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과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건지, 도대체 그 우연을 작동시키는 힘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갑자기 떠오른 생뚱맞은 기억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동명의 영화를 봤는데, 갑자기 그 영화의 한장면이 생각난 거다. 존(채닝 테이텀)이 사만다(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 집에 갔는데 라자냐를 대접하며 "우리 엄마가 만든 라자냐는 정말 알아주지" 라는 말을 하는 장면. 그런데 이 기억이 맞는 기억인지 아예 잘못된 기억인지 모르겠는거다. 갑자기 이 장면이 왜 생각났는지도 모를뿐더러, 그렇다면 이 장면은 정말 있는 장면인지, 기억의 왜곡인지.. 영화본지 오래되어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데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지는 건 왜 때문일까. 사람은 아주 가끔은 쓸데없는 동력으로 움직인다. 나는 이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이 기회에 원작을 읽어보자' 하게된 것. 그렇게 2010년에 발행된 책을 사서는 읽은 것이다. 네, 엄마가 만든 라자냐가 세계 최고인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책은 몇 장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내 기억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책 속에서 존은 돌도 되기 전에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을 언급한다.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 엄마랑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돌도 되기 전에 떠나버린 엄마라니, 엄마의 라자냐를 맛보았을 리가 없지. 내 기억이 잘못되었구나. 어쩌면 영화는 책과 아주 다르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작가 '니콜라스 스파크스'는 남자 작가인데, 남자라는 걸 알 수밖에 없게끔 쓰여진 로.맨.스. 소설이다. 로맨스 소설도 남자가 쓰면 여지없이 남자가 썼구먼, 하고 알 수 밖에 없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이 책은 멋진 남자 하나 그려놓으려고 작정한 책이랄까. 이 남자 '존'은 미국을 구하는 군인이며 게다가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멋지게 뒤돌아서는 남자..다. 남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를 그대로 그려냈달까. 후훗. 존과 사바나의 로맨스 자체에 할 말이 많아서 할 예정이고 나름대로 몰입하고 또 공감되는 부분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남자가 그려내는 남자, 남자가 그려내는 여자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된 한국어 책 제목 위에는 '모든 걸 다 바쳐 날 지켜준 당신께... '라고 써있어. 네...




소설의 시작은 2006년. 존이 이미 사바나와 헤어진 지금, 군시절에 배운 위장술로 자신을 위장해 그녀가 행복한지 숨어서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말을 사랑하고 말과 함께 사는 사바나를 지켜보는 존.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에는 체구가 너무 가냘파 보이는 그녀. 하지만 늘 말과 편히 어울렸고, 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p.7)



사바나는 왜 가냘플까? 사바나는 왜 가냘퍼서 지켜주고 싶은 욕망이 들까? 사바나 덩치가 컸다면 어땠을까? 존과 사랑에 빠진 여자가 덩치 큰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존은 저 상황에서 말 사이에 있는 그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꼭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에는 체구가 너무 가냘파 보이는' 을 써야 했을까? 말들 사이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무슨무슨 사이에서 가냘파 보이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거, 지나치게 진부하지 않나?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맞장뜰만한 덩치의 그녀를 나는 사랑했다.'



이렇게 쓰면 어디가 덧나?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덩치로 녀석들을 제압하는 그녀와 나는 사랑에 빠졌었다.'


이건 어떤가?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를 보노라니, 그녀의 어깨로 툭 쳐서 말들을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좋잖아?



뭐, 그렇다는 거다.



"음료수도 괜찮아."

"정말? 냉장 박스에 맥주는 많아. 그리고 군인들 얘기 들어 봤거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괜찮대도. 넌 술을 안 마시는구나."

나는 캔을 따면서 말했다.

"응."

그녀의 말투에는 방어적인 기색도 우쭐대는 기색도 없이 오직 진실만이 배어 나왔다. 그게 좋았다. (p.55)



어린 시절 존은 방황을 했고, 그 방황을 끝내고자 군에 들어갔다. 휴가를 나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에 머물면서 해변에 나와 서핑보드를 타다가, 가방을 해안에 빠뜨린 사바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저걸 건질 수 없다고 대수롭잖게 넘기려던 그녀의 일행들과 달리 존은 풍덩- 헤엄쳐서 그 가방을 건져냈고, 이 일을 계기로 사바나와 존은 아는 사이에서 좀 더 알고 싶은 사이로,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된다. 단 2주만의 일이었다. 둘 모두에게 서로는 너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 전에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우연을 계기로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하는 사이가 된 것. 존은 사바나를 안 뒤로 늘 사바나를 만나고 싶고, 그러면서도 2주후에 다시 독일에 있는 군대로 돌아가게 되니 그녀와 더 깊은 사이가 되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한다해서 사람  마음이 어디 그대로 되던가. 마음은 언제나 제멋대로 흘러가는 법.


존은 진실로 말하는 사바나를 좋아한다. 저렇게 사바나와 함께 있는 동안 사바나와 대화하면서 그리고 지켜보면서 사바나의 '그게 좋았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자주 나오는데,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별 거 아닌데 그게 좋다고 말하는 거. 그간 살면서 진실된 사람을 본 적이 없었겠는가. 그리고 뭐 술 안마셔서 안마신다고 말한 걸 가지고 진실 어쩌고 운운하며 좋다고 하는 것도 너무 과장됐잖아.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뭐든 더 크게 보고 더 확장하고 더 과장하고 그러면서 '그게 좋아' 라고 하는 거. 사소한 거 하나에도 '그게 좋아' 라고 하는 거. 돌이켜보면 사랑은 늘 그런식으로 시작됐던 것 같다.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너의 그런 면이 정말 좋아, 나는 그전에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어...



아마 사랑의 끝은 그것들이 딱히 특별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쭉쭉 진행되는 것 같다. 당신의 잘먹는 모습이 좋았다가 드럽게 식탐있네로 끝나게 되는 거....네, 경험담입니다.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 저렇게 시작할 때는 '그게 좋았다' 이 말을 수시로 하게 된다. 그 사람 왜 좋아? 그 사람 어디가 좋아? 이러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들을 들어보면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게 없거든. 술 안마셔서 술 안마시는구나? 라는 대답에 '응' 했는데, 뭘 그게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바로 그 순간에 '그게 좋았다'가 되는 것이다. 킁킁.




그러나 존은 군에 있고 사바나는 대학생이다. 그들이 처음 알고 사귀게 되기까지는 존이 휴가온 2주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 년을 기다려 휴가가 되어야만 존과 사바나는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상대의 사랑을 믿었고, 그래서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서로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며 계속 사랑을 속삭인다. 그렇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데, 다시 만났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모르는 사이가 2주간 열정을 불살랐는데, 그러고는 일상을 함께 하지 못한 채로 일 년을 보내다가 다시 2주를 함께 하게 됐다. 그 사이에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또 빼곡한 스케쥴도 있어. 존은 그녀와 2주간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사바나는 친구들 모임에 자꾸 존을 데리고 다니고, 그게 불만이었던 존과 사바나는 싸우게 된다. 처음 2주간의 열정과 만나지 못한 1년을 사이에 둔 다음의 2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행기 좌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사바나의 말이 진실이기를 빌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염려한다는 건 알지만, 사랑과 염려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었다. 사랑과 염려는 우리의 관계를 이루는 벽돌이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는 모르타르 없이는 언제 허물어질지 몰랐다. 당장이라도 갈라질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모르는 면이 많았다. 작년에 나를 떠나보낸 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고, 그 생각을 하며 몇 시간을 고민해 보아도 이번에는 또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한 우리의 관계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팽이의 회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으면 팽이를 계속 돌릴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결과 아름다움과 마법과 천진한 경이로움이 펼쳐졌다. 그런데 헤어지면 팽이의 회전 속도는 속절없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기우뚱기우뚱 휘청거리게 된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p.242-243)




여전히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둘만의 시간. 우리의 관계가 배터리라면, 그 배터리는 내가 타향에서 보내는 동안 줄곧 방전되어 있었다. 우리 둘에게는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번은 아버지 옆에 앉아 심박수 측정 모니터의 뚜뚜 소리를 듣다가 문득, 사바나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지난 104주 중 4주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율이었다. 아무리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한다 해도, 언젠가는 허공을 바라보며 우리가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텨 왔을까 의아해할 것이다. (p.248)




존이 군대를 가기로 선택한 건 그의 결정이었고, 그건 사바나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사바나 역시 방학을 이용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가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는데, 그녀의 계획에도 역시 '멀리 떨어져서 자주 볼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기'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존이 사바나를 만나고 사바나가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그 당시, 그 순간의 그들이 처한 상황은, 상대를 의식하고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놓인 그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해야 했던 것들을 선택하며 따랐을 뿐. 그들의 삶을 그렇게 지속시켜오다가 갑자기 서로를 만나게 됐고, 그렇게 서로의 옆에 상대를 두려고 하니 오랜 시간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생각지 못한 장애를 만나게된 것이다.


그들은 편지와 전화 통화로 그것들을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바나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게 됐다.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 때 이미 그는 그 나라에 있고 살기를 결심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곳에 있고 그는 그곳에 있고, 게다가 그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비행기로 열시간 이상이라, 우리가 매일 알콩달콩 속삭이며 행복하게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그걸 해? 나라면 못해."


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먼 데 살며 앞으로도 서로 먼 데 살 여자를 사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을 그도 그의 친구로부터 들어야했다. 그는 어느 날 내게 '우리가 먼 데 살기 때문에 이 만남이 의미가 없는거야?' 속상해하며 묻기도 했더랬다.


나는 '나라면 못해, 그걸 어떻게 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때마다 '뭘 못해 닥치면 다 하는거지. 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다 하게 되어있어, 멀리 있으니까 헤어지자고 할거야?' 그러면 하나같이 다들 아니라고들 하면서 '그래도 그렇게 못해' 라고들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게 너무 싫었다.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 '나는 못해' 라고 말하는 게 도대체 이미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필요한 말이라고 그 말들을 그렇게나 해댔을까. 나는 이미 하고 있잖아, 그런데 거기다 대고 '나라면 못해' 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대체? 너도 못하니까 나도 못할거란 말이야?



그러나 존과 사바나처럼 우리도 헤어졌다. 당연히 존과 같은 이유도 사바나와 같은 이유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헤어졌고, 헤어진 후 반 년이 지나 다시 연락했을 때, 그는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기쁨에 대해 얘기했다. 그 당시 데이트중인 사람이 있었던 그는, 멀리 있는 너를 만나러 가는 것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사소한 일상에 항상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 때 나에게 '너와는 그게 되지 않잖아'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그 때도 지금도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정확히,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안다. 먼 거리, 롱 디스턴스가 사이에 있는 만남은, 일상의 로맨스라기 보다는 특별한 이벤트의 느낌이니까. 나는 그걸로 충족되는 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걸로 충족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의 공유. 함께 눈을 뜨고 손을 잡고 가까운 거리를 산책하고, 같이 아침을 준비하고, 서로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고, 옆집 아저씨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사소하게 얘기하고, 저녁 거리를 같이 고민하고, 오늘 퇴근후엔 어땠어를 표정만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들이 일상의 작은 힘이 되어 오늘을 내일로 연결시켜줄 것이고. 가까운 거리에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 언제 어디서 만나자, 라고 반드시 정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예정에도 없이 '저녁 같이 먹을까?' 가 가능할 것이고, '오늘 치킨 사들고 우리집 가서 먹자'가 가능할 것이다. 서로의 집 욕실에 칫솔을 꽂아둘 수 있을 것이고, 귀찮은데 오늘 자고 갈까, 가 가능할 것이다. 다음날 직장에서 이메일을 보내 '당신 집에 핸드폰 두고온 것 같아, 이따 찾으러 갈게'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이웃을 당신이 알게될 것이고 당신 직장 동료와 내가 인사하게 되기도 하겠지. 우리에겐 어떤 기나긴 설명 보다도 이제 아 그사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까운 곳에 사는 연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바나에게는 그렇게 '다른 사람' 이 있었다. 존이 멀리 있는 동안에 항상 사바나의 일상을 같이 할 사람. 같이 공부하고 같이 일하고 서로의 고민에 대해(심지어 존에 대한 고민까지도!) 말할 수 있는 친구. 상대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라, 상대에게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사바나는 그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주고, 그렇게 그 일상들 속으로 사랑이 틈틈이 스며들었다. 스며들었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바나에게 새로운 연인이, 새로운 연인에게 사바나가 해준 일은, 멀리 있는 존과 사바나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일상을 유지하는 데는, 사바나와 새로운 연인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더' 필요했을 테고.




나는 헤어진지 반년이 지나 연락된 나의 옛연인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가 선택한 건 그 일상의 공유가 가능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일상의 공유라면, 나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가 대화하고 함께 웃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한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찾은 거였겠지. 무엇보다 그녀에겐 내가 가지지 못한 게 있었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 그와의 가까운 거리. 그녀는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와는 몇 월 며칠을 따져가며 만나야 했지만, 그녀와는 언제든 전화나 문자로 만나는 게 가능했다. 낮에 만나 운동하는 게, 같이 마트를 가는 게, 저녁을 먹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이웃을 소개받기도 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상에 스며드는 사람을, 그는 찾았던 것이었겠지. 그가 나와 헤어진 후 찾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와 헤어진 후 찾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 지금 그 근처 가는데 잠깐 볼까? 가 가능한 사람. 그렇게 편한 옷을 입고 나갔다가 혹은 다른 목적으로 다른 곳을 향해 가다가도 불쑥 만날 수 있는 사람. 오늘은 우리 집앞에서 만나고 다음 날엔 너네 집앞에서 만나고가 가능한 사람.



이렇게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았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래서 해피엔딩이 됐을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가까운 거리에 살아 언제든 아무때고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결국은 연애를 좋은 곳으로 향하게 했을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까운 거리가 과연, '일상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을까?



아니었다.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일상의 공유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자주 만나고 집앞에서 만나고 마트를 같이 가고 하는 일들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었다. 일상의 공유란 그런 게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에 사는 걸로 일상의 공유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그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서 나랑 대화하는 걸 더 좋아했을까? 가까운 거리에 사는 걸로 일상의 공유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나는 데이트 중이면서도 '어서 집에 돌아가 그와 통화하고 싶다'를 생각했을까? 왜 우리는 더 많은 얘기를, 더 속깊은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잘 하지 못하는 얘기를, '지금 가까운 옆에 있는 사람' 이 아니라, 이토록이나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했을까? 왜 우리는 위로를, 격려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먼 데 있는 서로로부터 받았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바나와 헤어지고 2년이 지난 후, 존은 사바나를 찾아갔다. 사바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다. 2년간 사바나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존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사바나에게는 2년 전에, 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여전히 존은 사바나를 사랑했고, 그래서 사바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찾아왔다. 사바나 역시 존을 사랑했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현실의 힘든 얘기부터 마음속 고민까지 존에게 얘기한다. 2년간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웃고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현실을 망각할 정도로. 지금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부러 기억해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웃는 것까지. 이 모든 대화와 사랑은 여전히 존을 향한 것이었지만, 존이 돌아가고 나면 사바나는 매일 말에게 먹이를 주는 일상을 다른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게 사바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존 역시, 그런 사바나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하고. 그게 옳은 길일 테니까.




그렇다면

그 시절 우리가 바라본 건, 결국 허공이었나.



오늘 퇴근후엔 치즈와 와인해야지.
















처음 사바나 린 커티스를 만났을 때-그녀는 내게 늘 사바나 린 커티스다-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은, 군인이 일생의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만났고, 그 때문에 지금의 내 인생은 이토록 생경해졌다. 우리가 함께했을 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헤어진 지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그 마음은 되레 깊어졌다.- P9

˝난 그렇게……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좋아.˝
˝삶이 아니라 주화에 대한 열정이야.˝
나는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그게 그거지. 열정은 열정이니까. 열정은 지루한 공간들 사이의 흥분이라, 어디로 향하느냐는 중요치 않아.˝
그녀는 발을 모래 속에 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무튼 시간의 대부분을 쏟는 대상이라고. 난 지금 나쁜 습관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너와 카페인처럼.˝
그녀는 앞니 사이에 살짝 벌어진 틈을 드러내며 웃었다.- P83

˝맞아. 그 대상은 주화든 스포츠든 정치든 말이든 음악이든 신념이든, 뭐든 될 수 있어. 내가 만나 본 살마 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어떤 것에도 깊이 빠지지 못하는 사람이야. 열정과 만족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고, 그것들이 없으면 어떤 행복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행복을 지속시킬 연료가 없는 거니까. 너희 아버지가 주화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싶어. 그때가 어떤 사람이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때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은 보통 전염되거든.˝- P83

˝몇 년 전에 어떤 여자애랑 사귀었는데, 당시에는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말 그랬던 걸까 회의가 들어. 걜 좋아했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는데, 떨어져 있으면 별로 생각이 안 나는 거야.사귀긴 했지만 연인은 아니었던 거지. 그게 말이 된다면 말이야. 그리고 헤어진 뒤에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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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말 기록
    from 마지막 키스 2019-05-27 09:02 
    라자냐 장면 확인하고 싶어 읽었던 책에서는, 이미 결론을 알고 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만나 동시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더랬다. 그 비극속에서 빠져나오기가 몹시도 힘들었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하면서 허우적허우적. 내친 김에 영화도 다시 보자 싶었다. 라자냐 장면도 확인할 겸.'존'의 아버지는 일요일마다 라자냐를 만들었다. 왜 이 장면에 내게 와서는 '우리 어머니 라자냐는 알아주지' 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영화랑 헷갈린건가..존과 사바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