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전면개정판) -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조지 리처 지음, 김종덕 옮김 / 시유시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1

작년 겨울이었다. 오랜 친구 하나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구조대는 반파된 차에서 녀석을 꺼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내 친구를 구한 것은 긴급한 응급조치와 빠른 후송, 그리고 지체 없이 이어진 수술이었다. 결국 그는 목숨을 보전했고 지금은 거의 완전하게 건강을 회복했다.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이야기다. 만약 구조대가 10분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혹 수술이 얼마라도 지체되었더라면 내 친구는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 할 수도 있었던 노릇이었다. 이 사례는 분명 효율성의 승리로 기록될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충분히 느린 속도로 차를 몰았더라면 애초에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과연 무엇이 내 친구를 사고로 몰아갔는가 하는 의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던져보면 그 최종적 용의선상에도 분명 효율성이라는 단어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막스베버는 사회가 분업화되고 구조가 복잡성을 띠면서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용어로 통찰했다. 이러한 근대적 합리성은 ‘관료제’를 탄생시켰고 관료제는 적어도 70년대까지 세상의 모든 조직을 지배했다. 책의 저자 조지리처는 베버의 적자로 그가 주장하는 ‘맥도날드화’는 근대적 합리성과 관료제의 최신 버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맥도날드화'를 돋보기처럼 들이대고 병든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 2
 
주문한지 3분 만에 포장된 햄버거 세트가 나온다. 쟁반에 가지런히 담긴 햄버거, 감자튀김, 콜라, 캐첩, 스트로우, 티슈를 들고 가까운 창가자리에 앉는다. 흘러나오는 빠른 비트의 음악을 들으며 햄버거를 완전히 해치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사실 그 이상 천천히 먹고 싶어도 자리가 불편하다. 나와 거의 동시에 옆자리에 궁둥이를 들이 밀었던 사람은 벌써 다 먹고 나간지 오래다. 가게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손님이 몰려들어 내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고 있다.

이 재빠름, 이 효율성이 언제부터인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말도 필요 없고 어정쩡한 제스츄어도 필요 없다. 단지 이것. 한 마디와 크레딧 카드 한 장이면 우리는 놀이공원에서 짜릿한 스릴을 구입할 수 있고, 예쁜 여성과 섹스를 구입할 수 있다. 뿐 만이냐 옮긴이의 말처럼 의료, 영화, 스포츠, 쇼핑, 마케팅, 출생, 죽음, 심지어 죽음 이후의 영역에까지 효율성은 달콤한 사탕가루처럼 묻어있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맥도날드화이며 그 대가로 우리가 바쳐할 것이 다름 아닌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맥도날드엔 손맛이 없고, 놀이공원엔 리스크가 없으며, 예쁜 여자는 사랑이 없다. 인터넷 쇼핑은 에누리가 없고, 컴퓨터 경마에는 말발굽에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냄새가 없다. 보람 상조에 월 3만원씩 내면 죽음의 순간 오물로 화한 내 육신은 깔끔하고 빠르게 수습되겠지만, 그 직원들이 진정으로 슬퍼하고 눈물 흘려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처럼 맥도날드화가 자랑하는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종업원, 고객, 제품에 대한 완벽한 통제는 어느 순간 이 합리적인 불합리에 직면한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우슈비츠. 보라, 유대인들을 빠르고 쉽게 살해하기 위해 거대한 소각장을 건설한 효율적 마인드, 개체수를 조절해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는 계산가능성, 일단 들어온 자들은 100% 소각된다는 예측가능성. 이 일련의 과정이 나치라는 ‘고객’의 의뢰를 의해, 교도관이라는 ‘종업원’들의 작업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물론 그 생산물이란 앙상한채로 죽은 유태인이라는 ‘제품’.  

리처는 이러한 맥도날드화의 내재적 한계가 역사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고등교육은 육류처리를 닮아가고 있으며, 의료시스템에서 환자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맥도날드화에 대한 대응’을 다루고 있는 10장에서 노골적인 어법으로 맥도날드화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고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바램을 드러낸다. 그가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딜런 토마스의 시구는 자못 비장하다. 

"그 깊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빛의 소멸에 분노, 또 분노하라"   

#. 3

흑인 마을에 간 어느 백인 선교사가 커다란 지옥도를 걸어놓고 흑인들을 겁박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지리라. 그림을 본 흑인들은 겁에 질려 흩어졌다. 그러나 웬걸? 다음주 주일에 교회에 모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하며 연유를 묻는 백인 선교사에게 흑인 하나가 그랬단다.

“그림에서 지옥에 간 사람들은 모두 백인뿐이더군요.”

지금 여기에서 맥도날드화란 어떤 의미일까? 정말 그것이 악마와의 계약일까? 최소한 나는 악마적 맥도날드화를 피부로 체감하기 어렵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는 맥도날드가 생겼다가도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고,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동네 밥집은 메뉴 하나 늘지 않지만 점포의 크기는 두 배로 늘었다. 비근한 예지만 내가 자주 가는 병원의 의사는 늘 친절하며, 우리 동네 슈퍼에서는 ‘씨즐리언’도, ‘유대인 베이컨’도 팔지 않는다. 이건 그의 분석틀이 지역적 국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조지 리처의 염려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불안이 지나치게 맥도날드화의 어두운 면만 부각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의심해 볼 여지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맥도날드화의 선례를 찾아볼까? 내가 생각하기에 현대인들의 수명이 이전과 비교해 월등하게 늘어난 이유도 맥도날드화 즉, 효율성의 극대화가 이뤄낸 성과다. 그 중심에는 의료와 행정과 서비스를 통합한 신식 병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리처가 병원 서비스를 맥도날드화의 부작용으로 평가절하 하게 된 이유는 미국의 후진 의료서비스 체계에 있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조지 리처가 염려하는 많은 부분들은 ‘맥도날드화’의 부작용이라기 보다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풍토병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는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저서와 자료들을 가지고 좌충우돌하지만 그 조차도 대부분은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리처의 현실인식 보다는 마지막 장에서 소개하는 맥도날드화에 대한 대안 부분이 더 재미있다. 마트에 대항하는 식품협동조합, 주립 대학에 대항하는 소규모 대학들, 베스킨라빈스에 대항하는 수제 아이스크림, 반 노동자적 포디즘에 대항하는 스웨덴의 샤브나 볼보 같은 자동차 기업들. 또 개인적 차원의 대응 모색까지.. 이러한 글쓴이의 탐구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답기 원하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4

베버의 시대는 암울했다. 산업혁명과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식인은 낮선 모든 현상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조지 리처는 막스 베버의 적자. 그래서 세상을 독해하는 그의 눈빛도 베버의 예민한 눈빛을 닮았다. 그래서 그의 분석은 지나친 시니시즘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러한 불완전한 구석이 있더라도 세상을 읽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과는 눈부시다. 

맥도날드화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인간의 역사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며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왔고, 때로는 어리석게 퇴보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명석한 길을 찾아 진보하기도 했다. 맥도날드화란 과거 어느 시점에 취한 선택의 결과이며 또 다른 선택의 기로이리라.

전태일은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당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스스로 자신의 심장에 불을 당겼다. 그는 온 몸으로 맥도날드화를 거부했다. 그가 한줌 재로 스러진 이후 한국의 노동현실은 숱한 변화가 있었다. 때로는 퇴보했지만 대체로는 진보했다. 아직도 열악한 노동은 많지만 그 정도를 과거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줄어드는 노동시간과 그나마라도 늘어나는 임금, 손톱만큼씩이라도 나아지는 복지.

나는 숱한 전태일이 불을 당긴 그 진보를 믿는다. 그리고 그 치열한 투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진 지금의 역사를 신뢰한다. 내가 맥도날드화를 겁내지 않는 건, 그 역사가 달고 있는 저울추의 무게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망한다. 적어도 우리의 아이들은 효율성과 더불어 뜨끈뜨끈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임을.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rch 2009-12-1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잘 잘 읽었어요. 책 한권을 보는 것 같아요.^^ 괴물의 탄생 독서 모임할 때도 비슷한 대안이 나왔었죠.

그런데 페이퍼는 안 써요? 응?

뷰리풀말미잘 2009-12-15 11:47   좋아요 0 | URL
쓰, 쓸게요. 안 그래도 쓰고 싶은 얘기가 한참 밀렸어요. ㅎㅎ

Arch 2009-12-15 11:56   좋아요 0 | URL
나 완전 기다린다! ^^

2010-07-05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7-10 09:18   좋아요 0 | URL
별로 재미없습니다. :) 뭔가 막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지금 막 생각이 안나네요.

2010-07-1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7-12 18:52   좋아요 0 | URL
의외로 공대 출신이셨군요:) 개인적으로 이공계 출신들을 우대합니다. 샤프한 매력이 있지요. 진중권이나 박노자 김규항의 책들이 좋아요 고종석의 칼럼이나 유시민의 글도 좋구요. 위 저자들중에는 직접만나본 사람도 있고,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애정이 가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거나 다 좋은 필자이긴 하죠. 원하시는 장르인지 잘 모르겠지만 정신과 미녀 전문의 정혜신의 남자vs남자 사람vs사람 추천합니다. 인물론, 심리학, 사회과학이 파티하는것 같은 책들이에요.

봄밤 2014-07-0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생각나서 찾고 있었어요. 아, 책보다 더 좋은 리뷰를 보고가요. 그냥 갈 수 없어서 안부를 남겨요. 여름, 건강히 계셔요.

뷰리풀말미잘 2014-07-07 09:08   좋아요 0 | URL
리뷰보다 더 좋은 댓글이네요. 링크 타고 서재 구경 잘 했습니다.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또 어디서 나타났지?

봄밤 2014-07-07 19:51   좋아요 0 | URL
뷰말님의 예전글에 지내다가요. 어찌나 계속 읽고 싶게 쓰셨는지. '잘'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부족해요. 뷰리풀말미잘님의 '지금'을 기다립니다!

뷰리풀말미잘 2014-07-07 21:53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쓸 때 좀 더 열심히 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