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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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 - 두려움과 설레임 사이에서 길을 찾다
가야마 리카 지음, 이윤정 옮김 / 예문 / 2009년 10월
평점 :
#. 1
유구한 인간의 역사에서 결혼이라는 인간 결합의 형식이 나타난 것은 불과 수천 년 전. 그것은 국가 탄생의 부산물이었으며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다. 그래서 결혼은 국가에게 편익을 주었으되 대신 인간의 자유를 갉아먹는 것이다. 도대체 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는 이 제도 속에서 여성은 소외되고 연대는 제한됐다. 반면 교과서에서 말하는 결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란 ‘사회 성원의 재생산’, ‘교육’, ‘성적 만족’, ‘심리적 안정’같은 것들 따위인데, 과연 그런 것들이 단지 ‘결혼’이란 틀 위에서만 성립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 2
어느날 노인네가 그랬다. “미잘아, 앞으로는 결혼할 여자보다 남자가 많기 때문에 먼저 찍어 두는 게 중요하다. 나는 다 필요 없고 그냥 착하면 되니까 얼른 하나 데려와라.” 노인네는 열 세살 이후로 처음 내 인생에 대해 코치를 시도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아마 대부분의 20대 중 후반 이후 미혼자들의 대부분은 나처럼 결혼에 대한 유 무형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릴 거다. 때로는 가족과 지인들의 압박이고 또 때로는 미디어의 압박이다. 미디어는 환상을 만들고 지인들은 매뉴얼을 늘어놓는다.
솔직하게 말하자. BGM으로 All by my self가 흘러나오는 작은 방 안의 브릿짓 존슨의 고독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이성이 거들떠도 안 보는 나이가 되어 문득 결혼과 내 아이에 대한 열정이 돌아오는 상상은 일종의 공포가 아닌가. 저자의 말 대로 결혼 한 여자가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 대해 우월한 듯 꾸며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불확정성에 대한 상대적 자신감 때문일거다.
이런 세상에서 결혼 혐오자로 남는 것은 지난한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일이다. 사회적 흐름에 반하는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은 고통이다. 요컨대 독신자로 평생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미혼자들이 각각 다른 생각의 경로를 통해 결국 모이는 곳은 ‘결혼에 대한 희망’이라는 지점이다. 내 경우에도 그 빈곤한 상상력과 용기 없음의 자리를 메꾼 것은 바로 화목한 가정의 판타지였다.
#. 3
저자, 가야마리카는 이 지점에 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논의는 단순히 결혼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고 매뉴얼을 제공하는 차원은 아니다. 욘사마에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들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왜 가정에 만족하지 못하는 결혼이 발생하는지 설명하고, 미디어가 제공하는 환상의 어줍잖음에 대해서도, 심지어 쓰쓰미 마치코의 ‘주부도 전업 매춘부나 마찬가지다’라는 전설적인 주장까지 소개하며 결혼에 대한 비판적 의견들을 우선적으로 추렴한 후 그 위에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균형있는 시선이다. 물론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긍정하며, 결혼은 사랑이 전부다라는 다소 맥빠지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이 허술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결혼에 대한 고민거리들은 그 폭에 있어서도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한다. ‘자신의 문제’, ‘부모의 문제’, ‘여성의 문제’, ‘국가 정책의 문제’. 그것은 결혼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기회가 없던 미혼자들에게 알찬 생각의 거리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난해한 학술서적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에세이의 범주에서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미덕을 갖췄다. 저자가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정신과 의사로서 당면했던 특정한 사례를 바탕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인데 예를 들면 왜 결혼시장에서 커리어 우먼이 외면 당하는가, 결혼보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모를 의존하는 어느 딸의 심리 분석, 저출산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과 그 반론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결혼을 둘러싼 짤막한 에피소드들과 그에 대한 영리한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책장은 어렵잖게 넘어간다.
#. 4
나는 관념어를 믿지 않는다. 이즘도, 정신도 유물唯物의 변두리에 기생하는 곰팡이쯤 취급한다. 결혼의 주변적인 것들을 멀리하고 사람과 사랑과 결혼 그 자체를 보자는 책의 결론은 그래서 탐탁잖다. 사랑이란 작은 단어 속에 관계하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현상을 쑤셔 담을 수 있을까? 어려울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논의가 모두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비판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결혼관을 세우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책이란 정답을 제시하는 계산기가 아니라도 방향을 찾는 나침반은 되는 물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괜찮은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