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물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웬만한 샐러리맨 열배 정도의 돈을 벌면서 도박으로 출연료까지 압류가 들어오게 한 신정환과 몸에 걸친 명품이 4억이 넘는다고 떠벌려 화를 자초한 ‘명품녀’.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못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이 되려면 타인에게 직접적 위해나 손실을 입혀야 될 것 같은데, 둘은 어리석음으로 자신에게 치명타를 입힌 경우이기 때문에 못난 사람에 가까울 것 같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둘 다 그 지독한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돈복이 많은 행운아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 유형을 ‘복 많은 못난 사람’이라고 해두자.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로 성장해 여중생을 살해한 김길태는 어떤 사람인가? 나쁜 사람이고 동시에 못난 사람이다. 김길태에 비하면 강호순은 범행수법이 훨씬 치밀하고 잔혹해서 ‘못났다’ 보다 ‘나쁘다’는 인상이 강했다. 강호순은 그냥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하자. 이 둘에 대해 여론은 엄혹했다. ‘나쁜 사람’에 대해 여론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사회의 도덕적 감정이 살아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감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명백하게 나쁜 사람에 대해 흥분한다는 것은 그렇다는 증거로 보인다.
그러면 못난 사람, 그것도 특히 ‘복 많은 못난 사람’에 흥분하는 것은 도덕적 감정의 발로로 볼 수 있는가? 혹자는 신정환의 도박은 불법이고, 여론의 뭇매는 여기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마카오에서 익명의 재벌 2세 그룹이 하룻밤에 수십억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갔을 때 여론은 왜 그리 잠잠했을까? 익명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분노했다면 왜 익명이 실명이 되도록 조사하라고 촉구하는 여론이 조성되지 않았을까? 결국 신정환이 여론의 표적이 된 것은 도박행위 자체의 나쁨보다 집이 저당 잡히고 출연료가 압류되는 지경까지 간 못남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약자의 처지가 되니까 뭇매가 쏟아진 게 아니었을까?
‘명품녀’의 경우도 불법증여 혐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훨씬 심각한 사회적 범죄인 재벌의 불법증여가 밝혀졌을 때 여론은 그렇게 흥분했던가. 화가 난 이유가 불법증여가 아니라 명품소비 그 자체 때문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심심찮게 보도되는 연예인들의 명품소비에도 마찬가지로 흥분했던가? 결국 명품녀가 대중을 화나게 한 것은 명품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이는 ‘못난 인간’이 부모가 준 용돈으로 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장동건과 고소영의 명품이 문제가 안 되는 건 소비로 보기 때문이다. 명품녀의 명품이 문제가 되는 건 과소비로 보기 때문이다. 과소비는 못남의 문제이지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복 많은 못난 사람’에 대한 과민함과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것은 ‘조금 나쁘고 잘난 사람’에 대한 둔감함이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 지식을 이용해 갖은 부당이득을 챙기다 발각되면 변명하는 기술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여론은 지극히 관대하다. ‘나쁨’은 축소되고 심지어 나쁨이 ‘현실적 유능함’으로 은밀히 해석되기까지 한다. 이들에 대한 둔감함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비롯된 대중의 좌절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들을 닮고 싶은 욕망의 발로일까?
칸트는 도덕적 삶의 가장 큰 적을 선악과 행불행, 선악과 미추를 혼동하는 것으로 봤다. 악함보다 못남을 더 적대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다. 진정한 도덕적 감정은 표면에 나타나는 못남보다 기저에 흐르는 나쁨에 더 강한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그 나쁨이 유능한 자의 작은 나쁨이라 할지라도. 신정환과 명품녀를 질타하는 여론의 도덕적 감정은 나쁨보다 못남에 주목한다는 의심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약자의 부도덕에 특히 민감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한겨레/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