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포즈》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스로 모시고 있는 비서이다. 여자는 회사에서 '마녀'라는 별명을 얻은 빡빡한 그리고 엄청 유능한 편집장이고. 그녀는 운동도 열심히하고 좋은 집에서 혼자 잘 살며 일에서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인다. 그러나 캐나다 국적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미국에서 비자 거절이 떨어지고 그렇게 미국이란 나라에서 쫓겨날 판이 된다. 여기에 이렇게 해놓은 게 많고 계속 하고 싶은데...  캐나다에 가서도 화상회의 등으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지만 회사에서 '그건 안된다' 라고 한다. 쫓겨난 사람이 이곳의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자신의 말잘듣는 남자 비서에게 위장결혼을 명한다. 그렇게 되면 니가 원하는 책도 내줄거고, 하면서 너 좋고 나 좋자는 것. 남자도 이에 동의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 결혼이 여자쪽 사정이 급해 하게된 것이니만큼 여자에게 '나에게 청혼하라'고 말한다. 여자는 길바닥에서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고는 남자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남자는 수락하고.



이민국(맞나)에서는 이들 부부가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지, 위장결혼이 아닌지 심사하고 확인해야 한다. 여자는 이번 주말에 있을 남자의 할머니 생신 파티에 참석해 가족들과 같이 보내며 서로를 알아가기로 한다. 남자의 고향인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도착해서도 마찬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고 갑자기 툭, 자신의 이야기를 던지는 중에 남자가 빨리 여자에게 답을 하지 않아 여자가 내 말을 들은건지 묻는다. 그러자 남자가 대답한다.



"곱씹고 있었어요."



내가 너무 좋아했던 장면이다. 여자가 하는 말들을 그냥 흘려넘기는 게 아니라, 한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는 거다. 이 과정을 거치면 남자는 당연히 그 날의 대화를, 그 대화가 오고갈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곱씹었으니까'. 내가 잘하는 것. 곱씹고 나면,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물론 이 곱씹는 것은 누구와의 대화에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의 대화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사람,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다정한 사람에게 발현되는 것. 남자는 스스로 저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소중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여자는 십대에 부모님을 잃고 혼자서 잘 지내왔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능력있는 여성으로서 잘 지내왔다. 딱히 외로움이란 것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렇게 아마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집에 도착해 남자 가족들의 환대를 받고 그들과 소란스럽게 섞이면서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지냈지만, '이런 게 가족이었지' 하게 되는 것. 남자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할머니도 모두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여자 역시 사랑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익숙하지 않은 관심과 오지랖에 처음엔 불편해하고 어색해 하다가, 시간이 흐르자 이것이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이 하는 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인지한다. 이것이 위장결혼임을 알 경우, 결혼 후에 이혼하게 될 경우, 남자의 가족들이 얼마나 상처받을지를 생각하면 이걸 더이상 진행할 수 없었던 것.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 중간즈음에 빻은 장면이 하나 나와서 좀 빡치긴 했지만("그녀 가방은 그녀가 혼자 들거예요, 그녀는 페미니스트거든요"), 전체적으로 너무 좋았다. 모든 가족들이 오지랖 대박이긴 하지만, 새롭게 맞아들이게 될 사람에게 사랑을 몰빵하는 게,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여자는 지금처럼 혼자여도 계속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생겨서 더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만 '아 이런 것이었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러니까 가족이란 게 대체적으로 가장 신경쓰이게 하는 구성원들이긴 하지만, 어딘가에서 이렇게 사랑으로 똘똘 뭉친 가족이 있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았다. 게다가 여자가 '이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좋았다. 그것은 자신의 그동안 삶이 외로웠다거나 고독했다거나 하는 걸 나타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혼자서도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니까.



여자의 말을 곱씹는 남자가 나오고, 가족 구성원을 사랑하는 가족이 나오는 이 로맨스 영화가 너무 좋았다. 역시 이런 영화를 남자들이 좀 많이 봐야하는데... 좋은 영화는 안보고 화장실 몰카나 쳐보고 있으니 원....






(위에 가방 너무 예쁘다... ㅜㅜ)



















토요일에는 창원에서 친구들이 올라와 함께 혜화시위에 갔었다. 시위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는 각자의 객실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나랑 함께 자게된 친구는 검색어에 '가을의 전설'이 올라왔다며 지금 하는 모양이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또 맥주를 따라서는 함께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때 본 적이 있었는데, 오래되어서인지, 삼형제가 모두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 브래드 피트가 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여자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 등만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그 때 이 영화보고 브래드 피트 엄청 좋아했었는데...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와 나는 중간즈음부터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삼형제중 막내가 전쟁에서 죽고, 막내의 애인이었던 여자는 큰 형과 결혼한다. 마음은 둘째 브래드 피트에게 가있었는데 왜 이렇게 결정한거였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공무원(아마도?)의 아내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우울하다. 그런 와중에 브래드 피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아.................. 그 때의 슬픔. 슬픔의 새드니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둘째와 첫째의 사이는 안좋아서 사실 그동안 잘 안보고 살아왔는데, 여자는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브래드 피트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우연히 거리에서 브래드 피트 부부를 만나게 된다.


아아 이것이 이렇게, 이토록이나 가슴 아픈 영화였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브래드 피트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랑 행복한 걸 보는 건... 아 진짜...... ㅠㅠ 이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결혼은 진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되는거야. 안그러면 나중에 이렇게나 후회하고 가슴 아프고 미쳐버린다니까 ㅠㅠㅠ


그런데 나쁜 놈들 때문에 브래드 피트의 아내가 죽게된다. 나는 아내를 잃고 오열하는 브래드 피트 때문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 순간, '아아 이제 여자와 다시 잘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같은 생각을 했음을 고백한다...나는 브래드 피트의 아내가 아니라, 여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로하다가 다시 내게로 오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브래드 피트에게 다가가는 대신 죽음을 택한다.



죽음을 택할만큼 그녀는 불행했고 우울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죽음을 택하지 않는 쪽이 더 나았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선택하는 데에야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 나였다면, 살아서 계속 브래드 피트를 마주치는 쪽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이라도 당신을 마주치는 것,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그리고 어쩌면 내게도 그의 옆에 자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 것. 그 희망이 절망이 될까봐 늘 전전긍긍 하면서도, 하루 또 하루, 그를 보면서 사는 쪽을 나는 택했을 것 같다. 종국엔 참지 못하고 먼저 연락을 취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신 괜찮아?"

"잘 지내나요?"



그런 식으로 절망하는 그의 옆에서 그가 버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아니고 나는 그녀가 아니야.... 아무튼 이게 이렇게나 슬픈 영화였나, 다른 여자와 행복해 보이는 남자를 보는 여자가 되어, 나는 함께 우울해했고, 그러나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는 여자에게로부터 나는 분리되었다. 하지마, 그러지마, 하고 갑자기 그녀로부터 나는 빠져나온다. 나는 그의 옆에서 살고 싶다. 그가 없는 세상을 택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사랑인가...파워 오브 럽.








친구랑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행복했어. 그러고보면 이 친구랑은 이런 시간을 종종 보내게 된다. 친구가 나의 여행 친구이기 때문에 같이 밤을 보낼 일이 종종 있고, 그러다보면 술 마시면서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제주도에서 노팅힐을 보기도 했지! 이런 순간들은 켜켜이 쌓여서 나중에도 돌이켜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어제는 아홉살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모, 2단부터 9단까지 외운 거 기억하는데 30분이나 걸렸어. 그런데 저녁에 피자랑 스파게티 먹었어. 엄마가 레몬에이드도 사줬어!



맛있는 거 먹고 씐나서 내게 막 전화를 한다. 아 너무 예뻐 너무 좋아. 나는 '나도 얼른 조카에게 맛있는 것 사주고 싶다, 맛있는 것 먹는 것 보고싶다' 하는 마음이 한가득이 되었다. 잠시후 남동생이 도착했는데 조카는 삼촌을 부르더니 "삼촌~ 보고싶어!!" 한다. 아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예뻐라 ㅠㅠㅠㅠㅠㅠㅠㅠㅠ난 얘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



조카에게 바로 그 자리에서 맛있는 걸 사주진 못했지만, 나는 앞으로 조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토요일에 혜화시위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모였다. 시위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스태프가 돌아다니면서 말해주었다.


"현재 경찰 추산 2만명이래요!" 우리는 서서 환호했다.



잠시후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삭발식이 거행되었다. 삭발한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한 참여자는 '동생이 어린데 그 동생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쓰는 지금도 울컥해. 나 역시 나보다 더 젊은, 어린 여자들을 위해서 그 자리에 갔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야 내 어린 조카가 앞으로 살아가기 힘겹지 않을테니까. 아마 그 자리에 있는 여자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피해받고 상처받아 우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보다 훨씬 어린 여자들을 위해서.




나 역시 반성할 게 많다. 어릴 때 그리고 최근 몇년 전까지도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수시로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그 때 내가 왜그렇게 빻았던걸까, 그런 말과 행동을 했던 나 자신이 미워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수시로 든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고 결심을 새로이한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나처럼 과거의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후회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친구들이 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어 함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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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6-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드라불록이 주연했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 혹시 아시나 모르겠어요. 제가 여러번 봤던(영어 공부를 위해서지만 ㅋㅋㅋㅋㅋ) 영화인데, 그 영화 내용이랑 <프로포즈>랑 무척 비슷하네요. 다른 점이라면 산드라 블록이 대가족의 ‘대가족 분위기‘를 엄청 부러워했다는거, 라고 할까요.
<프로포즈>의 능력있는 여성이, <당신이...>에서는 좀 신데렐라 느낌이 난다 할까요.
조금 뻔한것 같아도 저는 또 이런 따뜻한 영화가 좋더라구요.

어제부터 혜화역 집회 뉴스 찾아 읽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서로의 용기가 되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가요.
우리...

다락방 2018-06-11 11:23   좋아요 1 | URL
저 그영화도 봤어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요. 이거 동생을 좋아하는데 나중에 형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영화죠? 그 뭣이냐, 기차표..판매원으로 나오고요? 아주 오래전에 봐서 기억은 희미하지만 저 그 영화 봤습니다 후훗.
제가 이 [프로포즈]를 넷플릭스로 봤는데요, 이거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로맨스 영화 봐야지 싶었는데, ‘비슷한 영화‘로 추천되는 걸 제가 거의 다 봤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제가 지금 다음에 볼 영화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산드라 블록은 [투 윅스 노티스]에서 ‘하버드 법대 졸업한‘ 여자로 나와요. 휴 그랜트였나, 너 어디 학교 나왔냐 물었더니 ‘하버드 법대‘ 라고 답하거든요. 짱멋짐. 저 그거 보고 너무 좋아서 아아 나도 하버드 법대를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누가 물을 때

˝나 하버드 법대 나왔는데?˝

하고 쿨하게 대답할 수 있을텐데....했었답니다. 왜 저는 하버드 법대를 못갔을까요, 단발머리님? 슬퍼요 ㅠㅠ


혜화시위는 실제로 현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그 많은 여자들이 함께 앉아 소리친다는 게 진짜 의욕 뿜뿜 되더라고요. 다음에는 더 넓은 공간에서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음에도 꼭 참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