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연극 시나리오를 구상중이다.
무대는 객석이다. 그럼 관객들은? 당연히 무대에. 객석(혹은 무대)에 불이 켜지면 객석(혹은 무대)에 앉은 배우들이 대사를 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뭐야 쟨. 연기 되게 못하네. 아 돈 아까워. 여긴 의자가 뭐 이래? 무슨 냄새야. 저기요 머리 좀 치워 주실래요? 재미없어. 등등등.
늦게 들어오는 관객(배우)는 당연히 허리를 굽히고 비척비척 들어와 끄트머리 자리에 앉는다.
배우(관객)는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여자, 남자 각양 각색이다. 진한 애정행각을 나누는 커플도 있고, 팝콘이나 음료수를 까 먹는 사람도 있다, 늙은 배우(관객)은 헛기침을 험험 하면서 젊은 커플에게 주의를 주기도 한다.
배우들의 대사는 정확한 타이밍이 정해져 있지 않다. 관객(배우)들의 행동과 말에 따라 조금씩 에드립을 줄 수도 있다. 연극을 리드하는 배우가 특정한 포즈, 예를 들어 손가락질 같은 걸 할때마다 동시에 왁자지껄하게 웃어제끼기도 한다.
연극이 중반쯤 진행되면 슬슬 한 두명씩 퇴장하기 시작한다. 배우(혹은 관객)이 퇴장 할수도 있고 관객(혹은 배우)가 퇴장 할수도 있다. 퇴장한 배우(혹은 관객)는 강력하게 환불을 요구하다 관계자와 드잡이질을 한다. 연극적인 상황이지만 실제의 상황일 수도 있다. 관계자는 배우 일 수도 있고 실제의 관계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시나리오 형식에 맞춰서 써 내느냐다. 가능 할 것 같기도 하고 불가능 할 것 같기도 하다. 진심으로 이딴 시나리오를 쓸 계획이냐고? 농담일 수도 있고, 진담일 수도 있다.
#. 2
L은 제법 다부진 몸매에 적당한 키, 게다가 오늘자 뉴스에 따르면 무려 세계 100위권에 들어가는 좋은 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성실하기까지 한데다 타고난 포커페이스에 과묵한 편이라 주위에서는 진중하다는 평을 듣는다. 녀석은 건방지게도 이목구비까지 제법 수려한 편인데 약간 길게 찢어진 눈에 아래 위가 감춰지는 커다란 눈동자가 매력 포인트다.
꼭 고양이 같은 눈이다.
근데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녀석은 나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뭔가 안 하던 짓, 책을 읽는다던가, 하면 녀석은 빤히 내 동태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시선이 하도 따가워서 고개를 돌려보면 마치 결백하다는 듯이 자기도 휙 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런 느낌이랄까..
꼭 관심 없는 척 하고 멀치감치서 털 손질하는 척 지켜보는 페르시안 고양이 같다.
한번은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가늘고 길고 고양이처럼 예쁜 눈으로 호기심의 시선을 던지는 거다. 고개를 돌리니까 눈이 마주칠세라 휙 하고 고개를 돌린다. 왠지 녀석의 관심을 끌고 싶어져서 다시 과도한 손동작으로 뭔가를 끄적거리는 척 했다. 근데 왠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거다. 문득 직감이 왔다. 이 자식, 참고 있다.
그건 일종의 경쟁이었다. 관심을 끌기위한 나의 시도와 관심 없는 척 하는 L의 노력. 나는 괜히 부스럭 거려 보기도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L의 저항은 완강했다.
급기야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빤짝거리는 초록색 레이져가 나오는 펜. 펜을 꺼내들고 몇번 빤짝거렸을 뿐인데 슬슬 입질이 온다. 내 쪽으로 고양이 눈을 돌리는 L. 나의 득의만만한 미소. 패배감과 당혹감에 미묘하게 무너지는 L의 포커페이스.
그건 뭐랄까. 일종의 쾌감.
나는 L을 적극적으로 길들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데 역시나 녀석은 예의 그 눈빛으로 나를 몰래 주시하기 시작한다. 잘됐다. 마침 조용한게 사람도 없다. 나는 한 손으로 끄적이는 걸 계속 하면서 L의 자리 너머 반대편으로 캡 모자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모자를 주워오는 녀석. 나는 홀스 캔디를 하나 꺼내서 녀석에 손바닥에 떨어뜨린다.
사탕을 우물거리면서 그제야 지 할일을 하기 시작하는 L. 정말 길들여진 걸까 아니면 그냥 말문이 막힌걸까. 어쨌거나 역시 포커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