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톤 프로젝트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내 서재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에피톤 프로젝트의 시디를 사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반을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사준다면 그 의미가 뜻깊을 것 같아서였다. 참, 다른 말이지만, 나는 이렇게나 소박하네..사달라는 게 고작 시디 한 장이라니..
에피톤 프로젝트는 나에게 특별한 가수, 예술가였다. 나는 <이화동>이 너무 좋아서 이화동에 친구와 찾아가 보기도 했다. 갔는데 별 거 없어서, '역시 추억은 각자의 것이야' 하고 생각하며 돌아섰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멀리 간다며 보기를 청해왔을 때, 헤어진 다음날에도 나는 버스 안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다 큰 여자는 울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여전히 이화동을 아프게 듣는다.
<눈을 뜨면>은 어떻고! 크- 나는 이 노래를 에피톤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데, 신해철 사망 당시에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저기 건널목 앞에서 '조심히 건너'라고 말하는 노랫속 상대를 따라서 혼자 '조심히 건너'라고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숱하게 말해보기도 했다. (약간 또라이같나??)
<회전목마>는 그 해의 페이버릿 이었다. 이 노래가 주는 상징이 내게 너무나 간절해, 분명,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거라고 나는 내게 속삭였었고,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 이 노래의 가삿말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축복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기도 했었어.
그렇게 나는 그의 신곡이 발표될 때마다 항상 새 노래들을 들어봤고, 그가 콘서트를 한다고 하면 얼른 예매하기에 바빴다. 그의 콘서트에 처음 가게 됐던 오래전에, 그의 노래가 시작하길 기다리면서, 그리고 그의 노래 전주가 들리는 동안, 옆자리에 남자친구가 앉아 있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 나는 남자친구보다 이 콘서트가 더 좋다.'
정말 그랬다.
정말 그랬어.
그런 나지만, 에피톤의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노래를, 가사를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어라, 이건 좀...하는 생각이 들었달까. 그래도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른 것들이 그 안에 있어 나는 밑줄 그어가며 읽을지도 모른다, 내가 에피톤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하고 책을 펼쳤는데, 아아, 그간 숱하게 읽어온 독서력으로 나는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음을 그 안에서 찾아냈다. 읽으면서 자꾸만 뚝, 뚝, 팬심이 떨어지는 걸 느꼈어. 책장을 덮었을 때는 이미 팬심이 저기 밑에 내려가 있었다.
첫장부터 '이런 글은 왜 써서 책으로 낸걸까?' 란 생각을 했는데, 얼마 넘기지 않아 혼자 평냉에 소주를 시켜먹는 걸 보고는 몹시 좋았더랬다. 거봐, 이렇잖아, 이렇게 좋은 부분이 나오잖아. 세상에, 혼자 들어가 평냉에 제육반접시 그리고 소주라니. 크- 완전 내 타입이다, 나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크- 그것은 지상낙원. 아아, 에피톤, 선주후면을 아는 몸이었군요! 나는 그렇게 동지 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또 흐음, 흐음... 하는 부분들만 연달아 나와... 음.... 그러다가 확 내 마음이 돌아선 건 이병률 나올 때였던 것 같다. 이병률의 팬을 자처하며 그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뭐랄까, 음, 내 타입 아니구나 이 사람...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여행갔던 얘기며 음악을 하던 것에 대한 고민들을 펼쳐나가다가 예전 사랑 혹은 예전 애인에 대한 추억을 끼워 넣었는데, 이 얘길 하기 위해 부러 책을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 그 에피소드들이 혹은 그 추억의 글들이 좋질 않았다. 추억은 저마다의 것이니, 자신의 추억을 자신이 기록하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점점 더 그로부터 멀어지는 걸 느꼈어. 평냉과 제육과 소주에서 겹치던 음식 취향도 뒤로 갈수록 그것 말고는 나랑 같은 것도 없고, 여행 가서 뭔가 제대로 잘 먹지 않는 것도 내 타입 아니고... 아무튼 그냥 나는 이병률 감성을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이라.....그런데 이 책을 읽노라니 에피톤은 이병률과 잘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자 나는 내 타입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어버리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크-
굿바이.
일전에 에피톤 앨범에 대한 리뷰에 '당신은 그저 (남자나 애인이 아닌) 예술가로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내가 쓴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냥 가수로만 만나는 게 좋겠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피톤에 대해서라면 앨범만 들어야겠다. 이 책과 동명의 앨범은 뭐 딱히 좋지도 않았지만...음......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