켄지 데이비스 운동하는 영상 있으면 나 너무 좋아서 반해가지고 기절할 것 같은데. 저는 운동하는 영상을 매우 좋아합니다. 들여다보면서 맨날 눈 하트 뿅뿅되는데, 맥켄지 데이비스 운동영상 좀 올려주세요. 아니야 올려주지 마세요 저 죽어요 ㅠㅠ
사랑이 시작되어 버렸다. 아주 오랜만에 사랑이 시작되어 버렸어. 이것은 사랑이다 찐사랑 리얼 러브 트루 러브 사랑... 나는 맥켄지 데이비스에게 김치찜을 해주고 싶다. 맛있는 거 해주고 싶은 거, 그게 바로 사랑이잖아. 사랑인걸 사랑인걸~ 맥켄지 데이비스를 내가 먹여 살리고 싶다. 그렇지만 맥켄지 데이비스 보다 내가 훨씬 가난하다는 것, 돈을 못번다는 것은 함정...
나는 주말 내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흑흑, 맥켄지 데이비스를 너무 사랑해서 다른 걸 일절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버려 맥켄지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맥켄지여 ㅠㅠ 사랑합니다 제가 ㅠㅠ
나는 맥켄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또 보러 갔다. 일요일에도 극장에 달려갔어. 그리고 또 처음 등장씬부터 완벽하다 이것은 퍼펙트야 이것은 트루 럽이다.. 이러면서 보았다. 이번엔 손수건도 가져갔다. 토요일에 볼 때도 자꾸 울컥울컥 했는데 혹시나 싶어 손수건을 가져갔더니 아니나다를까 나는 어느 순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보고 잇었다. 여러 장면에서 울컥이지만 그레이스가 .. 나는 그레이스를 사랑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대니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미래를 구할 남자의 엄마가 아니라 네가 미래야."
이 영화는 이 '여자'를 구하는 게 세상을 구할 '영웅'을 낳을 '자궁'이라서가 아니라, 이 '여자가 바로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지켜내야 할 이 여자 '대니'는 처음에 영문을 몰라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데 급급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성장한다. '나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을거야, 맞서 싸울거야' 라고 목청껏 소리지르는 것이다. 아, 저런 면 때문에 미래에서 대니를 지키러 왔겠구나, 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그렇고,
그레이스 너무 완벽해 너무 사랑해 너무 근사하다.
나는 아주 오랜시간을 한 남자를 사랑하며 지내왔다. 게다가 그 남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허덕이며 지내고 있고. 그러나, 주말에 맥켄지 데이비스를 알게된 순간부터 내 안에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을 훌훌 털어낸다. 내 안에 사랑은 이제 맥켄지로 채워져버렸다. 나는 맥켄지를 위해, 맥켄지를 닮기 위해 살거야.
월요일 필라테스 생각이 났다. 당연한듯 제끼려했던 필라테스. 그러나 맥켄지 근육을 보고 나도 필라테스 가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맥켄지처럼 멋있게 되려면 맥켄지도 열심히 운동했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닮기 위해 나도 열심히 운동할거야. 필라테스 이제 더이상 제끼지 않겠어. 필라테스 듣고 근육 키워서 맥켄지 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겠다. 그래, 필라테스 가는거야, 맥켄지 님을 닮기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하는거야. 빠샤!!!!
어젯밤엔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맥켄지를 만났다. 흑흑 사랑합니다.
토요일이었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마침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맥켄지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거다. 나는 그녀에게 어딜가냐 물었고 그녀는 회사에 일을 하러 간다고 했다.
"토요일인데도 일해요?"
"네 조금 해야 해요."
나는 일이 있어 뭔가 잠깐 가지러 사무실에 들렀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흐흐 그렇지만 맥켄지를 마주쳤고 맥켄지가 회사를 간다잖아? 나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맥켄지랑 같이 걸었다.
"나도 오늘 일 좀 더 해야겠어요."
"아 그래요?"
"네, 몇시까지 일해요?"
"음.. 한 시정도까지는 할 것 같아요."
나는 걸으면서, 우리가 단 한 번 만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팔짱을 끼고 옆에 꼭 붙어 걸었다. 한 시까지 일한다고?
"나도 그 쯤까지 하면 일 다 끝나는데, 끝나고 나랑 데이트 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맥켄지는 놀라는 것 같았다. 음.. 싫은가?
"나랑 데이트 하는 건 별로에요?"
"아뇨, 좋아요."
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씨발 졸라 좋아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회사 건물로 걸었다. 한 시 이후면 데이트 할 수 있따 꺅 >.<
그러나 월요일이 찾아왔고 ㅠㅠ
아무튼 나는 맥켄지 데이비스를 사랑하게 된것이다. 만세!!
수시로 SNS 에 들어가 맥켄지를 검색해보는데 나처럼 그레이스랑 사랑에 빠진 여자가 많았다. 엄청 많았다. 한녀들은 그냥 다 그레이스에게 푹 빠져버린 것 같아. 갑자기 '디 그레이엄'의 《여자는 인질이다》가 생각났다. 만약 아주 오래전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이 남자와 같은 비율로 여성이었다면, 그 역할을 여성이 맡았다면, 그랬다면 지금처럼 이성애자가 더 많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성애가 디폴트가 되는 일이 없었을 것 같아.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세상은 그렇게나 남자가 영웅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이거봐, 남자는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고, 여자를 구하는 기사이지. 이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세상은 그렇게 여자들을 세뇌시켜왔어.
그러나 영웅이 여자라면, 싸우고 지키고 이기는 게 여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계속해서 남자를 사랑할까? 별로 그럴것 같지 않았다.
가부장제는 여자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도록 남성 폭력이나 경제적 제약 등 장애물을 세워 여자가 의존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한다.
여자가 원래 의존적으로 태어났다면 우리가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온갖 장애물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p.355)
일요일밤에 맥켄지에 대한 사랑을 다스리면서 펼쳐든 《제2의 성》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오더라.
세상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에 가두어 두면서도 그녀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날개를 잘라놓고 그녀가 날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만일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는 결코 현재 속에 갇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p.776)
그렇다,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면, 그렇다면 여자들은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닮고 싶은 여자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근사한 일이다. 짜릿해서 미치겠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