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지나치게 큰 사랑이 압박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핑계를 대고 우리는 상대에게 압박을 가할 수도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삶에 당연하듯 개입하려고 하기도 하고. 내가 가는 방향이 옳고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으로 내가 사랑하는 상대 역시 이 길로 가고 바로 이것을 선택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이 가져온 오만일 것이다. 그 사랑은 상대를 향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향한 사랑일 것이고.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영화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언니는 여동생에게 학교의 킹카인 그 남자아이와 사귀지 말라고 조언한다. 본인이 사귀어봤는데 진짜 영 아닌 남자였다고. 그러나 동생은 언니에게 대꾸한다. '언니도 해보고 알았잖아, 나도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나는 그동안 동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바로 저 언니 같은 태도로 대했던 것은 아닌지, 그 영화를 보고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그 뒤로 그런 태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어쩌면 또 그런 태도들이 나왔을런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건 잘못됐어 틀렸어, 이게 더 좋아. 나는 그런 식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했을까봐 두렵다.


나이들수록 그것이 정말로 지양해야 할 태도라는 것을 더 깨닫게 된다. 언제 더 절실하게 깨닫느냐면, 누가 내게 바라지도 않은 조언을 했을 때. 내가 상대에게 조언을 해달라고한 게 아닌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것이 낫다 저렇게 살아라 말하는 것은, 듣는 이에게는 강압이고 폭력이다. 그런 일들이 닥칠때마다, '아, 역시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려하지말자, 조언은 누군가 요청했을 때만 조언이 될 수 있다' 라고 깨닫고 또 깨닫는다. 내 행복은 당신의 행복과 다르다.




'로라'는 자신의 동생인 '셜리'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로라의 생각은 그저 셜리의 행복, 셜리의 행복. 로라의 좋은 친구인 여성혐오자 '존'은 그런 로라에게 '네 생각을 하라'고 매번 조언하지만, 로라는 셜리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셜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내가 너무 셜리에게 집착하나'를 생각한다. 셜리가 데려온 남자가 셜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이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로라가 셜리와 셜리의 애인 헨리에게 1년간의 약혼기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자 셜리와 헨리 모두 투덜대고 언니가 동생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것이라 한다. 내가 정말 그런걸까, 내가 집착하는 걸까, 내가 동생을 빼앗기기 싫어서 그러는걸까, 내가 동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까...


로라가 정말 동생에게 집착하는 것일 수도, 동생을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다 가능성 있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건, 내 눈에도 헨리는 '아니올시다'의 님자였다. 만약 이 남자를 내 여동생이 데려왔다면... 그러면 나는 어쩔것인가. 아아, 헨리, 내가 너무 싫어하는 캐릭터..



"제대하면 무슨 일을 할 거예요?"

"사실 모르겠어. 변호사가 될까 생각해봤지만."

"그런데요?"

"너무 힘든 일이야. 사업을 해볼까 싶기도 하고."

"어떤 사업이요?"

"글쎄, 어떤 사업이든 시작을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난 은행에 다니는 지인이 한두 명 있고 실업계 거물도 몇 알아. 내가 밑바닥부터 시작한다고 하면 그들이 기꺼이 도와줄거야." 그는 말을 이었다.  (p.111-112)


.

.

.

.

.

.

.

.


.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진짜 너무 싫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변호사 될까? 아이 그건 힘드니까 안돼, 사업할까? 사람들이 도와줘야지........ 너무 한심하잖아.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가 청혼을 하는데 어떻게 예스를 하나요, 셜리여......... 내가 봐도 너무 쎄한데........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너무 여자 돈 잡아먹을 남자잖아...... 여자 고생시키고 여자 돈 다 긁어갈 남자잖아.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혼자 살자, 셜리여..... 너무 딥빡 오는 것이다. 이런 남자라는 것에 대해.



셜리와 헨리는 결혼하게 되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자꾸 직장을 때려치고 나와서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여기저기 빚을 지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바람을 피고. 게다가 성매수를 하고 성매매 여성을 창녀라고 욕하는 남자들처럼, 헨리는 자신이 바람핀 여자를 '암캐'라고 칭한다. 사업할 때 도와줄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헨리는 무조건 남탓이 먼저인 사람.



"이 주 정도 수전에게 푹 빠졌지. 잠도 안 올 만큼. 얼마 동안은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얼마 안 가 아주 확실하게 지겨워졌어. 최근에는 완전히 골칫거리가 됐고."

"너무하네요."

"당신이 수전 걱정을 왜 해? 그 여자는 도덕관념도 없는 순 암캐야." (p.144)






게다가 예상한대로 헨리는 처형에게 돈을 빌려 다른 빚을 막고........그리고 불구의 몸이 되어 셜리에게 매달리며 온갖 짜증을 낸다.... 모든 걸 다 잃고 로라의 집에 들어와 살게된 셜리 부부. 하루종일 짜증을 내는 신랑의 옆에 있어주는 셜리를 보며 로라는 너무 슬프다. 셜리는 더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저 불행한 생활로부터 빠져나와야 하는데. 마침 그런 셜리에게 돈 많고 자상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아, 셜리는 저런 남자와 결혼했어야 하는데. 로라는 그런 셜리 보기가 너무 안타깝다. 셜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셜리를 저 불행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야 해.




문제는 그거다.

셜리는 그 삶이 언니가 생각한만큼 불행했을까? 셜리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을까? 셜리는 로라가 생각한 것처럼 책임감 때문에 계속 그러고 살았던걸까? 셜리가 원하는 건 뭐였을까?

로라는 셜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셜리가 불행할 것이라는 본인의 생각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결정이 셜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소설의 마지막에야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통해 로라는 알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셜리가 셜리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생각한 셜리의 행복이 셜리가 생각한 셜리의 행복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로라는 셜리의 삶을 행복해지도록 본인이 결정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그 일은 로라를 아프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지만, 어쨌든 이제 로라는 자신의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한다.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노르웨이의 산악철도에 대해 보게됐다. 홍콩에 여행가 맛있는 걸 먹는 장도연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내 조카를 떠올렸다. 저기 타미랑 가면 어떨까, 그런데 저건 맵겠지? 저기 아이들 먹을 만한 메뉴도 있을까? 그랬던 것처럼 노르웨이의 절경, 피오르드를 보면서도 감탄하며 또 타미를 떠올렸다. 저렇게 웅장한 자연이라니, 한 번쯤 보고 싶지만 으앗, 너무 무섭다. 만약 타미가 저기 간다고 하면 나는 가지 말라고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한것이다.




(출처: 투어2000 블로그)



너무 무섭잖아, 저기 타미를 보내기엔 위험해, 라는 생각을 저절로 한 것이다. 이 생각은 한참이나 내게 '그래도 되는가?'를 묻게 했다. 나는 나라는 한 인간으로 '저 곳에 가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고, 또 내가 절실히 가고자 했다면 가려고 할것이다. 만약 누군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면, 나는 정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내 의지대로 할것이다. 그런데 내가 타미에게 '위험하니 가지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미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타미가 혼자 간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성인이 되고 저런 곳을 알게 되고, 나 저기 갈거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혼자이든 친구들과 함께이든, 그것이 그 아이의 선택이라면, 그것이 그 아이의 바람이라면, 그 아이가 독립적인 한 존재인만큼, 내가 가지말라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라고 하는건, 상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불안함을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상대가 그런 상황에서 취약할 거라고 내 멋대로 약한 존재로 결정지어 버린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로라랑 다를게 뭐지? 나는 타미를 셜리 취급하고 있는 거잖아?




홍콩 디즈니에 갔을 때 그런 경험을 했었다. 아홉살 조카와 롤러 코스터를 탔는데, 타는 내내 나는 한 팔로 아이의 안전바를 잡고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혹여라도 아이가 떨어질까봐 안절부절. 멈추고 나서야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롤러 코스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이가 무사히 내려서 다행한 마음에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이런 나를 모르는채로 조카는 '한 번 더 타자!' 하는거다. 어찌나 야속하던지. 진짜 너무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이것이 위험하고, 무섭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건 내 생각, 내 감정이었다. 아이는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좋아해서 바이킹도 네 번씩타고 그러는 아이인데, 나는 아이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아이가 다시는 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이는 더 타기를 원한다. 이게 아이에게는 신나는 일이야.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고, 그런 나를 여동생과 조카가 달래고, 울고나니 기운이 쫙 빠져 있었다. 퍼레이드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조카는 놀이기구를 한 번 더 타고 싶다고 말했다. 조카가 한 번 더 타자고 한 건 그런 스피드 있는 게 아니어서, 언제 또 올지 모르고 이 아이를 위해 온것이니만큼, 그래 한 번 더 타자, 했다. 아아..그러나 지나는 길에 더 무서운 롤러코스터가 보였고,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조카는 방방 뛰며 타겠다고 했다. 이모는 무서워하니 타지마, 나 혼자 탈게, 라고 조카는 말했는데 도저히 혼자 태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가 기꺼이 같이 타겠다고는 못하겠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여동생이 자신이 타겠다고 말하는데, '아니야, 내가 탈게' 라고 나는 도저히 말을 못하겠는 거다. 그렇게 여동생과 조카가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고 나는 제부에게 전화를 해서 이 일에 대해 말했다. 내가 엉엉 운 것 까지도. 그러자 제부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내게 말했다.



"타미는 놀이기구 타는 거 되게 좋아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맞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는 좋아한다. 아이는 좋아하는데, 아이는 신나서 즐기고 있는데 나는 아이가 타는 걸 두려워했어. 내가 두렵다고 아이에게 타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거잖아. 마찬가지로 아이가 노르웨이에 피오르드 보러 가겠다고 하면, 나는 두렵지만, 내가 두렵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가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거 아닐까. 내 두려움과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 다르고 내 바람과 다른 사람의 바람이 다르다. 우리는 그걸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는게 아닐까.




이 책의 원제는 '짐The Burden' 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된 제목처럼, 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작년에는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사랑을 공부하고 싶었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으려면 더 사랑을 알아야 하고, 더 배워야 해, 생각했던 것. 그러나 애인에 대한 사랑이 아닌, 가족과 조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사랑을 배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조카보다 네 배를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 사랑에 대해 배울 게 더 많은 것 같다. 여전히 잘 모르고 여전히 부족한 어른인 것 같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을 배워야지, 계속해서 사랑을 배워야지.




엊그제 만난 친구와 소설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서로 좋아하며 얘기했었다. 소설이 이렇게나 좋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들이 그 안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또 생각하게 한다.



배워야지.

사랑을 배울것이다.




"지나친 연민이에요."
"그럴 수도 있나요?"
"네, 그건 현실을 똒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죠."
루엘린이 덧붙였다. "연민은 모욕입니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요?"
"바리새인의 기도가 이를 그대로 암시하고 있죠. ‘주여, 제가 그 사람과 다르다는 데 감사합니다." - P27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9-03-2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와르와 마플이 없는 크리스티 소설이라니 색다른 느낌이 드네요.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작가라기 보다는 역사소설가로 불리우기를 평생 바란것처럼 크리스티 여사도 포와르와 미스 마플에서 벗어나고파서 이름도 바꿔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쓴것이 아닌가 싶은데 작가의 바램과 달리 독자들에게 크게 반향을 얻진 못한것 같습니다^^

다락방 2019-03-21 10:54   좋아요 0 | URL
반향을 일으켰는지 안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읽기에는 이 시리즈가 다 좋습니다.

얼룩말 2019-03-2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 좋아해요.

다락방 2019-03-21 11:50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시리즈를 네 권 밖에 못읽었는데 며칠전에 갑자기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