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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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오직 즐거움. 책 고르는 기준으로 미루어 보건대 내게는 에피큐리언의 피가 흐르나보다. 예전 에피쿠로스 학파의 현자들은 쾌락을 일시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지고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 분류법은 책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는 좋은 소설이지만 두 번 읽으면 지루하다. 반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좋은 소설인데다가 두 번 읽어도 재미있다.

그걸 구분하는 기준이 뭘까? 나는 정보의 집적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유했다면 원하는 모든 책을 살 충분한 여유가 있었을 것이므로 굳이 지속적인 쾌락과 일시적 쾌락을 분류하지 않았을 테지만, 부유하지 않은 나는 적은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 하는 서민이라 또 읽어도 재미있을 만큼 정보의 집적도가 높은 책을 선호하게 된 거다. 같잖게도 내 책장에 어려워 보이는 책이 많은 이유는 단지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아마 서평단이 아니었더라면 “고등어를 부탁해”를 읽을 기회는 없었을 거다. 이건 얇고, 쉬워보이는데다가 싸지도 않다. 가난한 에피큐리언이라면 쉽게 손이 갈 만한 책은 아니다.

#. 2

‘고등어를 부탁해’는 수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이러한 때깔을 가진 글을 일러 보통 “잡문”이라 하는데 잡문이라고 마냥 녹록하게는 생각하지는 마시라. 내공과 기품을 갖춘 잡문은 장르적 권위에 안주하는 쓰레기들 보다는 몇 수 위다.

잡문이란 무엇일까? 이 분야의 권위자 아치가 인용한 미셸 투르니에에 따르면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 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의 인격이 자신을 드러내고 활짝 피어나는 것은 오직 비정상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그 사회와의 대립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잡문의 시기에는 천재성과 범죄성 사이에 불가피한 친화력이 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문학의 일종으로 보기에는 지엽말단적이며, 지나친 자유를 추구하고, 때로 명민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비정상’에 범주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에서 아우슈비츠를 연결하는 천재성, 미국으로 어학연수가는 딸내미에게 콘돔 그릇을 내미는 ‘일종의’ 범죄성 사이에서 끈적하게 감정이 이입되는 친화력을 본다. 이 잡문의 뭉텅이는 장르의 엉덩이들을 툭툭 걷어차며 활보한다. 소설이었다면 이렇게 경쾌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이 진정한 잡문인 이유는 촉수를 뻗는 범위가 워낙 전방위적이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교육자로서 그녀의 고민들은 역사와 정치, 교육과 섹스를 가리지 않고 페이지에 쓸어담는다. 이 책이 수필문학이 아니라 “인문” 분야로 분류되는 것도 그 고민의 농도가 수필이라는 얇은 접시가 감당하기엔 너무 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행간에 쌓이는 순도높은 정보의 집적. 그런 묵직한 고민들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길기만 하면 지구도 번쩍 들어올릴 수 있다던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같은 오리지날 한국 아줌마의 말빨.   

본 적 없어서 ‘자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냄새가 어떤지는 알고 있다. 그건 남국의 과일처럼 상큼한 냄새다. 그곳 베를린에는 그런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사는 가족이 있다.  

‘돈보다는 시간을, 순간의 안락함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강요와 간섭보다는 자유와 존중을’ 삶의 모토로 내 건 베테랑 건축가 겸 아줌마 그녀와, 따뜻한 물주머니와 전기담요의 환경적 가치를 비교하는 독일인 환경주의자 남편, 난독증에 스타일은 후지지만 공부도, 취직도 수월하게 해 치운 엄친아 아들과, 콘돔 사용 요령을 아빠에게 시험해 보고 싶어하는 깜찍무쌍한 딸래미. 이 불온 발랄한 가족의 삶은 그 동안 내가 봐 온 어떤 가족의 유형과도 다르고, 독특하다. 독자들은 ‘가족’에 대해서도 새로운 감수성을 쌓을 기회가 될 것이다.

어떤 페이지든 시선이 머무는대로 읽는 재미가 읽는 책이다. 가난한 에피큐리언은 흐뭇하게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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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을 꿈꾸거든 버려라
    from 날아라! 도야지 2009-11-19 14:31 
    고등어를 금하노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혜지 (푸른숲, 2009년) 상세보기 경제력과 행복지수는 비례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통계청이 발간한 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명목 GDP는 IMF 집계치 기준 9,291억 달러로 세계 15위에 올랐다고 한다. 반면 영국 신경제재단이 전세계 143개국을 대상으로 발표한 행복지수(HPI)는 68위를 차지했다. 이 행복지수의 평가항목은 경제적 요인, 자립, 형평성, 건강,..
 
 
치니 2009-11-18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재미있겠는데요. 잡문으로써 범위가 전방위적이고 그 내용이 묵직한 건 말미잘님 글도 마찬가지. :)

뷰리풀말미잘 2009-11-18 22:39   좋아요 0 | URL
호호- 치니님도 참.

2009-11-1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9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9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9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11-1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게 그런 책이었어요? 잡문인데 읽기에 좋다는거죠? 흐뭇하게 만족할만한 잡문이라니- 오옷.

뷰리풀말미잘 2009-11-19 17:56   좋아요 0 | URL
예 흐뭇하게 읽은 책입니다. ^^ 다락방님도 좋아하실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