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심장이 발작적으로 피를 짜 온 몸으로 퍼트린다. 맥박이 무서울 정도로 커다랗게 들린다. 최대치로 긴장한 허벅지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호흡이 뒤엉켜 입이 열리고, 열린 입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 아무리 숨을 몰아쉬어도 가슴은 짜부러 지는 것처럼 갑갑하다. 온 신경이 피아노 줄처럼 팽팽해지는데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칼이 자꾸만 눈을 찌른다.
유혹은 달콤하다. 멈추는 순간 이 모든 고통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니까. 그래서 그 순간 무릎을 들어올리게 만드는 건 육체의 작용이 아니라 정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오기와 자존심, 혹은 당면한 현실에 대한 책임감 그런 것들이 러너의 호흡을 쥐어짜낸다.
언젠가 황영조는 인터뷰에서 훈련 중에 여러 번 자살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왜 차라리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었을까. 찰라, 그의 자존심은 육체의 한계를 부정했고, 극한에 몰린 육체는 신경계의 컨트롤을 거부했을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 벌어진 이 카오스는 그의 몸은 우주의 일반적 특성과 무한히 닮아가도록 몰아붙인다. 엔트로피의 무차별적인 확산. 오온의 이산. 혹은 주화입마. 그 통제 불가능의 상태에서 그는 죽음으로 내달렸으리라.
마주 달려오는 차가 없었을 뿐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만약 그 순간 이를 악물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꽤 많이 달라져 있을거다.
6분 16초. 기록이라기에도 뭣한 기록이지만, 나는 그걸 아직도 기억한다.
#. 2
2시간19분15초. 1990년, 스무 살의 나이로 데뷔한 전국체전에서 이봉주가 세운 기록이었다. 2위의 기록이였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주목받기엔 조금 모자라는 기록이었다. 하긴, 그만한 기록에 도달하고도 쓸쓸히 육상계를 떠나는 선수는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절치부심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93년 호놀룰루 마라톤에서 2시간13분16초의 기록으로 첫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때야 비로소 언론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프로 선수 이봉주로서는 한 숨 돌린 셈이었다. 기록은 2시간13분16초. 가까스로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린 셈이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그의 옆자리, 황영조라는 거인이었으니까. 그의 마라톤 인생 초반부의 주제는 단연 황영조의 극복이었다.
황영조는 이봉주와 70년생 동갑내기로 5000m, 10000m 국가대표 시절부터 트랙을 함께 달렸다. 황영조가 고등부10000m에서 세운 29분 31초의 기록을 세우며 일찍부터 주목받았던 것에 비해. 이봉주는 이렇다 할 이력이 없었다. 2005년까지 깨지지 않았던 황영조의 10000m 29분 31초의 벽은 이봉주에게 난공 불락의 성이나 다름없었다. 황영조, 장거리에서 독보적인 커리어를 세운 이 육상계의 아마데우스는 어느 새 마라톤 무대로 영역을 넓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예상을 뒤엎은 역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나는 아직도 몬주익 언덕을 기억한다. 코스는 최악의 오르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 지구력이 좋던 일본 선수 모리시타는 마지막 관문 몬주익 언덕까지 늑대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걸어 올라가기도 벅차게 보이는 그 언덕길에서 황영조는 오히려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등 뒤를 추격하던 모리시타와 격차는 그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최후의 투혼을 불사르며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쓰러져 오래 일어나지 못했다. 스타디움에서 전광판으로 그의 역주를 지켜보던 손기정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국 육상사상 최대의 명장면이었다. 그날 황영조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 냈을 뿐 아니라 한국 육상계가 가지고 있던 역사적 트라우마를 해체했다.
이후에도 황영조는 94년 보스턴 마라톤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갔다. 그 그늘에서 이봉주는 늘 모차르트를 쫒는 살리에르처럼 취급당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황영조의 독주는 96년에 위기를 겪었다. 그해 그의 기록은 전에 없이 부진했는데 그는 어쩐 일인지 그 부진을 극복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포기했다. 훗날 황영조는 말한다. “솔직히 더 뛸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딸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과 아시아 경기대회 금메달 한국 최고기록등 모든 걸 이뤘다. 더 뛸 의미가 없었다. 운동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는게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었다.
언론은 96년 이봉주의 올림픽 출전이 정해졌을때 단지 황영조의 빈 자리를 꿰어찼을 뿐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래서 애틀랜타의 30도 가까운 폭염을 헤치고 2위를 차지한 그의 '은메달'은 92년의 황영조의 ‘금메달’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그로서도 개운찮은 날들이었을 거다.
이봉주를 생각하면 늘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봉주가 자신 앞의 웅덩이를 다 채운 건 이제는 노회하지 않았냐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던 98년 무렵이 되어서였다. 그의 나이는 이미 스물여덟, 육상선수로서는 황혼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금줄이 쳐져 있는 것 같던 2시간 7분의 벽을 보란듯 뛰어넘으며 평생을 헤메던 황영조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물줄기였다.
사람들의 예상을 연파하며 30대 초반의 이봉주는 거침없이 달려댔다. 30이 되던 해. 그는 도쿄에서 지금까지 한국기록으로 남아있는 2시간7분20초의 대기록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1년 후 세계 3대 마라톤 중 하나라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또 1년 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이름은 전광판의 가장 윗줄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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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도 언제까지나 건재할 수는 없었다. 그 무렵 그는 어느 대회에서인가 무릎에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고 경기를 포기한 적이 있다. 원래 무릎관절, 특히 충격을 완화시키는 연골은 사용하면 할 수록 소모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시점에 이봉주는 이미 선수로서 그 육체에 허락된 모든 하드웨어를 소진 한 후였다. 그대로라면 훗날 정상적인 생활에서도 무리가 갈게 뻔한 일이었다. 그는 주춤했고, 그러는 사이 그의 몇 되지 않던 경쟁자는 상당한 숫자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은퇴선언을 하지 않고 젊은 시절처럼 죽을둥살둥 달렸다. 새로 등장한 아프리카의 젊고 강한 철각들은 노회한 제왕의 권좌를 무섭게 위협했다. 그의 입지는 매해 줄어들었고 순위에 들지 못하는 경기가 그렇지 않은 경기보다 훨씬 많아 졌다. 나는 나의 영웅이 비참해 지는것을 보는게 어려웠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라톤을 보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그냥 차라리 메달과 멀찌감치 떨어진 기록을 바랬다. 그 무릎이 더 상하기 전에 빨리 은퇴할 수 있게. 하지만 그는 베이징에서 14위라는 어중간한 등수를 기록한다. 그의 의지를 익히 아는 팬으로서는 절망적인 일이었다. 그 정도로 그는 은퇴를 생각할 위인이 아니니까.
기어이 그는 2008년에도 올림픽에 출전했다. 예상대로 패기등등한 아프리카의 젊은 선수들이 하이에나처럼 이봉주를 물어뜯었다. 이봉주는 서서히 페이스를 잃으며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그것이 한계였다. 28위. 서른 여덟 살, 서른여섯 번째 풀 코스 완주였다. 끝까지 그를 응원하던 팬들도 이제는 그를 마음에 담을 준비를 했다.
#. 3
이봉주를 만난 적이 있다. 97년 춘천국제마라톤으로 기억한다. 그는 덤덤했다. 조금 있으면 처절하게 2시간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사람이 저렇게 덤덤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깊이가 아득했다.
왠일로 그날 이봉주는 순위에 들지 못했다. 경기를 마친 그는 소처럼 무던한 얼굴로 퇴장했다. 나는 97년 춘천국제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의 웃는 얼굴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그들 중 현역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봉주는 순간의 기복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저 몬주익의 영웅이 갖지 못한 유일한 덕목이었다.
육상에서 한 인간이 20년간 세계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소름끼칠정도의 평정심과 빈틈없는 자기관리, 죽음을 기억할 만큼 괴로운 훈련을 20년간 지속할 수 있다는 건 거의 구도자의 멘털리티에 가깝다고 본다. 베이징에서도 이봉주는 억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제 힘이 딸리고 스피드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데도 그는 97년 그 때처럼 그냥 덤덤했다.
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이후로 다섯번의 풀 코스를 더 뛰었다. 기록은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2009년 10월 21일, 정확히 20년 전 스무살에 그가 데뷔했던 전국체전이었다. 마흔 한번째 풀코스 경주를 뛰는 불혹의 이봉주는 그날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그가 몇 등을 하던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팬들이 한 마음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전설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그날 그의 기록은 2시간 15분 25초.
그가 결승점을 통과할 때, 그의 앞에는 기적처럼 단, 한명의 선수도 없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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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봉주의 승리를 떠올릴때마다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그는 짝발이다. 양쪽 발의 사이즈가 서로 다른 기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