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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실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7
이즈미 교카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처음 읽은 일본 소설이라면 [설국] 일 터인데, 아마도 그 때 나이는 열둘. 그때까지 읽은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느낌에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15년간 잡다하게 많은 것들을 읽으면서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기분이, 이 책 한 권에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 말로만 듣던 [코야히지리高野聖]를 한국어로 처음 읽는다는 흥분 탓에 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싶기도 했어요. 썩 눈에 익은 문장은 아닙니다만 번역에서 그 질감을 내버려둔 선택이 좋았다고 해야겠습니다. 원문도 (어지간히 막 하지 않는 한) 번역한다고 해서 그 성격이 많이 바뀌거나 아름다움이 사라질 종류의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전체를 읽어본 것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수록되어 있는 매 편에서, [설국]은 아닙니다만 역시 가와바타의 소녀, 노천온천 위로 떠오르던 카오루의 어리고 매끈한 나신이,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기억이나 감각이 떠올라 얼굴이 확확 달았습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高野聖]는, 이야기 자체가 그 여주인공의 몸매와도 닮아 있었습니다. '이런 여자의 땀은 연분홍빛이 되어 흐르겠지'로 대표되는 종류의 매혹, 풍성하고 숨막힐 듯이 아름다운 관능으로 가득 찬 작품이었어요. 달아오른 더위와 마물이 사는 산, 이야기 초반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저도 수박 겉핥기로나마 슬쩍 들러본 적 있는 곳들이라 그 고갯길의 여름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감돌 지경이었고요. 이즈미 쿄카의 시대와는 그럭저럭 세 자리수 단위의 차이가 나기는 하겠습니다만... 별 맥락 없이(나중에 약간의 연고가 밝혀지기는 합니다만) 그저 제 3자의 입으로 묘사되는 '아가씨'의 능력 이야기에는, 말이 아주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되 우리와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존재와의 소통이 담겨 있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신과 같은 세계공통의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만화 [유리가면]에서 얼핏 본 홍천녀의 면면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거기에 적절히 긴장을 풀어 주는 자연스러운 유머가 섞여, 인간미마저 더해 주고요. 그러나 어쨌든 저런 유머로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관능적입니다. '소매를 치켜들면 비도 내리고 눈썹을 펴면 바람도 불지' 등의 서술이 담고 있는 심상은 실로 오싹할 정도예요.
나머지 단편들은 저만큼 황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름 모두 매력이 있었습니다. 표제작인 [외과실]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과 그 이면의 부연 설명이 짜릿합니다. 저는 과연 이런 종류의 단편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 실은 그 해명이란 것도 피상적이기 짝이 없어,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미친 듯이 자극합니다. 단순히 초반 외과실의 기이한 분위기만을 언급하는 것보다는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자극적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외과실] 뿐만 아니라 [눈썹 없는 혼령]도 [띠가 난 벌판]도, 섬세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려 갑작스런 파국에서 거침없이 떨어져 내리는 점이 훌륭합니다. [高野聖]는 비교적 탐미(랄까 제 주위 식으로 말하자면 쾌락)외길에 가까운 것 같지만 이것들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한껏 탐미하기 위한 나머지 부분의 튜닝이 대단해요! 시대나 배경이 좀 낯설지라도 과히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을 작가이다 보니, 우리는 다른 미디어를 보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위에 쓴 바와 같이, 내용은 무척 훌륭했습니다만 책의 구성에 대해서는 불만이 좀 있습니다. 저는 생각의나무의 '기담문학 고딕총서' 시리즈에 상당히 호의를 품고 있습니다만...이 책의 경우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네요. 표지는 물론이고 사이사이 끼어 있는 그림들이, 내용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더러 예쁘지도 않잖습니까. 도대체 왜 넣었는지 의도를 모르겠어요. (200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