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극장에 가서 영화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을 보았다. 영화 속에는 맨 처음 쥬라기 공원을 만든 박사의 손녀가 나오는데, 아마도 그 소녀의 나이는 9살 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9살인지, 그러니까 영화속에서 9살이라고 나이가 나오는건지, 아니면 내가 그냥 보고 '9살쯤 됐겠구나'한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그 소녀에 대해 기억하는 건 9살.. 이라는건데, 그러니까 이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어떤 인상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9살 내 조카 때문에 그냥 소녀들이 다 9살로 보이는 건 아닐까..모르겠다. 아무튼, 그 소녀의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고.
가능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말하려고 하는데 될지 모르겠다.
영화속에서 그 소녀와 그 대저택에서 함께 사는 어떤 남자어른이 있다. 영화의 끝에 남자 어른은 주인공들에게 이 소녀의 비밀에 대해서 말한다. '너네, 그 아이가 어떤 아인줄 알아?'하면서 얘길하는 것. 그리고 그 얘길 할 때 그 자리에는 그 소녀가 있었다. 그것은 소녀가 이미 스스로에 대해 짐작했던 일이라 해도, 타인으로부터 그렇게 갑작스레 폭력적으로 들어서는 안되는 말이었고, 그리고 그걸 듣고난 후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게될지, 어떤 마음일지도 아주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그 남자가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그 '아이'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걸 굳이 말해야 했다면, 아이가 없는 자리에서 어른들에게 말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저 남자는 하지 말아야 할 것, 그래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당이기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리 악당이어도' 해서는 안될짓이 있다고 생각했던건데, 그렇지만 해서는 안될 짓을 하지 않고 선을 지킨다는 것은 역시 악당이 아닌 것일까...
요즘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중인 《김비서가 왜그럴까》를 웹툰으로 몇 회 본 적이 있다. 처음부터 '비서'란 직업에 대한 전혀 이해가 없이 그려진 웹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것은 로맨스를 그려내기 위한 웹툰이니 보면서 비서와 부회장의 콩닥콩닥 로맨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 거에 재미 느끼라고 보여지는 거겠지만, 역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비서가 부회장의 넥타이를 고쳐매 주는 장면이었다.
나는 '비서'라는 직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 상사의 넥타이를 매주는 상황에 곧바로 대입해보게 됐는데, 와, 진짜.... 그건 아무리 상사라고 해도 비서가 해줄 역할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되는 것이다. 왜 비서가 넥타이를 고쳐매 줘야 하는거지? 그것은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 아닌가. 내가 우리 보스의 넥타이를 고쳐매준다? 난 진짜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러라고 하면 당장 사표내고 나갈거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어쩌면 속으로 이를 갈면서 넥타이를 고쳐매줄 지도 모른다. 나는 을이니까. 고용되어 있으니까.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필요하니까. 그렇지만.. 기꺼이 상사의 넥타이를 고쳐매준다니... 나는 아무리아무리아무리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싶은 거다.
동료 비서에게 물었다. 마침 동료 비서는 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너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받아들이겠어?'라고 하니 강한 거부의사를 표현한다. 그건 우리 보쓰가 늙고 못생겨서가 아니다. 드라마속의 부회장이 젊고 잘생겨서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보쓰'와 '비서'로 만났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젊고 잘생겨서 이게 허락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젊고 잘생겨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서라는 직업에 판타지를 갖고 있다. 보쓰의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보쓰랑 은밀한 사이가 되기도 쉽고 또 보쓰의 곁에 있을 사람이라 늘씬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일단 그런 생각 자체가 비서를 성적대상화 시키는 거고, 그 누구보다 보쓰랑 은밀한 사이를 원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비서 그 자신일 것이다. 비서를 두고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늙고 성질이 고약한 남자일 확률이 매우 높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이 책은 제목이 그냥 다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목이 근사하다. 진짜 제목에 빚을 진 작품이라 해야할까. 그런데 그 제목이 심지어 번역된 제목일 뿐, 원제는 '화산 자락에서'라고 한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번역된 제목이 너무 책의 내용에 잘 맞고 또 책 표지까지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디자인한듯 보인다.
규모가 크지 않은 건축사무소 이야기이다. 이 사무소에서는 해마다 여름에 이 사무소가 소유한 여름 별장으로 가 일을 한다. 시내의 일터에도 직원을 소수로 남겨놓고 일흔을 넘긴 소장을 비롯해 다른 직원들은 모두 여름에 별장에 가 일하는 것. 별장에서 각자 조를 짜서 식사를 준비하고 일을 하고 각자의 방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함께 밥을 먹고 각자의 공간에서 쉬기도 하고, 서고의 책을 보기도 하고, 벽난로 앞에 앉아 홀짝홀짝 술을 들이켜기도 한다. 와, 이런 별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두번도 넘게 생각했다. 풍경이 너무 좋은데, 책 속에서는 산 속의 풍경에 새들의 지저귐과 클래식 음악소리, 그리고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까지 타닥타닥 들려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렇지만 이 사무소의 문화 혹은 일본의 문화라고 해야할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여름을 지내고 다시 시내의 사무소로 전 직원들이 돌아왔는데,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소장이 주인공 남자에게 '주말동안 별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하는 거다. 직원은 자신의 역할도 있는 바, 소장님을 모시고 별장으로 간다.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별장에 도착했고, 젊은 직원은 불을 피운다.
짧은 장작을 난로 바닥에 쌓고 성냥불을 갖다댄다. 유황 냄새가 피어오르고 탁탁, 쾌활한 소리를 내면서 불길이 돈다.
"오, 불 피우는 데 달인이 됐네."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선생님의 안경에도 난롯불이 아른거리고 있다.
"장작 타는 냄새가 좋군. 좋은 장작이야."
졸참나무였다. 장작을 묶은 철사를 펜치로 끊고 난로 옆에 쌓았다.
'선생님은 왜 저를 입사시키셨나요.' 가슴속에서 물었지만 말이 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왜 마리코와 저를 결혼시키려고 생가하신 겁니까. 떨어진 나무 부스러기를 작은 빗자루로 쓸어모아서 불 속에 털어넣자, 탁탁 하고 작은 불꽃처럼 터지면서 탄다.
"네 다발 갖고 왔는데, 조금 더 있는 편이 좋을까요?"
"9시가 넘거든 목욕물 준비 부탁하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
선생님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책상 위의 도면에 눈길을 보냈다. (p.340)
잘 읽어가다가 '응?????????????????????????'하고 놀라버렸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직원에게 목욕물 준비를 부탁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부탁하는 사람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목욕물 준비해주는데 나는 이게 너무 이상했다. 소장과 직원의 관계다. 업무적으로 얽힌 관계. 물론 소장은 나이가 일흔이 넘었고 직원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스물셋의 나이이다. 게다가 이 직원은 이 소장을 평소에 존경해서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어했다. 노년의 소장이니, 뭐랄까,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목욕물 준비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건가?
그러니까 이들에게 이것은 태클걸만한 게 아닌,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건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점심에 밥 먹어도 저녁에 배가 고프듯이..자연스러운 거야?
목욕물 준비가, 글쎄 내가 일본을 안가봤고 어떤 특별한 준비가 또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뜨거운 물을 탕 안에 받아두는 것일테니 딱히 뭔가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드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건 아무리 그래도 부탁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이게 너무 찜찜한거다. 넥타이 매주는 게 힘이 드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면 안되는' 일인것처럼, 목욕물 받아달라는 부탁 역시 많은 힘을 요해서가 아니라 '그러면 안되는', 그러니까 업무적으로 상하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부탁하면 안되는 일 아닌가?
이 장면에서 몇 장면 넘어가면 소장님은 뇌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는데, 그렇다면 선생님(이렇게 부른다) 몸이 유독 약하기 때문에 목욕물 받아주는 것이 그저 배려차원으로 가능한 일인걸까? 나는 읽으면서 뭔가 이 상하관계가 지나치게 사적으로 의존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싫은 거다. 게다가,
이 선생님에게는 '애인'이 있다.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이 애인의 집을 선생님이 지어줬는데, 자기네 회사가 시공한 업체의 보수야 자기들이 하는 게 당연하다지만, 자기 직원을 수시로 애인의 집 보수및 점검을 위해 보내는 게, 뭐랄까, '뭥믜' 되는 상황이랄까. 그래서 주인공은 선생님의 애인 집도 점검해주고 사모님을 모시고 중환자실도 가고... 이게 소설에서는 뭔가 기분나쁘다고 표현되지는 않는데, 나는 되게 엿같은 상황으로 느껴지는 거다.
선생님과 부인의 사이는 그리 원만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선생님과 부인은 딱히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아. 서로에게 심드렁한것 같고, 선생님은 애인에게 의지하고 애인 역시 선생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쓰러지고 중환자실에 입원할 때, 애인은 선생님의 병실에 올 수가 없다. 선생님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중요한 자리에 다 참가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는 사이가 딱히 좋지도 않은 선생님의 '부인'이 참석해야 한다.
애정이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애정이 넘치는 상대에게 공식적으로 드러내지지 못하는 애인의 마음 역시 아플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고, 그리고 함께 있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할지 뻔히 아는 사이인데, 그리고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가까운 사람들도 다 아는데, 그런데 공식적인 자리에 나는 '내가 저사람의 애인이다' 하고 나갈 수가 없어. 그저 집에서 우두커니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 그 사람이 회복은 했나, 몸상태가 어떻게 됐나, 죽었나... 너무 ..... 너무하지 않습니까?
세상엔 이런 관계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이 이런 일들로 속을 끓이고 있을테고. 나는 이 모두에게 아픈 일들이 너무 싫어. 이 입장에 처한 사람들 누구 하나 과연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가! 부인은 자기에게 마음 없는 남편을 보고 가슴 아프고, 남편은 아내라고 부르는 사람 있지만 사랑하는 여자 멀리 있고,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순간 좋지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낼 수 없어 가슴 아프고, 주변에서는 이걸 다 보면서 참 뭐라고 말도 못하고..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세상 쓸데없는 짓이지. 그러니 우리는 좀더 명확히 정리하고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모든 아픔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하는 것 같다. 혹여라도 마음이 다른 데 있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마... 모두를 아프게 해, 모두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그 사람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는 선을 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서 알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상대랑 싸운다 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될말'같은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 이제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 후에 우리에게 켜켜이 악감정만 쌓인다 해도,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중 치명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에게도 또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비록 원수가 되었다 해도 인간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지켜야할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쥬라기 공원에서 어른 남자는 선을 넘었다.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아이에 대해 그걸 얘기하면 안되는 거였다.
비서가 보쓰의 넥타이를 고쳐매주어서는 안되었다. 앞으로 그 자리에 앉게될 후임도 그렇다면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하는가?
소장이 신입 직원에게 목욕물 받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 목욕물을 직원에게 받아달라는거야?
정말 한평생 충실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하면 안되는 거다. 여럿 불행해진다.
"나는 여름 별장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어요. 슌스케 씨가 와보라고 여러 번 말했어도, 그럼 지금 같이 가보자, 라고는 안 했거든요. 여기 밭에서 마음에 드는 꽃을 갖고 간 일도 있는데 어떻게 심어서 어디에 피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려츠주지도 않았어요. 나한테 거는 전화가 방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앉아서 걸었는지 서서 말했는지, 그것도 몰라요. 만일 슌스케 씨의 의식이 이대로 안 돌아온다면, 이제는 갈 기회도 없잖아요? 작업실 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떤 의자에 앉아서 어떤 경치를 보고 있었는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어요. 쓰러지고 나서 자꾸 여름 별장에서의 슌스케 씨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목소리뿐이지 모습은 없어요." (p.367)
이게 뭐냐...
"그건 말이야, 우치다가 괜히 장난 비슷하게 마리코한테 접근해서예요. 반쯤 놀이 삼아 데리고 다니는 척 자기 마음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언제든지 진심이 아니었다고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있게 말이지. 자기 자신한테도, 마리코한테도 말이에요. 그런 것이 우치다의 잘못된 점이지요." (p.368)
이것도 졸라 싫어..
"나는 구가루이자와에 묵을 테니까, 토요일 점심때쯤 유키코씨랑 데리러 와줄래?" 마리코가 말했다.
나는 유키코하고 단둘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순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왜? ……뭐?" 마리코는 조금 무서운 얼굴을 해보였다.
"괜찮을까?" 그렇게 말해보았다.
"까, 라니 왜 까야?"
마리코는 내 목에 양손을 뻗어 가는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목을 조였다. (p.373-374)
자기 여자친구에게 다른 여자랑 둘이 있는 상황을 '괜찮을까' 묻는 것도 답없다 진짜. 이 놈도 싫어.. 안괜찮으면 어쩔건데. 아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