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주: 이 책에서 '젠더화된', '인종화된'이라는 표현은 gendered, racialized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옮긴이는 '-화된'이라는 표현의 어색함 때문에 이를 '젠더', '인종적으로' 표현해도 무방한지 저자에게 문의했다. 저자는 설혹 번역문이 부자연스럽더라도 -ed 의 수동적인 뉘앙스를 살려주길 바란다고 했다. 저자가 굳이 -ed를 통해 수동적 의미를 표현한 것은 인종주의와 젠더 차별의 문제가 지닌 구조적 속성을 환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옮긴이는 저자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젠더 각본(gendered script)'은 '각본'이라는 단어에 이미 (각본을 받아들이는 이의)수동적인 자세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젠더 각본'으로 옮겼다. racialized는 별다른 예외 없이 '인종화된'으로 옮겼으며 드물게 '비백인', '유색인종'이라는 말이 한두 군데 등장한다. (p.9)




아주 오래전일이긴 한데, 에쿠니 가오리 소설이라면 닥치는대로 다 읽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신간이 나오든 말든 관심이 없지만, 그 때는 그랬다. 한 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을 보는데, 옮긴이가 역자 후기에 그렇게 써놓은 거다. '다 번역한 후에야 내가 남자주인공의 이름을 잘못 번역했다는 것을 알았다, 수정을 해야할까 고민했지만 내내 이 이름으로 알았으니 그냥 가겠다' 하는 요지였다. 그말인즉슨, 나는 처음부터 남자주인공의 이름을 작가가 정한 이름이 아닌 걸로 읽었다는 거였다. 그 소설이 뭐인지도 정확히 기억이 안나고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 안나지만 그 때 내가 당황하고 불쾌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다 번역하고 보니 내가 철수를 영호라고 번역했어, 그런데 내가 한 권 내내 영호로 읽어왔으니 그냥 두도록 할게' 라니.. 작가가 왜 그 이름으로 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이름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름은 꽤 큰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내가 '번역된 것'으로 읽었기 때문에 '원서'에 쓰여진 것과는 다른 이름으로 읽었다는 게 된다. 이름은 책의 내용이나 흐름을 따라가는데 별 영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가 원서를 읽었다면 아마 다른 이름으로 읽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이 불쾌했다. '원서로 읽지 않은 네가 감당해, 사실 별 거 아니잖아' 라는 뜻으로 읽혀서. 어쩌면 원서로 읽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일은 당시에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도 독자들이 얘기했던 것 같은데, 후에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런참에 이 책, 《공간침입자》의 저 인용된 문장을 보니 좋은 거다. '이거 혹시 이렇게 번역해도 될까?'를 물었더니, '아니, 어색해도 가급적 원래대로 번역해줘' 라는 대화가 오고가는 것.


그렇다해도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술적인 단어들 때문인걸까, 내가 인문서적을 지금보다 더 많이 읽었다면 이 책을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 그나마 그동안 여성학 서적들을 줄기차게 읽어왔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이해한걸까, 자꾸 내 상태를 되짚어봐야 했다.



나의 전애인중 한 명은 내가 책 읽는 것을 알고, 자주 내게 물었다. 지금은 뭘 읽느냐고. 내가 제목을 말해주면 그는 내게 어김없이 "그 책은 어떤 내용인데?" 묻곤 했다. 나는 책을 안읽는 애인에게 내가 읽고있는 책의 줄거리를 들려주거나, 어떤 특정한 부분들을 얘기해주었다. 다 읽고난 후의 나의 감상을 얘기해준 적도 역시 있었고. 이건 작가가 지나치게 많이 나간 것 같아, 이것까지는 너무 욕심이 과했어, 라든가, 이 책의 여자주인공 완전 나 같아, 나도 이러잖아, 라든가.


그러나 가끔은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라는 책들도 있었다. 읽는 내가 어떤 뉘앙스인지 알고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그 '어렴풋이' 때문에 상대에게 들려줄 수가 없는 거다. 내가 '아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내용을 들려줄 수가 없는거다. 만약 내가 정확히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상대에게 거침없이 들려줄 수 있었을거다. 그에 따른 감상도 마찬가지로 덧붙여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고.



나는 지금도 혼자 종종 '자, 그가 물어본다면 줄거리를 어떻게 얘기하지?'를 상상하곤 한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줄거리를 요약하고 어떤 특정한 장면에 대해 그에게 들려주는 상상을 한다. 아마 이 부분에서는 그도 이렇게 말하겠지, 같은 걸 혼자 조용히 생각해보곤 하는데, 이 책, 《공간침입자》에 대해서는 내가 들려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스스로에게 '자, 줄거리를 물어보면 뭐라고 할거야?' 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가 없는거다. 이 책이 의미하는 바가, 이 책의 내용이 어떤건지 '알긴 알겠는데', 그러나 내가 '확실히' 혹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책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그것의 내용에 대해 상대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했다. 읽으면서 이게 너무 답답한거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던 어제 퇴근 길,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정말이지 계속해서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가까스로 이 정도의 내용을 추릴 수 있었다.



여성이나 비백인의 경우 어떤 조직(정치를 비롯한 일반 기업들까지도)에 들어갔을 때, 그 개인으로 통과되기 보다는 여성 전체를, 비백인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띠게 된다. 뭐 하나 잘못하면 '역시 여자들은' 혹은 '역시 아시아인은(흑인은)' 하는 말을 듣게 될까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들보다 더 '가볍다고 여겨지는'일을 맡게 되고, 그들이 그 공간에 있을 때 소수임에도 기존 사람들에게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수는 과장되어지고, 그 소수로 인해서 그 조직은 '우리는 차별 없는 곳이야'를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아, 여기까지도 얼마나 많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건지 모른다.


다행스러운 건, 이 책의 말미, <나가며>에 작가가 이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주었다는 거다. 양미간을 찌푸리며 읽어도 내게 오다 튕겨나가는 내용들이 그 정리 부분에서 다시 찾아오는 걸 느꼈다. 오, 작가님, 정리 고마워요. 그러니 아마 한 번 더 읽으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상대에게 '이 책이 어떤 내용이냐면~ '하고 들려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내가 그간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온 것이 또 그 나름의 근육을 키워줬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내용들은, 사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성학 책에서 말한 것들 역시 다 이런 내용이었으니까.



최근에 코어의 힘을 키워야겠다고 코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 독서근육도 지금보다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됐다. 내가 독서근육이 더 단단해지면 지금보다 더 풍부하고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되겠지.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나쁘지 않은 독서였다.








(페이퍼 제목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젠더 범주에 따른 공간/시간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살인가 10살 무렵의 일인데 지금도 가끔 떠오른 꽤 선명한 장면이 있다. 당시 맨체스터 외곽에 살던 내게 ‘시내로 나가는 일‘은 비교적 큰일이었다. 이층버스에 올라타 반시간 정도를 가야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에 머지강의 넓고 얕은 계곡을 건넜고, 내 기억으로 차갑고 안개 낀 먼 곳에까지 축축한 진흙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맨체스터 지역 전체 모든 곳이 축구경기장과 럭비경기장으로 나눠져 있었고, 시내로 나가는 토요일마다 그 방대한 공간이 공을 쫓는 수많은 아이로 가득 찬 광경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많은 수였다(버스 꼭대기에 앉아 있으며서 마치 로리(Laurence Lowry;1887-~1996)의 거대하고 활기찬 그림을 보는 듯했는데, 로리가 그린 것보다는 좀 더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 빨간 스타킹을 신은 그들의 다리가 보였다).

(계속)

이 모든 것을 매우 정확히 기억한다. 혼란스럽고 약간 사려 깊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분명하게 각인된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넓은 머지강 평야 전체가 완전히 남자아이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그 경기장들에 가지 않았다. 그곳은 또 다른 금지된 세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내가 공간 침입자라는 생각과 약간의 긴장감을 품은 채 이 축구경기장 계단석에 서 있다. 나는 이것을 무척 좋아한다(Massey196: 185). (p.21-22)

린다 맥도웰(Linda McDowell)은 19세기 영국에 출현한 도시 생활에 주목했다.

여성들이 거리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해석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치 않은 성적 관심에 자주 노출되었다. 이를테면 후기 빅토리아 시대 케임브리지에서 초창기 여학생들은 공적 영역에 나갈 때면 도시의 많은 ‘방종한‘ 여성과 자신들을 구별짓기 위해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였다(1996: 154)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번번이 경계선을 넘어섰고,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새롭게 정의해낸 영역과 장소들에 진입했다(Wilson 1992) (p.50-51)

여성은 국가와 조금 다른 관계를 맺고 이는 시민적인 것과 가족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자연과 이성의 분리와 연관된다. 여성은 가족과 자연의 상(像)으로서 시민 영역의 자리에 놓인다. 신체혐오증이-일반적으로 암묵적인 남성 개인의-정치를 지배하는 한편 국가의 신체성은 여성 이미지를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일가권속을 돌보는 이나 방관자로 내세운다. 국가의 강한 어머니, 국가의 용감한 보호자이자 돌보는 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모성, 땅, 정의와 연계된 제한된 범위의 여성성 안에서만 인정받는다. (p.54)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역사학자인]마리나 워너(Marina Warner)가 『기념비와 소녀(Monuments and Maidens)』(1996)에서 지적하듯이 여성이 국가의 미·덕·자유의 상징으로 등장하면서 생기는 역설은 그들이 정의를 재현하면서도-[중앙형사재판소로 꼭대기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는] 올드 베일리(Old Bailey)와 자유의 여신상처럼-그것을 실제로 집행하는 능력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여성이 은유적 기능으로 활용되는 반면 국가와 환유적으로 연결된 이는 남성이다. 여성이 지도자 역할을 맡을 때 실제 차지하는 지위와 여성의 상징적 이미지 간에는 커다란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컨대 파리 전역에는 전투 중이거나 용감하고 위용 넘치는 자세를 가징 웅장한 여성상들이 많지만(Warner 1996 참조) 법조계, 행정계, 군대에서 엘리트 지위에 있는 여성의 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뒤쳐진다. (p.54)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영토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여성의 형태로 시각화된다(Parker et al.1992: Nash 1994; Yuval-Davis 1997). 남성에게는 무장 전투로 국가를 방어할 권리가 자동적으로 부여되고 여성은 그들이 싸워서 지켜야 하는 대상이다. 국가 간 경계는 여성 신체이지만 전투에서 그 경계를 지키는 이는 규범적으로 남성이다. 영토는 너무나 자주 성적 용어로 방어되며 여성 강간은 국가의 영토와 특성에 대한 절대적인 공격이 된다(Mookher-jee 2003)
(p.54-55)

국가 상징으로서의 여성 신체 활용은 제국과 식민지 간의 구별로 변형되었다. 제국의 형제애는 자연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국가적 범주와 연결되어 개념화되었다. 제국의 여성을 자연 상태에 있는 ‘타자‘ 여성과 차별화하는 문화/자연, 고상함/이국적임이라는 이분법은 패권적 여성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p.55)

곰리는 <더 필드>의 인물상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신체적/개인적 공간이 침입받는다는 느낌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제도적 장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그 길목에 있는 ‘흑인‘은 수천 개에 달하는 <더 필드> 인물상처럼 그렇게 많지 않다. 곰리의 인물상들과 달리 흑인은 한 무리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흑인‘의 숫자가 통계적으로 여전히 적은데도 그들은 정상적인 제도의 풍광을 교란하는 이들로 인식된다. 게다가 그 숫자가 과장되어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이가 위협적으로 공간을 차지해나가는 듯이 보인다. 두세 명에 불과한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네 명이나 일곱 명으로 재빨리 과장되는 것과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단 한사람만으로도 그가 실제로 차지한 것보다 더 많은 물리적 공간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88-89)

보편적 인간의 표준 담지자가 아닌 여성과 비백인은 규범으로서는 비가시적이지만 규범에서 벗어난 이탈자로서는 매우 가시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권위를 지닌 규범 인물이 아닌 장소들에서 변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능력을 의심받는다. 인간의 특성은 역사적으로 젠더/인종 규정 속에서 구성되어왔기에 그들은 자유로운 자질을 가졌다고 상상되지 않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구체적인 신체 내에서만 상상된다. 그들은 직업에 충분히 부합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상당한 의심을 받고, 전문직 종사자가 되는 데 수반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견뎠음에도 여전히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부적합하며 일을 잘 못할 거라는 괜한 의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일을 잘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들은 의심의 부담을 느끼고 그 정도는 제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제도에 이런저런 형태로 존재한다. (p.107-108)

인종적 소수자는 그들에게 주어진 낮은 기대치에 맞서 스스로를 입증해야 한다. 그들은 고도로 비가시적인 곳에서 충분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신이 유능하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비가시성과 맞서야 한다. (p.108)

파농은 흑인 전문직 종사자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생생하게 회고했다. 칭찬과 권위의 추락 사이에는 매우 얇은 선이 있다. 실수를 저지를 만한 여지는 지극히 적다. 일을 하면서 생기는 아주 작은 실수일지라도 지적되어 그 사람이 직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증거로 과장된다. 이는 다시 점점 더 심해지는 관찰과 감시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다. 현미경 같은 감시는 부정확성의 여유를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감시의 시선이 필사적으로 파고든 것을 찾아낸다. 당사자는 감시 아래서 지나친 압박을 받아 자신의 실제 능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며 불안과 초조의 증거인 실수를 더 자주 저지르게 된다. (p.112)

‘다양성‘의 시대인 오늘날 학자, 고위 공무원, 정치인에 유색인종을 임명하는 데 거는 높은 희망은 아주 작은 실수로도 한꺼번에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이 같은 실수를 했다면 애당초 눈에 덜 띄었을 것이고 눈에 띄었더라도 덜 과장되었을 것이다. 불균형한 감시는 전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실수를 발견한다. 이는 곧이어 병리화 과정을 만들어내면서 더 많은 감시를 정당화한다. (p.112)

여성과 인종화된 소수자는 자신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다는 사실, 아주 작은 실수조차 무능력의 증거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른바 ‘대표성에 대한 부담감‘을 짊어진다. 그들은 그 자체로 표가 나고 가시적인 그들 집단의 능력을 대표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파농은 어떻게 개인 경력 이상의 것이 ‘검둥이‘ 외과의사의 일에 달려 있는가를 설명했다. 인종화된 특정 집단의 능력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며 소수자의 일원이라는 데에 당연한 부담이 있다. 비백인도 그 일을 잘할 수 있다느 ㄴ것을 보이기 위해 일을 잘해야 하는 압박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고위 공무원은 "못 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편을 실망시킬 테니까요. 아시아인이 정말 잘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잘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p.113)

보편성·일반성·진실과 관련된 전문직에서 흑인 신체는 백인 신체와 달리 그들 인종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지만(Puwar 2004b) 제도 정치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정치 권위는 인종적으로 표가 나지 않는 이들에게 적합하며, 흑인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대표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인종이 과잉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반에 언급한 두 천사 이야기에서 이 모순을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머서가 지적했듯이 검은색과 상아색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는 감상적 수사가 작동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자를 차별화하면서 보편적 인간에 위치하는 것은 백색 천사이다. (1995:25). (p.116)

소이나 보이스, 제이디 스미스, 앤 듀실은 그 특정한 발화 주체의 위치가 인종화된 소수자 여성들에게 어떻게 활용되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타자로서, 스미스가 말한 바로는 계급과 인종에 대한 지ㅖ의 언어를 쓰리라고 기대된다. 이는 매우 특별한 발언의 지위이다. 그들의 발화는 그들의 신체적 존재와 연결되고, 그들으 ㅣ의견은 그들이 체현했으리라 간주된 것에 고착된다. 이것은 백인 남성이 말하고 쓰고 창작할 때는 첫 번째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담감이자 연관성이다. 백인 남성은 단지 인간으로서 말한다. 인종과 젠더가 그의 신체적 재현으로부터 이미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립적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보편적 인간이 실제로는 (예컨대 국가·젠더·인종에 따른)육화된 존재로서 어떤 특정한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비가시성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차지한다. (p.129)

몇몇 노동당 여성의원은 ‘성적 희롱과 캣콜링(catcalling)‘이 흔히 보수당 의석에서만 나타나는 것 같다고 했지만, 대다수는 희미한 형태일지라도 노동당 의석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당 남성들 또한 토리당 여성의원들을 ‘트집 잡는 말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시아 콕번(Cynthia Cockburn)은 조직 내 양성 평등에 대한 남성들의 저항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성적 농담이 남성 지배의 한 형태인가를 지적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받는 불이익의 원천은 직장에서 남성들이 야기하는 고도의 이성애적, 성차별적 문화로 인해 극대화된다. 무리 지은 남성들이 여성을 아예 배제하는 것과 달리 이러한 문화는 여성을 포함하지만 주변화시키며 통제한다"(1991: 153). 이런 환경에서는 온정이 담긴 성적 농담조차도 여성들을 주변화시킨다. (p.155)

또 다른 의원은 ‘여성 문제‘를 다루길 바라면서도 ‘여성 문제‘만 말하거나 ‘부드러운‘ 주제만 다룬다는 고정관념을 피하기 위해 "모든 주제를 말함으로써 그들을 속이는" 전략을 취한다고 언급했다. 어떤 여성들은 ‘여성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여성이라는 딱지를 피하기 위해 ‘부드러운‘ 주제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강경한‘ 주제를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들은 전부 다 한다. (p.160)

고위 공직 여성에 대한 퍼트리샤 월터스(Patricia Walters)의 연구는 여성이 중요한 핵심 능력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음을 강조한다(1987: 22). 여성, 고위직, 필수적인 능력이 조화를 이루리라 상상하지 않는다. 여성은 적어도 초반에는 어찌됐든 무능하다고 평가될 가능성이 높고 능력 범위가 무척 좁다고 인식된다. 내가 인터뷰한 고위직 여성은 유능하게 보이는 것과 그리 공격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 사이를 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허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을 여성적인 방식으로 잘 수행하는 것을 중시했다. 용인되는 지도력 방식과 자질이 남성적인 것으로 체현될 때 이러한 균형을 지키기가 어렵다. 한 고위 공직 여성은 "맨 꼭대기층 바로 거기에 지도자, 최고의 권위자, 권위적 인간과 같은 온갖 무형의 것들이 있어요. 아시다시피 고전적으로 남성적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이죠"라고 평했다. (p.171)

우리 모두는 우리 장의 게임에 참여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사회 궤적-가장 중요하게는 계급 배경과 학문적 훈련-때문에 게임을 운용할 능력뿐 아니라 게임의 감각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들의 사회 궤적으느 "게임의 내재적 요구에 곧장 적응할 수 있는" 하비투스로 그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부르디외가 적절히 언급하듯이 "그들은 되어야 할 사람이 되기 위해 단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될 뿐이다"(Bourdieu 1990:11). (p.219-220)

확실히 자신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고 규범에 섞이려고 노력하는 외부자는 수용되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들은 생존 전략으로 침묵하면서 그냥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젠더와 명명에 관해 스스로를 어떻게 위치시키느냐가 실제로 여성성 관리의 필수요소이다. 젠더 쟁점을 "너무 많이 말한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는 시끄럽고 공격적이며 신경질적이라는 딲지가 붙는다. 결국 여성은 ‘공간 침입자‘로서 다소 불안한 지위에 처한다. 젠더를 명명하면서 전문직 직업윤리를 거스르면 그 지위는 한층 불안해진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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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4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8-10-2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책 완독사진은 언제든 좋은데, 이번 사진의 주인공은 도서관책이네요.
도서관이 알아야할텐데.... 강동도서관 보고 있나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인용해주신 부분 읽고 나니 관심이 생겨요.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이 소수자의 위치에서 느끼는 생각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읽고 싶어요^^

다락방 2018-10-24 16:02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단발머리님은 저보다 더 잘 읽어내실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이 읽고 페이퍼 써주시면 좋겠어요!
역자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서 그걸 적어놓았던데, 단발머리님은 이 책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저자의 생각에 혹시 비판하실 것은 없을지 그것도 궁금하고요. 저는 온전히 제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까닭에 비판을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럼에도 분명 의미있는 독서였어요.

뒷북소녀 2018-11-0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에쿠니 가오리 책들 열심히 읽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일본 소설 자체를 멀리하게 되더라구요.

다락방 2018-11-05 08:33   좋아요 0 | URL
저는 아마 지금 다시 에쿠니 가오리를 읽는다면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다 읽으려고 한건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