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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죄 드러내고 껍질만 남은 도시는 차라리 속도 없는 도시만 못하다. 스무살에 혼자 걸었던 태백이 그랬다. 폐광 특유의 황량함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종점이라 방도가 없었다.

 

진과스에는 작은 마을에 박물관 하나뿐이었다. 저녁에 미처 닫지 않은 상점들 몇 군데만 소소한 빛을 보태고 있었다.

 

뭐,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10분 거리의 지우펀으로 올라갔다. 노출을 길게 맞춰 빛을 포집했다

 

그거 아세요? 지우펀의 별은 지면으로부터 떠오른다




 

뭐 걍 야경. 멀리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이 인상적이다. 저 곳이 구름이 생겨나는 장소일까? 

 

미아자키 하야오는 지우펀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프를 얻었는데 (지브리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럴듯한 신비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 유명한 지우펀의 홍등거리.  


 이 사진을 보여줬을 때 루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점 거리는 걍 그랬지만, 야경은!  





우리는 길을 거슬러 다시 진과스로 내려왔다. 여기에서 버스를 타면 스린까지 앉아서 갈 수 있기 때문. 버스 시간이 조금 남아서 '화보'를 찍기로; 했다. 신은 내게 더 나은 미모를 주시고 왜 촬영기술까지 주셨는가. 이딴 잡기술이나마 루리에게 주는 게 공평했을 텐데. 

 

이것이 내 사진이 없는 이유. 

DSLR로는 셀카를 찍지 못해 슬픈 짐승이여. 



 

 

루리는 오로라 공주처럼 찍어내라고 강요했고, 나는 인간이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한편으로는 후환을 만들기 싫어 최선을 다했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을 보여줬을 때, 루리는 주먹을 세게 부딪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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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4-09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집니다. 신은 정녕 말미잘 님에게만 전능을 주신 겁니까? ㅎㅎ 지상에서 솟아나는 별무리를 보러 지우펀으로 가고 있는 저를 상상해보며 ^^

뷰리풀말미잘 2017-04-09 18:24   좋아요 1 | URL
정말 신도 참! 히히.

야경 좋다는 곳 제법 가 봤지만 진과스, 지우펀의 야경은 유독 아름다웠어요. 홍등거리가 생각보다 별로라고(너무 관광지라고)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관광책자에 예쁘게 꾸며진 것만 기대하고 가서 그런듯 합니다. 거리에서 살짝 빠져나와서 야경만 감상해도 아쉽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김근태의 기일이었다. 그의 몫으로 와인 한 잔을 더 시켰다.

 

오년이 되었지만, 그리움은 그치지도 않는다. 요즘은 더 그런 것 같다.

 

그는 나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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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요일에 가을은 불현듯 쳐들어왔다. 새파란 하늘이 거짓말 같았다.   





#. 2


일요일엔 강변북로를 달리다 무지개를 만났다. 컸다. 얼마나 컸냐면, 그런 규모의 어떤 것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색이 꽉 차서 그 쪽으로 계속 엑셀을 밟으면 언젠가 부딪힐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급하게 강변 공원에 차를 대고 핸드폰 카메라를 꺼냈다. 1/2.3인치 센서로는 일부도 담을 수 없었다. 다행히 파노라마 모드를 생각해 냈다. 


옆에서 하늘을 보고 있던 어느 한남이 “오 신이시여!”라고 외쳤다. 


이건 뭐,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 3


돌아오는 길에 해가 내렸다. 뿜어져 나온 빛이 산란해 하늘을 귤색으로 물들였다. 셔터 한번 누르고 스마트폰을 조수석에 집어던졌다. 차라리 그 시간에 눈으로 더 볼걸 그랬다.    





#. 4


오늘 낮에는 한강을 산책했다. 줄창 흐르는 강도, 낮게 엄습하는 구름도, 소슬한 바람도 다 좋은 날씨였다. 





#. 5


회사 근처로 돌아오니 또 색이 달랐다. 


가을에 며칠, 하늘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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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8-3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롯데빌딩이
소생의 아내가 겨털 뽑을 때 쓰는 족집게모양과 너무 흡사해서 순간 깜짝 놀랐어요 오호호호
쓸데없는 소리 지껄여서 죄송해요 ㅜㅜ

뷰리풀말미잘 2016-08-30 22:59   좋아요 0 | URL
저는 늘 이쑤시개 같다고 생각했어요. 항간에 뜬소문으로 어느 점쟁이가 신격호 회장이 백수하려면 큰 빌딩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짓는 거라는데, 어쩐지 남근을 닮은데가 있는 것도 같고. 게다가 잠실은 사실 물을 막아 만든 동네라 풍수적으로다가 음양의 조화가.. 흠흠.. 쓸데없는 소리라면 이 정돈 되야죠.
 


 


 

노보리베츠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온천 휴양지다. 홋카이도 최남부 하코다테에서 기차로 세시간 쯤 걸린다.

 

그 날, 대서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동진하고 있었다. 열도 서부의 피해는 막대했다. 뉴스마다 현장에 나간 기상 캐스터들의 머리가 미역처럼 날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는 료칸에서 온천과, 늦잠과, 산책을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도시는 한산했다. 거주지는 제법 밀집되어 있었으나 인적이 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부동산 호황을 싹 따라마시고 남은 거품의 흔적이다. 우리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잠시 걷다가 돌아왔다. 마침 폭풍이 닥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역사에서 루리는 어슬렁 거리는 곰을 발견했다. 둘은 어깨가 스치는 순간 상대를 알아 본 듯 했다. 곰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오른 발톱을 치켜들었고, 루리는 크랩 스타일로 상단 가드를 올리고 턱을 노렸다. 승부는 찰라에 가려졌다. 루리가 쇄도하는 순간 곰의 레프트 블로우가 치명적인 예각을 그렸고 루리는 송곳같은 어퍼를 찔러 넣었..   

 

 

 

 

 

..친해졌다. (어쩐지 곰은 조금 주눅이 든 표정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온천 마을로 이동했다. 


바람이 불자 까마귀떼가 그악스럽게 하늘을 뒤덮었다. 오, 지옥 입구에 걸맞는 풍경이다.

 

 

 

 

 

온천 마을이야 말로 노보리베츠 상업의 핵심지역인데, 상점들은 휴업이나 다름없어서 방문하기도 민구스러울 지경이었다우리는 을씨년스러운 번화가를 걷다가 아무 라멘집이나 들어갔다. 스킨헤드가 반들반들한 점장이 매우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으나, 별 다른 선택권이 있지도 않았다. 메뉴도 그랬다

 

 


 

 

난해한 메뉴판을 뒤져 '지옥유황라멘'을 시키는 나의 표정은 굳어있었으리라.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료칸에 짐을 풀고 지옥계곡으로 갔다. 걸어서 10여분, 태풍의 거친 결이 계곡 한복판을 비비고 지나갔다. 유황 냄새가 싸하게 풍겼다.

 

료칸에서 빌려온 우산이 두 개나 작살이 났다. 나중에 지배인에게 이실직고를 하자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를 더 내준다. 흥, 제법 친절한 척 하는군, 니혼진.  

 

 

 

 

 

 

이 길의 끝에서 간헐천이 끓고 있었다. 달걀을 넣으면 바로 삶아지는 온도다. 그렇게 삶은 달걀이 편의점에 흔하게 굴러다녔다. 그걸 온센 타마고 (온천 달걀)라고 하는데 맛이 여간 비범한 게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온센 타마고 몇 알어포, 밀크푸딩 같은 주전부리를 사 들고 료칸으로 돌아왔다.

 

 

 


 약속한 시간이었고기모노를 입은 언니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료칸, 기요미즈데라의 음식은 미식가들 사이에 제법 알려진 모양이다. 캐비어를 얹은 두부, 굴 조림, 초밥, 연근, 토란에, 증기로 쪄낸 연어구이, 참치회, 도미회, 각종 절임채소와 그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소담스러웠다.

 

양고기가 푸짐하게 든 나베가 끓는 것을 기다리며 사케로 입술을 적셨다. 오! 내장이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루리는 이미 머리 위로 잔을 흔들고 있었다.




음식은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세심하게 만져서 맛을 만드는 것이 느껴진다절여진 채소의 간이 덜 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우메보시의 향이 살았다.




나베 국물은 맑고 진했다. 비리고 누린 맛이 없었다.



 

 

연어, 버섯, 밤, 은행.

 

 


 

 

두부두부.

 

 

 

 

 

루리루리.

 

식사를 하고, 루리는 온천을 갔고, 나는 다시 지옥계곡으로 나왔다. 태풍이 노보리베츠를 완전히 영향권에 가둔 시점이었다.

 


 

 

 

펄펄 끓는 유황천의 매캐한 온기와, 비바람에 섞인 돌 모래와, 숲으로 숨어든 까마귀의 향연 사이로 어두워 가는 지옥계곡을 걸었다. 우산은 없어도 그만이었고, 나는 밤 도깨비 같았다.

 

 

 

 

 

돌아왔을때 루리는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단정하게 앉아 적당한 온도로 적당한 시간 우려낸 차의 색을 감상하고, 향을 즐기고, 차를 머금은 혀 끝으로 맑고 떫은 맛을 즐기고, 목으로 따뜻하게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느끼고, "감로와 같습니다."라고 감상을 토설하는 것이 차를 마시는 바른 방법이다.  

 


 

 

음..

 

-감로와..

 

-크!!!

 

 

 

 

 

-마셔 마셔!! 

 

-.... 

 

 

 

 

 

-섞어!!! 

 

-.........;


노곤노곤해지도록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유있게 노보리베츠를 떠났다. 다 쓰지 못했지만,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여럿이다. 우리를 정류소까지 차로 마중해준 지배인, 길을 묻자 차에서 내려 지도판으로 우리를 데려가 길을 설명해 준 버스 운전사. 길을 물으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 일쑤인 착한 일본인들. 덕분에 구경 잘 했다.

 

다행히 기차는 연착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른 시간에 신치토세 공항 모퉁이에 앉아서 아직 먹빛이 가시지 않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았지? 


-좋았어. 

 

 

 

 

 

인천에 도착해서도 루리 머리칼에서는 부드러운 유황 냄새가 났다.

 

늘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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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하코다테 항구에서 루리는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푸른 해원의 기척을 피부로 감지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뭐해? 


-기다려.


-누구?  


-바다로 나간 남편. 


-..어.




루리가 오른손에 든 옥수수로 말할 것 같으면, 홋카이도 산 옥수수. 익히지도 않은게 설탕처럼 달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식량자급률이 200%를 넘는 지역이다. 국토의 80%가량이 산지인 일본에서는 드문 옥토다. 비옥한 땅과 부지런한 사람들이 얻어낸 결실일까. 루리는 옥수수 세 알을 하사했다. 


 


햇살 사이로 전차가 다닌다. 




오오누마 코엔으로 가는 길. 다시, 특급 호쿠토. 




레일 양 편으로는 이런 예쁘고 여유 넘치는 동네가 흩어져 있었다. 나서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지붕들. 그 위로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시선은 걸림 없이 지평선에 닫는다. 




오오누마 코엔역은 '설국'이나 '철도원'에 나올법한 작고 예쁜 시골 기차역이다. 기차는 1시간이나 두 시간 쯤의 텀으로 드문드문 지나갔다. 




우리는 이곳이 핫스팟임을 직감했고, 찍고자 하는 자와 찍히고자 하는 자의 몸부림이 약 20여분간 이어졌다.     




팔.. 부러진거니? 




자전거를 빌려 호수길을 달렸다.




1시간에 천엔이었던가 저렴한 요금은 아니었다. 너무도 상쾌한 바람과, 미칠듯한 체력 덕분에 30분 만에 15km를 달렸다.


-아, 이제 30분 만에 돌아가지 않으면 요금이 두배네.


-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하코다테 에키벤. 청어 스페셜. 880엔.


맛은 뭐 그냥 뭐.  








시리게 맑았다. 모국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곳에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리야, 모델J가 가르쳐준 사진 잘 나오는 방법이 있어.


-뭔데?


-중요한 건 시선이야. 


-어떻게? 


-지그시 어깨의 끝을 내려다 봐. 


-이렇게? 


-좀 더 내면의 페이소스를 끌어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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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 포스팅은 여행전문가 김늘보의 후원과 조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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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2-0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센스 대박.

ㅎㅎㅎㅎㅎㅎㅎ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식량자급률이 200%를 넘는 지역˝
˝나서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이 문장들 앞에선 공연히 끄덕끄덕.

잘 보고, 잘 읽고

조니 부러워하다 나감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3   좋아요 0 | URL
히히. 한수철님과 더불어 고즈넉한 홋카이도의 시골길을 막 달려보고 싶네요. 막.

2016-02-0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뇨리따 2016-02-02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말미잘님도 사실 매를 버는 스타일이신거죠? 이렇게 예쁘게 찍고 그렇게 훌륭한 필력을 가졌으면서, 팔... 부러진거니? 이 포스팅 후 행여 말미잘님 팔은 괜찮으신가요?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0   좋아요 0 | URL
제가 또 소신 있는 성격이라 할 말은 하는 편이라고 할까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상소 깨나 올렸을겁니다.

Mephistopheles 2016-02-0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만봐도 여행 끝나고 말마질님 등짝은 루리님의 시뻘건 손자국이 군데군데 나있을 것 같은데...

뷰리풀말미잘 2016-02-02 10:02   좋아요 0 | URL
루리가 귀엽게 손바닥 같은 걸 사용할까요?

Mephistopheles 2016-02-02 10:19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지금 병원에서...손가락 하나로 자판을 치고 있다는.....

뷰리풀말미잘 2016-02-05 16:19   좋아요 0 | URL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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