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대해 제대로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그림책으로 보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제대로된 이야기가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아는 거라고는, 마녀의 저주에 걸린 공주가 평생 잠만 자는데 왕자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키스를 받으면 그 저주에서 풀려난다..는거.


공주가 왜 저주에 걸렸는지, 왕자는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 이야기를 떠올릴 틈도 없었으니까. 딱히 관심도 없었고. 그러다가 백설공주를 비롯해서 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까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어떻게 한 번 본 사람이, 처음 본 사람이 상대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을 수 있을까. 이게 말이 되나? 처음 본 사람에게 반할 수는 있지만, 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말레피센트'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봤다. 졸리가 나온다고 해서 봤다. 동화 같은 이야기, 마녀 이야기, 판타지 스러운 분위기일것 같아 관심도 없었는데, 마침 넷플릭스에 있더라. 오호라, 한 번 볼까, 하고 찜해두고 있었는데, 아아아아 일요일밤은 왜때문에 잠이 안오는걸까. 하긴 오후에 커피를 마셨지, 잠이 안오는 게 당연하다, 나는 말레피센트를 재생시켰다. 조금만 보다가 졸리면 자야지, 했는데 우후후훗 새벽 두시가 다 되도록 이 영화 다 보고 잤다. 나여...



'말레피센트'는 요정이었다. 다정하고 밝고 활기찬 요정. 어릴 적부터 마법의 숲에서 다른 마법의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게 살다가 그 숲에 몰래 들어온 인간 소년 스테판을 만나게 된다. 숲의 물건을 훔쳤다가 숲의 요정들에게 들킨 것. 말레피센트는 훔친 물건을 돌려달라 한 뒤에 인간 소년과 가까워진다. 열여섯살이 되었을 때 인간 소년은 말레피센트에게 입맞춤을 하며 진정한 사랑을 맹세하는데, 그러나 인간 스테판의 마음속에는 탐욕이 가득해, 점점 말레피센트를 잊어가고 어떻게든 왕이 있는 성에 들어가기를 꿈꾸며 권력을 갖고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던 차, 마법의 숲을 공격했던 인간 세상의 왕이 말레피센트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왕은 '가서 말레피센트를 죽이고 오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내 딸을 주겠다'고 한다. 이에 스테판은 오만년만에 말레피센트를 찾아가 '위험을 알려주려고 왔어'라며 다정하게 접근한 뒤 (아마도)술을 주고 그녀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한다. 하아- 오랜만에 찾아온 인간 스테판을 말레피센트는 다정하게 대해줬건만, 그러나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잘라서 훔친다. 제버릇 개 못준다더니...

잠에서 깨어 날개를 잃은 걸 알게된 말레피센트는 울부짖는다. 그녀는 애정을 품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다. 날개를 잃어서 고통스럽고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고통스럽다. 자신의 종인 까마귀를 시켜 알아보니, 스테판은 왕이 되고 싶어 이 일을 꾸민거였다. 하아- 왕이 되려고 내 날개를 잘라갔구나...


스테판은 정말 왕이 되었고 그리고 아기를 낳았다. 말레피센트는 스테판을 찾아가 아이가 예쁘고 우아하게 자라겠지만, 16살이 되기 전에 물레바늘에 찔려 깊은 잠에 들것이고, 진정한 사랑이 담긴 키스만이 그 잠에서 그녀를 깨울 수 있다고 저주를 내린다. 영원히, 영원히...



스테판은 이에 아기를 숲에 숨기는데, 그러나 말레피센트는 아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쭉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하지만, 아기가 말레피센트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다. 아기를 돌보던 요정 세 명은 아기를 본 적이 없어 너무 서툴고 아기를 굶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말레피센트는 나타나 아기를 돕는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말레피센트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말레피센트와 우정을 나눈다. 말레피센트의 남아있던 마음 한 조각은 이 아기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점점 더 움직이고 결국 이 저주를 풀고자 하지만, 애초에 '영원히'라는 단서를 달았던 터라 이 저주를 풀 수가 없다. 이것이 너무 괴로워... 그렇게 아기 오로라는 열여섯살이 되는데, 열여섯살을 하루 앞둔 날 이웃 나라 왕자를 숲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의 외모에 반하게 돼...



저주는 힘이 세서 공주는 성에 가 16년만에 아버지를 만나지만 결국 물레 바늘이 찔려 잠이 든다. 말레피센트도 오로라 공주를 지키던 요정들도 이웃나라 왕자를 헐레벌떡 공주가 잠든 침대 앞으로 데려간다. 그녀에게 키스해, 키스해!! 키스하란 말이야!! 왕자는 '그러면 안될 것 같아요, 우리는 한 번 밖에 안만났는데요' 라고 말한다.


이건 정말 중요한 지점 아닌가.

그래 한 번 밖에 안봤다. 게다가 그녀는 잠들어 있다. 그런데 키스라니, 말이 되는가. 잠들어 있는데 키스하면 어떡해!! 상대의 동의 없이 키스하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한 번 봤는데 무슨 진정한 사랑이야, 그게 말이 돼?

애초에 진정한 사랑 따위는 없기 때문에 그 저주에서 깨어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말레피센트지만, 그러나 혹시나 하며 몰래 지켜본다. 어쩌면 저 저주를 풀어줄지도 몰라..하면서. 요정들 셋은 키스하란 말이야!! 왕자에게 외치고, 왕자는 그렇게 공주에게 키스한다. 그러나 공주는 깨어나지 않는다. 왜? 처음 본 사이에 무슨 진정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있냐.



이 영화를 보다보면 왕자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어떤 왕자가 나타나도 키스로 그녀를 깨울 수는 없을 것이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아니, 말이 안되잖아. 한 번 보고, 처음 보고 무슨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 애시당초 말레피센트는 남자의 진정한 사랑 따위를 믿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공주는 저주에서 깨어날 수 없느냐?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 키스가 누구의 키스여야 하는지 다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스포일러를 팡팡팡팡 파바바바바바바바방 터뜨릴까말까, 그 키스는 누구의 키스일까요?




영화는 좋다. 안젤리나 졸리 너무 좋고 안젤리나 졸리가 실제로 저렇게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날개 너무 거대해서 좀 무섭기도 하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마지막에 스테판 왕과 싸운다. 스테판 왕은 .. 하아- 답이 없어. 말레피센트는 자신을 죽이려던 스테판 왕을 그래도 용서하고 돌아서려는데, 아아, 인간 남자여.. 왜그리 어리석은가, 왜 한 치 앞을 보지못해, 왜 네 생각만 하는가. 네 명을 네가 재촉하는구나, 스테판이여, 인간 남자여, 남자 왕이여....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생각이 났다.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결혼을 방해하던 '미친' 버사부인, 그 버사부인의 입장에서 쓰여졌던 소설. 그녀는 왜 미쳤는가, 그녀는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결혼을 방해하는 '악인'인가, 그녀가 왜 미쳤는지, 왜 거기에 갇혀있는지, 진 리스는 모든 이야기에는 다른 면이 있다면서 버사 부인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써낸 것이다.

















말레피센트 역시 마찬가지. 공주는 왜 저주에 걸렸는가. 물론 말레피센트가 저주를 걸 대상은 냉정히 따지자면 오로라 공주가 아니라 스테판 왕이 되었어야 했다. 말레피센트를 고통에 놓이게 한 건 오로라가 한 게 아니라 스테판이 한 거니까. 어쨌든 말레피센트는 인간 남자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배신을 당했다. 인간 남자를 괴롭히기 위해 인간 남자의 딸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스테판이 딸에게 걸린 저주로 인해 남은 평생을 괴롭게 살았으니 복수에 성공했다 보여지지만, 사실 스테판이 괴로운 건 딸이 저주에 걸렸다는 것보다, 언제 말레피센트가 자신에게 찾아와 괴롭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레피센트를 괴롭혔으니까. 누구보다 자신이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레피센트로 인한 두려움에 떠는 거다. 자기가 나쁜 짓을 안했으면 그토록 두려워할 일도 없는데.



말레피센트는 그러니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다른 이야기' 이다. 다른 버젼. 모든 이야기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라고 진 리스가 그랬다.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예요. 항상."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183쪽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내용인 것도 좋았고, 그렇게 공주가 저주에 걸린 게 사실은 공주의 아빠 때문이라고 얘기해줘서 좋았다. 무엇보다, 한 번 봤는데 무슨 잠자는 여자에게 키스를 해, 그건 안될 말이고 왕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 남자의 진정한 사랑 따위..... 그 따위 것 없다고 말하는 것도 좋았고.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사랑' 자체가 없느냐?


아니요.


그런 이성애가 아닌 다른 사랑, 다른 방식으로의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그게 엄마나 아빠일 필요도 없는 거라고 말레피센트는 말해준다. 아무튼 짱좋네, 졸리. 날아다니고 힘도 세고 인간 남자의 진정한 사랑따위 없어!! 이러고. 졸리가 짱이다 진짜.


말레피센트2 보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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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10-0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에 말레피센트2 광고 많이 하더라구요. 다음에 1 부터 한번 봐야겠네요. ^^

다락방 2019-10-07 14:29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까 10월 중순에 개봉하더라고요. 개봉하면 2편은 극장 가서 봐야겠어요. 어휴 졸리 진짜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10-0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1도 안 궁금했었는데 이 글 보니까 좀 보고 싶어지네요. 왕자가 키스 망설인다는 설정도 재미나고 무엇보다 그 스포일러가 몹시 궁금하네요. 으으. 봐야 하나! ㅎㅎ

다락방 2019-10-07 14:30   좋아요 0 | URL
저도 진짜 1도 안궁금했는데 어쩌다 뭣 때문에 보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졸리 나와도 안궁금한 영화였거든요.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볼까? 이렇게 된것인지..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조금만 보려다가 내처 다 보았네요.
그치만.. 밤늦게 봤더니 자기 전에 초큼.. 무서웠어요... ㅜㅜ

단발머리 2019-10-0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투브에서 12분 영상으로 봤는데 결말이 완전! @@ 맘에 들더라구요.
저도 안젤리나 졸리 좋아요. 그녀 말고 다른 사람 누가 가능했을까 싶어요. 그걸 알고 캐스팅했겠지요.

다락방 2019-10-07 16:04   좋아요 0 | URL
결말도 마음에 들고 그간 알던 동화보다 완전 현실적이죠! 뭐랄까,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없다는 걸 바로 증명하는 것 같았어요. 후훗.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존재 형태도 너무 좋았고요.
저도 졸리여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다 보고나서 졸리 말고 누가 가능했을까,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잘 웃지 않는 졸리가 영화 속에서 가끔 살짝 웃을 때, 진짜 너무 좋아요. 온몸이 짜릿해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