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성소(聖所)에 당신을 간직해 두었지. 난 왜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폴은 대학에 입학했던 그 나이에 동네에 사는 오십대 여자 '수전'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까지 감행했지만, 수전은 불행했고 알콜중독에 시달렸다. 수전의 곁에서 수전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점점 지쳐갔던 폴은 다른 여자친구를 사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첫연애상대인 수전에 대해서 늘 신경을 쓰고 있고, 그녀의 존재와 또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새로 사귄 또래의 여자친구 '애너'에게 말했다. '애너'는 폴의 말을 듣고 이해하며 수전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렇게 기쁘거나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으니까. 수전이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에 따라 그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폴, 이 말은 해두는 게 좋겠어. 수전 매클라우드 …… 는 사실 나하고 맞는 여자는 아니야."

"알겠어."

"내 말은, 그래도 너를 위해 늘 수전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할 거란 뜻이야."

"그래, 뭐, 그건 정말 너그러운 태도지.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수전한테 내 인생에는 늘 수전을 위한 자리가 있을거라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해두는 게 좋겠네, 설사 그게 다락방이라 해도."

"폴, 내 인생에는 다락방을 원치 않아." 그러더니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말았다. "그 안에 미친 여자가 있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아."

나는 마지막 말이 우리 사이에 커져가는 정적을 채우도록 내버려두었다. (p.282)




영화 《몽 루아》에서 여자는 아주 달콤한 남자를 만나 사귀게 되고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도 역시 '다락방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프고 신경질적이고 그래서 종종 남자는 밤에 잠을 자다가도 그 다락방의 여자에게로 달려간다. 그의 아내는 그것이 몹시 싫지만, 남편은 그 다락방의 여자를 포기하지도 못하고 계속 신경쓸 수밖에 없다. 다락방의 여자를 신경쓰고 챙겨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면서.



내가 '애너' 였어도 폴과의 관계를 오래 가져가지 못했을 것이다. 숨겨도 느껴질만한 존재를 가진 사람, 그런데 나에게 '나에게는 다락방에 숨겨둔 여자가 있어' 라고 말하면서 그 관계를 인정하길 바라는 남자와 내가 어떻게 다정한 연인 관계를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몽 루아속 아내도 마찬가지. 어려울 때마다 달려나가야 하는 다락방 여자가 있는 남자를 어떻게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내하며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랑이 끝나고 다음 사랑을 맞이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사랑에게 충실할 수 있다. 과거의 사랑을 묻어두고 혹은 잊은 채로 '지금 사랑이 최고야, 여기에 최선을 다할거야' 하며, 현재의 상대에게 충실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에겐 일곱번째 여자가 가장 강렬했고, 그 전에도 후에도 그런 여자는 없었지, 내 삶에 다른 여자를 아무리 만나도 그 여자만한 여자는 없을 것이고, 나는 그여자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두번째 연애한 남자는 내 인생 남자다, 그 전후에 진행된 연애들에 있어서도 나는 그 사람만큼 사랑할 수 없다' 하고 깊이 각인된 존재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만약 누군가랑 함께 살기로 했다면 사실 그 존재를 지금 연애의 상대에게 알려서도, 드러내서도 안되는 게 아닐까. 그리야 지금 현재의 사랑이 원만하게 잘 굴러갈 수 있을테니까. 만약 내가 가슴에 품은 다름 사람이 있다는 걸 상대가 알거나 티가 난다면, 그 사랑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사랑일까?



'줄리언 반스'의 책 속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현재의 연애 상대를 아주 미쳐버리게 하는 과거의 존재다. 걸리적거리고 거슬리는 존재. 그러니까 나였어도 도무지 허락할 수 없는 상황. 싫어, 나는 대체품이 되지 않을 거고, 니가 그녀를 가슴에 품은채로 내 옆에 있다는 건 나에게 못할 짓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디스 워튼은 좀 다르다. 이디스 워튼은 그렇게 성가신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디스 워튼의 존재가 내게 좀 더 가까운데, 이디스 워튼은 자신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서, 한 사람이 깊이 마음에 품게 된 사람에 대해서 '마음 속 성소' 라고 표현했다. 언제나,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 결코 지울 수 없는 사람, 내 삶에 끝까지, 부재하면서도 함께 하는 사람.


'아처'는 '엘렌'을 가슴 속에 품는다.





그 후로 그들 사이에 더는 연락이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일종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다. 그곳은 조금씩 그의 진짜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이 되어 갔다. (p.324)













어떤 사람들은 마음 속 성소를 가만 묻어둔 채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웃으며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 속 성소를 만들어둔 채로 그 성소와 함께 산다.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아마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내 중심, 내 축, 내 단단한 기둥은 이미 내 성소가 되어버렸으니까. 성소는 내 마음속에 있어서 온통 나를 휘어잡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일상을 살고,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 부재의 상대가 나와 같이 있음을 느끼며, 내 마음속 성소를 단단히 느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순간, 아마도 그 성소는 상대에게 '다락방의 미친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 내 마음속 성소를 있는 그대로, 그 단단함과 소중함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락방의 미친사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속 성소가 있다면, 다른 상대를 또 찾는 대신, 마음속 성소와 그냥 함께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나는 마음속 성소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마음 속 성소에 넣어둔 존재일 수도 있다. 또한 나는, 마음 속 성소를 가진 사람을 만나 '다락방의 미친사람'존재를 느끼고 분노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 다락방의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자 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에게 내가 우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두 달 내내 울지언정 그 사람에게 이별을 말할 것이다. 그 사람에게 다락방의 존재가 있다는 걸 알면서 내가 곁에 있다는 건, 나에게 할 짓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두어서는 안돼. 내 옆에 있기로 했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내게 있어야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당신이 수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건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당신이 이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수키가 다른 사람에게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나보다 수키를 더 원한다는 것도 알아요. 난 나를 동정하는 남자와 섹스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와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 내 생의 나머지 시간이 다 걸린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앨 거예요. 당신이 여기 조금 더 머물 거라면, 나는 당신 집에 돌아가서 내 물건을 싸서 사라질게요.」 (pp.212-213)










오늘 저녁에 에피톤 프로젝트의 새앨범이 나온다고 한다. 지난 앨범 에서의 <회전목마>는 나의 시그널 뮤직 이었는데, 이번 에피톤의 새앨범에서도 '앗, 이건 시그널이다' 할만한 곡이 있을까. 너무나 기대가 된다. 두근구든.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 매운 족발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 아픔이다...










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p.75-76)

나는 펠리온과 오사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보다는 수전의 지식에 내 지식을 쌓는다는 생각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연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 사실. 연인들은 세상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합했다. 또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쨌든 성경에서는, 그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미 그녀의 지식 위에 내 지식을 쌓은 셈이었다. 설사 그것이 콩으로 쌓은 언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콩으로 쌓은 산의 높이가 얼마든. (p.111-112)

˝내가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고 있는 게 있나요? 수전에 관해서, 또는 수전과 나에 관해서 나한테 해줄 수 있는 말, 도움이 될 만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든 게 망하고 잘못되어버리면 너는 아마 극복을 하겠지만 수전은 못 할 거라는 거야.˝
너는 충격을 받는다.
˝별로 친절한 말은 아니네요.˝
˝나는 친절한 건 안 해, 폴. 진실은 친절하지 않아. 인생이 시작되면 금방 알게 될 거야.˝ (p.212)

슬픈 섹스는 그녀가 술에 취하지 않고, 너희 둘 다 서로를 바라고, 너는 어쨌거나 상관없이 그녀를 늘 사랑할 것임을, 그녀가 어쨌거나 상관없이 너를 늘 사랑할 것임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것임을 알지만, 너는-어쩌면 너희 둘 다-이제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반드시 행복에 닿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그래서 너의 사랑을 나누는 행동은 위로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의 서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부정하려는 가망 없는 시도가 된다. (p.231)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살밍 전개되면서, 신중함과 조심성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조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가진 적이 있으며, 어떠면 다른 이야기는 이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제 남녀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그것이 식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집착하는-많은 경우, 각각 이야기의 서로 다른 부분에-것, 심지어 서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에 이르도록 집착하는 것을 전보다 잘 이해했다. 나쁜 사랑은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을 포함하고 있었다-어딘가, 깊은 곳, 그들 둘 다 더는 파헤치고 싶지 않은 곳에. (p.34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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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shin 2018-10-0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고 에피톤 프로젝트 들어야지! 라고 생각하다가 잠들어버렸네요. 매운 족발은 드셨나요.. 매운 족발이라도 다락방님의 마음 아픔을 달래줄 수 있었다면 좋겠네요.

다락방 2018-10-05 10:17   좋아요 0 | URL
매운 족발은 못 먹었구요. 내일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후훗.

에피톤 프로젝트 이번 앨범 들었는데요, 좋은 곡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음.. 1,2집 만큼 좋진 않네요. 에피톤 프로젝트는 1,2 집이 최고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