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는 엄마와 술을 마셨다. 보통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술을 마시는데, 그 날도 엄마가 '니가 좋아하는 여행 프로그램 틀어봐'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봄밤》이 하길래 채널을 고정했다. 엄마, 이거 보자.
이걸 처음부터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지난번에도 잠깐 본 적이 있던 터라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략 알고 있다. 지난번에 잠깐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막 몰랑몰랑 해졌으므로, 나는 이걸 한 번 보기로 한다.
내가 본 게 몇 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정인(한지민)은 자신이 먹어야할 영양제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공부하는 정인의 동생이 친구에게 다 갖다준 것.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 영양제가 다시 필요했던 정인은, 그 약을 팔았던 지호(정해인)에게 문자메세지를 넣는다.
"오늘 약국 문 열었어요?"
그 날은 주말이었고 약국이 쉬는 날이었다. 지호는 여느때처럼 주말에 사람들과 어울려 농구를 했고 뒤풀이로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런 참에 정인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 잠깐 고민하던 지호는 답장을 보낸다.
"네, 열었어요."
거짓말이다.
거짓부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지호와 정인은 처음 만나고 아는 사이가 되면서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다. 정인을 향한 지호의 마음은 이성으로의 호감이었고 그건 정인도 마찬가지. 그러나 정인에게는 오래 사귀어온 애인이 있었다. 지호랑도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정인은 지호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지만, 지호는 정인에게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다'고 말하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크-
위의 친구 제안 거절은 아마도 1,2회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이 장면만 잠깐 보았던 나는, 이 순간 지호의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성으로, 연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사람과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상대를 속이는 일이다. 속이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왕년에 그거 안해본 사람 어디있나. 나도 다 해봤다. 어떻게든 옆에 있고 싶고 그러므로 오케이 친구, 알겠어, 하며 친구로 지내는 바로 그 마음... 그러나 마음 깊숙이 저기 저 안에 들어있는 큰 사랑... 럽...
더 럽....
하아-
그러나 그런 식으로 친구로 지낸다면 내 가슴은 찢어져요. 아파요. 더 가까워질 수 없고, 그러나 상대에게 다른 사랑이 생기는 걸 지켜보기도 해야 하는 그 마음. 그것들을 감당하면서 억지로 웃으며 '응 잘됐네' 해야 하는 그 마음... 그거슨 노노해. 그러지말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이제 그만 아프게 하자. 그러므로 지호는 정인을 계속 만나고 싶고 다정한 사이가 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자신은 없어'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싫어서, 원하지 않아서 친구로 지내지 않는 게 아니라, 더 큰 마음이라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뭔지 알지. 크- 소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 아닌가. 아무튼 그랬는데 그 다음 회차를 안봐서 뭐가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둘은 친구...가 되기로 했는가보다.
친구.
펑요우.
프렌드...
친구란 무엇인가....
자, 그렇게 지호는 부랴부랴 달려가서 서둘러 약국 문을 연다. 약국 문을 열고 잠시 후 정인이 온다. 그 때 그 영양제를 다시 달라고 말하면서 그들 사이의 대화가 이어진다. 처음엔 서먹,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대화. 그 잠깐 동안 서로에게 할 말을, 약국 앞 공사로 인해 시끄러운 소음들 탓에 방해받기도 하면서, 하다가 말다가 하다가 말다가, 그러다가 정인의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오는 것을 또 받다가, 받는 걸 보다가...
닫았던 약국 문을 열기 위해 서두르는 남자와, 굳이 그 밤에 굳이 꼭 다시 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약국에 갈 핑계를 만들어 대는 여자와, 그들 사이의 분위기와, 그 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 봄밤을 지켜보는 나의 여름밤...
"엄마, 저 마음 뭘까. 약국 쉬는 날인데 열었다고 거짓말 하고 달려가서 약국 문을 여는 저 마음, 저 마음은 어떤걸까."
나는 괜스레 센치해져 툭, 건넸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도 다 해봐서 알잖아."
어 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지 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와인 홀짝 홀짝...
드링크.
건배.
오늘 낮에는 혼자 밥을 먹으러 갔는데, 식사를 주문해두고는 아하, 넷플릭스에 봄밤 있던데, 그거 봐야지, 하고는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한 번 제대로 보자, 하고 3회를 골랐다. 1,2 회는 대략적으로 둘이 알게된 게 나올 것이고, 아마도 5.6회쯤이 약국 문 열러 달려간 것일테니, 그 사이, 그 사이를 보자.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보자.
아아, 이것은 또 슬프기도 한 것이,
정인은 정인의 애인이 못마땅하다. 말 하나하나가 다 거슬려.. 내가 듣기에도 거슬렸는데, 아마 사귀기 전에는 그런 것들을 무심히 넘겼던 것이겠지. 정인의 여동생이 외출한 걸 보게된 정인의 애인은, 그렇다면 집에 정인이 혼자 있겠구나 싶어 정인의 집 앞에서 '잠깐 집에 가서 차 한잔 할까' 하지만, 정인은 '늦었다' 며, '오늘은 동생도 있고... '라고 거짓말을 한다.
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왜 어떤 거짓말은 시작을 암시하고 어떤 거짓말을 끝을 암시하나요.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쓸쓸히 애인은 돌아서가고, 애인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채로, 우리의 정인은 네, 으라라라라라라라라, 지호에게 전화를 겁니다. 따르르르릉-
"여보세요."
"이정인이에요."
그렇다, 이것은 그들의 '첫' 통화였다.
첫..
첫 통화.
그래서 지호는 그런다.
"정인씨 전화목소리는 이렇구나"
그 때 정인은 그에게 말한다.
"내 목소리가 어떤데요?"
아아, 새벽 세시다, 새벽 세시야. 새벽 세시에 정확히 이 대사가 나왔다!!
2분 뒤
Aw:
에미,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내가 몹시 놀랐다는 소리예요. 당신 목소리와 말투를 전혀 다르게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당신, 정말로 늘 그렇게 말해요? 아니면 목소리를 일부러 꾸민 건가요?
45초 뒤
Re:
제 목소리가 어떤데요?
1분 뒤
Aw:
끝내주게 에로틱해요! 포르노방송 진행자처럼.
7분 뒤
Re:
그거 칭찬이죠? 한시름 놓았어요! 당신도 나쁘지 않은걸요. 당신은 글보다 말이 훨씬 대담해요.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게요. "내가
줄곧 이런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요. 뭐랄까, 무척 방탕하고 섹시한 느낌이 나요. 그런
목소리라면 비아그라 같은 정력제 광고에 써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p.304)
나는 이 순간 정인이 되어 지호의 말을 기다렸다. 지호는 과연 뭐라고 답할 것인가. 레오가 에미에게 그런것처럼 포르노 방송 진행자처럼 끝내주게 에로틱하다고 할것인가. 두구두구둥-
그러나 지호는 이렇게 말한다.
"들어줄만 해요."
하아-
이것이 그러니까 그렇다.
이런 대답도 좋은 것.
이것이 바로 시작이다.
이것이 봄밤이야.
아무 말이나 다 그냥 다 좋아.
이들 사이는 그러니까 막 친한 친구도 아니고, 친구 하기로 했지만 사실은 이성애감정 둘 사이에 물씬물씬하고 막 그래가지고, 만나면 또 서먹해져서 잠깐 어색어색 하다가 금세 웃으며 농담하고 반말과 존대말을 썪어 버리는 것이야... 봄밤이여.. 하아- 숨이 막힌다. 여름에 숨막히게 하기 있긔없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줄줄 운다 나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울어 울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화 목소리라는 게 그렇다.
얼굴을 맞대고 듣게 되는 목소리랑은 달라.
왜 다를까?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다르다.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전화 통화를 처음으로 하게 되면, '당신의 전화 목소리는 이렇구나' 라는 말을 사실 누구나 하게 되는데, 이것이 시작되는 관계에서 나오는 말이니만큼, 그 문장 안에 뭔가 다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꾹꾹 눌러담은 당신에 대한 나의 호감..이런 거. 크- 건배.
지호도 정인의 애인의 존재에 대해 아는만큼, 그들은 일반적인 친구들처럼 자주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서로가 늘상 궁금해. 지호는 정인의 친구이자 동료에게 정인의 안부를 묻고, 정인은 친구로부터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막, 또 뭐래, 뭐랬는데? 궁금하고 미치겠다.
잘 지내나요?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쉽게 전할 말을, 그거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어떤 사이에서는 차마 묻지 못하고 내내 삼키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몰래몰래 들여다봐야 한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에서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 헤어졌다 13년만에 만나게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일상이, 소식이 궁금하다. 그런데 상대에게 그걸 직접 묻지 못하고 빙돌아간다. 여자는 남자의 페이스북을 훑어보며 남자에 대한 소식을 업데이트 하고, 남자는 요즘 잘나가는 셰프가 된 여자의 기사를 검색해 찾아 읽으며 여자에 대해 파악한다.
물어, 직접 물으라고.
잘 지내는지, 잘 있는건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그냥 물으라고!
훔쳐보지 말고 물으면 되잖아.
숨어서 쳐다보지 말고 물으라고, 이 밥통아!
하이.
하우 아 유?
파인 땡큐 앤 유?
거짓부렁...
사실 나는 파인 하지 않다고 한다...
책이나 사러 가자.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