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종말 동녘선서 99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이병천 감수 / 동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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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1월 2일, 뉴욕상업거래소가 1983년 문을 연 이후 최초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언론에서는 파키스탄 부토 전 총리의 암살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세력의 봉기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사건들은 유가 급등에 있어 아마도 ‘먼지’만큼의 무게를 갖는 비중의 원인일 것이다. 조금 더 브로델 식으로 접근해보면, 유가 급등은 상이한 시간대에 걸친 역사적 진행의 중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지속적인 석유의 금융상품화와 이로 인한 투기자본의 장난, 중기지속적인 미국 달러화의 하락, 장기지속적인 세계 석유소비의 증가와 이 결과로서 석유 매장량의 고갈. 만약 이 세 요소 중 하나에서라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국제유가의 상승세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를 예측할 때 과거의 역사는 힌트를 제공한다.

우리가 “1차 석유위기”라고 부르는 1973년의 사건은 산유국들이 유가를 배럴당 2.89달러에서 갑자기 11.65달러로 올린 것을 말한다 (229). 배럴당 100달러 시대에 피부에 잘 안 와닿을 수 있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유발하였다. 특히 석유를 수입해야 했던 개발도상국가들과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해야 했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이는 재앙적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런 일, 곧 기름값이 하루 아침에 네 배나 뛰는 일이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을까? 배럴당 100달러에서 400달러로? 아마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이다. 왜? 당시 산유국들은 달러 외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달러화로 유가를 인상하였지만, 지금처럼 달러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는 상황 속에서는 유로화 같은 다른 통화를 결제 통화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242).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보다는 이 보이는 패를 갖고 딜에 나서게 되는 당사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예측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이 거대한 판짜기의 용틀임 국면을 목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 2007년 11월 17-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만에 열렸던 OPEC 정상회의에서 이란과 베네주엘라는 원유결제통화를 달러에서 다른 통화로 바꾸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2008. 3. 26. 추기: 어찌 보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임 기간 8년 동안 석유값의 등귀는 꾸준히 이루어져서 1차 석유위기의 상승폭을 달성한 셈이다. 2001년 IT 버블이 터졌을 당시, 원유의 가격은 배럴당 26달러였다. 최근 배럴당 100달러 안팎을 오르내리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부시는 8년에 걸쳐 1차 석유 위기 때처럼 원유 값을 네 배나 올려놓은 셈이다. 물론 중국의 산업화나 엄청난 투기 자금의 유입 등의 요소도 고려해야 하긴 할테지만, 참 장하다.]   

[2009. 10. 10. 추기: http://www.hani.co.kr/arti/SERIES/59/380754.html . 원유결제통화 변경에 관한 논의에 대한 유철규의 분석. 산유국들의 원유결제통화 바스켓의 설치 문제를 미-중간의 글로벌 불균형 해소 문제와 맞물린 것으로 제시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1985년의 서독과 일본처럼 중국이 미국의 뒷정리를 군소리 없이 해줄 수 있을지, 아님 미국 달러가 나락으로 급락할 지 흥미롭다. 지켜보자.]

2005년에 독일어로 출판된 이 책, 『자본주의의 종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기적인 추세로는 배럴당 100달러를 훨씬 넘어설 수도 있는 가격으로 상승한다” (224). 불과 2-3년 전에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것은 미래의 어느 날 올 수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이라니… 다소 황당해서 2005년의 유가를 찾아보았더니, 6월에는 배럴당 60달러를 돌파했고, 8월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여파로 80달러를 상회했다고 한다. 확실히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유가 급등은 그 상황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그 상황은 시간이 걸리긴 해도 허리케인에 의해 파손된 멕시코만의 정유시설들이 복원되면 정상의 상태로 내려오리라는 가정을 희망으로 갖게 하였다. 지난 2년의 시간은 그 가정이 단순한 희망이었음을 분명히 웅변하고 있다. 아마도 이 국제유가 급등은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행한 뻘짓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고 이 유가 급등세가 잠잠해질 수 있을까? “테러와의 전쟁”이 유가급등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는 앞에서 말한 중기지속적 진행과 장기지속적 진행에 대한 미국 보수파의 대응 결과이지, 그 진행 자체를 뒤집을만한 원인은 될 수 없다. 이란이 달러가 원유결제통화로 사용되는 것을 거절한다면, 대통령이 누구건 과연 미국이 전쟁이라는 패를 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가 급증세를 둘러싼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진행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책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은 이를 위한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2.
엘마 알트파터는 1970년대 서독 국가도출논쟁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거리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거리보다도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인지, 독일어로 주로 작업하는 사람들의 저작은 영어로도 잘 번역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알트파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전망 없이 부유하는 좌파들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장이 아니다. 

알트파터의 책은 페르낭 브로델의 잘 알려져있지 않은 구절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시작한다 (이 책의 14쪽에 인용되는데 번역이 별로다. 따라서 주경철이 번역한 까치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I-2』861쪽을 따른다.): “사실 나는 자본주의가 ‘내부적인’ 쇠퇴로 인해서 저절로 붕괴하리라는 예상은 전적으로 틀린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붕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격렬한 외부충격과 믿을 수 있는 대체방안이 있어야만 한다.” 브로델의 이 말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붕괴론적 가정에 대한 정면비판인 셈이다. 알트파터는 브로델의 이 진술이 어떻게 옳을 수 있는 지 설명하는 것에 이 책 한 권을 다 할애하고 있다. 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의 역사적 설명과 정치적 전망에 완전히 설득되고 말았다.

3장에서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사적 전유를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전유’appropriation는 쉽게 특정 사용가치에 대한 특정인의 소유가 새로이 확립되거나 이전되는 과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 아직 가치화되지 않은 것을 최초로 “가치화”하는 것. 자본의 본원적 축적.
2. 절대적 잉여가치의 창출.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3.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포드주의.
4. 새로운 제국주의. 박탈에 의한 축적.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데이비드 하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기계적 잉여가치’와 ‘사회적 잉여가치’라는 범주를 발명한 것을 그 범주에 상응하는 독립적 실체를 발견한 듯 하는 이진경의 주장보다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진경의 주장은 일단은 좀 미심쩍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있노라면, 이 범주들을 과연 어디에 쓸 수 있을 지 대략 난감하다. 인간주의 비판? 그거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거든요… 알트파터는 애매모호한 잉여가치의 종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전유의 형태를 구분함으로써 각 형태에 고유하게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 특징들에 주목하게 한다. 예컨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세 번째 유형은 화석 에너지원과의 연결 속에서만 가능하였고, 케인스주의와 포드주의라는 포지티브 섬 게임이 가능했던 틀을 만들어 냈다. 이에 반해 네 번째 유형인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전의 포지티브 섬 게임의 틀을 해체한다. 금융 자유화와 더불어 실질금리와 투자 수익률이 상향 조정됨에 따라 임금의 분배 몫은 줄어 들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원료였던 석유가 투기의 대상으로서 금융상품으로 변한다.

사실 알트파터의 독창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4장 이후부터이다. 그는 4장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체제는 (1) 자본주의적 형태, (2) 화석 에너지원, (3)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라고 주장한다. 맑스는 주로 (1)에 대해 말했고, 베버는 (3)이 어떻게 (1)을 갖고 왔는지를 분석하였다면, 알트파터는 그 엄청난 중요성에 비해 이제까지 간과되어 온 (2)가 어떻게 (1)과 (3)과 맞물려 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는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모든 경제∙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킨다” (107). 동시에 이는 세계 불평등의 심화와 자연의 파괴를 야기한다. 화석 에너지 체제 외의 그 어떤 것도 자본주의가 지난 200년 동안 거둔 엄청난 성과를 가능하게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화석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영토 확장의 극단적 비약을 가능케 하였다.

이 삼위일체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을 노정하면서도 비교적 잘 굴러 왔다. 무엇보다 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는 불평등의 증가와 생태적 문제를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시켰다 (5장). 6장부터 9장까지는 본격적으로 앞서 소개된 브로델의 진술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6장에서는 브로델보다는 맑스의 목소리에 가깝게 금융화 현상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첨예화로서 다룬다. 7장에서는 브로델이 말하는 외부의 충격이란, 곧 삼위일체 중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화석 에너지 체제의 소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8장에서는 브로델이 그나마 약간의 희망을 가졌던 사회 내부에서 움트는 신빙성 있는 대안들을 다룬다. 알트파터는 사회운동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신자유주의 질서로부터 탈환할 것을 주장한다 (‘사회영토운동’과 ‘시간의 자치권’). 또한 아래로부터 ‘도덕적’ 혹은 ‘연대적’ 경제의 출범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292-4). 또한 이러한 연대적 경제의 출범을 위한 세계적 수준의 제도적 배열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월든 벨로를 인용하며 역설하고 있다 (294-298). 또한 결정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피크 오일(peak oil, 석유채굴의 정점)이 경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속 가능한 태양 에너지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브로델이 현실적으로 희망할 수 있었던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오는 방식이었다. 외부의 충격 (석유시대의 종말)이 내부 모순의 전개 (신자유주의 금융화) 속에서 배태된 신빙성 있는 대안들 (연대적 경제와 태양 에너지 사회)과 결합하는 것.

3.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저자들이 나온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알트파터는 존 홀로웨이,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 에르난도 데 소토 등이 제시하는 현실 분석과 이에 따르는 대안들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반면, 그의 주장은 맑스, 브로델, 폴라니, 하비, 비릴리오, 퍼킨스, 벨로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준 출판사와 역자에 감사한다 (책 내용 중 일부가 Socialist Register 2007에 영어로 발표되었을 뿐이다). 번역자가 전공자가 아닌 독일어 전문 번역자이기 때문에 출판사 쪽에서는 이병천 선생에게 감수를 부탁하였나 본데, 읽어본 결과 번역은 엉망이다. 감수를 제대로 안한 것 같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비전공자들이 하는 실수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예컨대, 당연히 “매판 부르주아지”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을 원문대로 “콤프라도르 부르주아”라고 번역한다든가, 문맥이 안 맞아서 중간에 번역하기 힘든 부분을 건너뛴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곳도 많다. 가장 황당한 오역은 수잔 스트레인지를 수잔 손탁으로 옮긴 부분이다. 감수자까지 있는 번역 치고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책 읽으면서 오자와 오역들을 표시해두었는데, 긴 서평을 쓴 후 또 그것까지 할 성의와 여유가 내겐 없다. 어쨌든 좋은 책이다. 번역이 후졌지만, 그래도 원문을 접할 길 없는 내게 이 좋은 책을 접하게 해주었으니 여전히 출판사와 번역자에게는 감사한다. 많이 팔아서 재판 찍을 때에는 좀 제대로 성의 있게 고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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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천 2008-03-2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훌륭한 서평입니다. 오자와 오역 표시부분을 알고 싶읍니다

에로이카 2008-03-2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책을 감수하신 이병천 선생님이신가요? 그렇다면 영광입니다. 일단 표시해둔 부분만 여기 올리겠습니다. 지금 읽은 지 꽤 돼서 잊어 먹긴 했는데, 단지 맞춤법 문제만이 아닌 부분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14쪽 브로델 인용 부분은 까치에서 나온 주경철 번역 861쪽대로 고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53쪽 14행: “민속학자” → “나로드니크” 혹은 “인민주의자”
54쪽 1행: “괌같” → 삭제!!
82쪽 1행: “자본에 노동의” → “노동의 자본에”
94쪽 6행, 15행, 19행: “포드식” → “포드주의(적)”
96쪽 12행: “실질 자본” → “실물 자본”
97쪽 5행: “전유하는 아니라” →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120쪽 3행, 149쪽 3행: “체이스-둔” → “체이스던”
120쪽 12행: “카타리나” → “카트리나”
122쪽 9행: “정치경제학 '보상테제'” → 이게 뭔가요? 역주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이것의 원어가 무엇인지라도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24쪽 2행: “타탕” → “타당”
147쪽 19-20행: “대전환(이것은 1929년 이후의 세계 대공황을 지칭한다 – 저자)” → 이것이 정말 저자 알트파터의 주인가요? 누구의 주이든 틀린 말입니다. 알트파터가 인용한 이 부분은 까치에서 나온 주경철 번역본 854쪽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1929년 이후의 세계 대공황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대공황을 대전환의 예로 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브로델이 한 말의 문맥과는 완전히 따로 노는 주입니다. 오히려 이 책의 문맥에 비추어보면, 세계 대공황보다는 산업혁명, 곧 산업화 이전의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79쪽 15행: “수잔 손택이” → “수잔 스트레인지가”
180쪽 15행: “본위” → 이 말의 원어 표현이 뭔지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의 collateral에 상응하는 독일어인가요? 아니면 그냥 standard인가요?
181쪽 1행: “지폐본위제” → 이런 말이 있나요? 과문하여 여쭙습니다.
183쪽 20행: “1971과” → “1971년과”
185쪽 12행: “개인 활동가” → “개별 행위자” 혹은 “개인 투자자”
186쪽 13행: “개인과 공공 활동가” → “사적∙공적 투자자”
187쪽 8행: “속죄일 전쟁” → “욤키퍼 전쟁 (Yom Kippur War)”
195쪽 18행: “활동가” → “행위자”
231쪽 17행, 22행, 259쪽 15행: “과두체제의 재화” → 원문을 병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혹시 “과점적 부(oligarchic wealth)”를 뜻하는 것은 아닌지요?
233쪽 21-22행: “콤프라도르 부르주아” → “매판 부르주아”
 
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 - 캄보디아에서 박정희를 보다 유재현 온더로드 3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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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캄보디아는 이미지의 파편, 정보의 조각일 뿐이었다. 가까이는, 아마 1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은데, **님의 알라딘 서재에서 봤던 인상적인 사진과 글들이었다. 그 전에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화양연화였다. (왕가위도 좋고, 장만옥, 양조위도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난 참 별로였다. 서사가 너무 약하다. 글쎄요즘 다시 본다면 어떨지사랑에는 서사보다는 격정과 이미지가 더 중요한 것일텐데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화양연화를 봤을 때보다는 나이가 먹은 것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기억의 아주 먼 저 편, “킬링필드”…

이 책은 이런 캄보디아의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지식과 연결시켜주었다. 6개월 동안 프놈펜에서 머물면서 찍은 사진들과 짧막한 글들을 통해 현재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과 정희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킨다.

"위대한 박정희는 남한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살아있고 건재하다. 중국공산당을 훈육한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 그 중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도 특출하게 박정희유훈을 실현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적극적이다. … 2006 7월에서 그 해 12월까지 6개월 동안 프놈펜에 머물면서, 나는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인간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캄보디아의 훈센 개발독재라는 부활한 박정희 시대가 풍기는 비역하고 참혹한 냄새를 통해 내 자신이 관통했고 우리 모두가 관통했던 그 시대의 벌거벗은 실체를 더듬을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간의 얼굴과 체온이 그곳에 있었다." (11-12)

지은이 유재현이 훈센의 캄보디아에서 한국의 6-70년대 박정희와 그 시절의 인간의 데자부를 보았다면, 유재현의 글을 보면서 얼마전 서평을 썼던 조희연의 책을 연상하게 되었다. 유재현이 훈센을 보면서 박정희를 떠올리는 것은, 조희연역사적 박정희현재적 박정희와 대면시키겠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여서,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을 통하여 그러한 체제 성격 – “이런 체제는 사회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서 성장효과를 극대화하고, 독재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만든다” (조희연, 2007: 13) – 이 남한의 박정희 정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유재현의 이 책은 마치 조희연의 주장을 알고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박정희에 대한 세계의 유명한 독재자들 (북한의 김정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싱가포르의 리콴유)과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의 찬양을 싣고 있다 (80-81).

유재현박정희 신드롬의 연장 속에서 이명박을 해석한 것도 흥미롭다. 스승이 제자를 두어 후대를 예비하는 데, 첩첩산중에 유폐되었다거나 하는 비상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혈육을 적제(適弟)로 삼는 우둔한 짓은 멀리하는 법이다. 근친교배란 열성유전자밖에는 보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후대를 위해 천릿길이라도 헤매야 하는 법인데, 예컨대 무림의 세계가 그렇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혈육에게 심심풀이로 무공을 전수하는 경우에도 진정한 제자는 어느 날인가 어느 곳에서 흘러들어온 까까머리가 차지하게 마련이다. 무림의 국민교육헌장에 명시된 철칙 조항이다. 누가 박정희의 신실한 제자인가? 이명박이다 (9).

이명박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의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58). 캄보디아 한국 교민지에 실린 말에 따르면 훈센은 죽은 사람 중에서는 박정희,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전두환을 제일 존경한다고 한다 (80).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일 저녁, 그는 아마 웃고 있을 거다. 그가 이명박이든, 캄보디아의 훈센이든, 전두환이든, 지하의 박정희든 말이다.

캄보디아가 어떤 나라인 지 알고자 하는 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권해주고 싶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게 지식이 아니라, 네이버의 지식인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정보 쪼가리라면 이 책은 좀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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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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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아시아 발전의 사회학 나남신서 170
윤상우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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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우 교수가 이전에 발표했던 논문 10편을 모은 것인데, 7-80년대에 유행하던 발전이론들과 동아시아 발전국가에 대한 이론적 검토로부터 시작하여, 개별 발전 국가의 상이한 형성·성숙·쇠퇴의 역사적 경로와 타이밍에 대한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5(한국의 금융정책 변화와 발전국가해체), 8(대만)에서는 한 국가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3, 4, 7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비교되며, 6장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비교된다. 9장에서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경로를 기존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과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한다. 10장에서는 비교 방법이 아니라, 대만과 중국 간의 양안관계 변동과 이것이 양국의 국가 정책 및 대만 기업에 끼친 영향에 대한 다층적 분석이 시도된다.

사실 예전의 발전 이론들을 검토하는 1장을 보면서 너무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재단 때문에 실망이 컸지만, 이후의 장들은 그 실망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특히 나로서는 한국과 대만 발전국가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를 다룬 3장이 제일 인상적이었고, 한국 발전국가의 해체를 금융자유화의 전개 속에서 고찰한 5, 중국의 경제성장을 다룬 9, 중국과 대만 간의 경제통합이 대만의 발전국가 해체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10장도 좋았다.

먼저,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된 발전국가 모델은 다음과 같은 이념적, 조직적, 정책적, 관계적 특성으로 구성된다 (284-285, cf. 46, 324).

(1)    이념적 요소: 경제성장이 국가 정책의 최우선적 고려사항이었으며, 동시에 실적 정당성의 근거.
(2)    조직적 요소: 자율적이고 조직적 응집력을 확보한 유능한 국가관료기구에 의해 행사되는 전략적 시장개입.
(3)    정책적 요소: 여러 적극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자원의 전략적 할당과 민간부문의 생산적 투자를 유도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강화.
(4)    관계적 요소: 배태된 자율성.

카스텔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국가 모델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보다 산업화가 늦은 후발산업국가이면서도,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종속을 모면하며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the politics of survival, 83, 268, 285). 그러나 이 생존의 정치가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달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국가관료기구의 일관된 방향설정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체제적인 기회구조, 헤게모니 세력의 개입과 같은 외적 요인, 그리고 최고권력의 리더십, 관료조직 내의 갈등과 같은 내적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67, cf. 137). 이는 발전국가의 성공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해체 또한 복수의 요인들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기존의 발전국가론은 발전국가 해체의 요인을 주로 국가자율성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야기되는 일종의 '무덤 파는 세력'(grave-digger)의 출현과 국가관료기구의 응집력 및 제도적 능력의 약화에서 찾고 있는데, 지은이는 발전국가론이 발전국가 위기의 원인을 지나치게 사회내적인 요인에서 찾고 있다고 비판한다 (107-109). 윤상우세계체제의 기회구조가 압박구조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이에 대한 보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13-114).

윤상우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구분되는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일반적 특성을 위와 같이 제시하면서도, 동아시아 발전국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과 대만의 상이한 발전경로를 비교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대만이 약탈국가(본토의 국민당 정권 시절과 대만으로 패퇴 후 외삽국가로서 존재했던 1950년대까지) → 발전국가(1960년대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연성발전국가(sof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걸었던 반면, 한국은 약탈국가(이승만 정권) → 발전국가(1960-1980년대 중반) 탈발전국가(pos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거쳤다 (130-136).

한국의 탈발전국가경로와 대만의 연성발전국가경로 간의 대비는 한국의 1997년 경제위기와 비슷한 시기 대만의 생존 간의 대비로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윤상우는 마지막 10장에서 대만의 연성발전국가 모델 역시 중국 경제와의 통합 속에서 위험에 처해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장을 제외하곤, 각 장의 질과 완결성이 무척 높다.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트집을 잡자면,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묶은 것이라, 반복되는 내용이 꽤 많다. 출판 업적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과학계의 고질병 중 하나이겠지만, 이전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낼 때에는 원래 논문에서는 지면 제약 때문에 자세하게 못 다루었던 사실을 풍부하게 담아내는 것을 넘어서, 좀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책의 모습을 갖췄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윤상우의 후속 작업들이 무척 기대된다. 특히, 그가 탈발전국가연성발전국가처럼 기존에 나온 발전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정적 개념화를 넘어서 현재 등장하고 있는 국가 유형에 대한 좀더 긍정적(affirmative)인 방식의 개념화를 시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마지막 10장에서 시도된 중국과 대만 경제 간의 연동을 분석한 것을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남북한 경제 간 연동 분석에 적용하고, 나아가 두 경제 연동 간의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 물론 어렵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다양성의 추적을 1장에서 잠시 소개되고 있는 필립 맥마이클의 통합적 비교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 자본주의 이해의 새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현재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분단체제론'을 발전, 지양하는 하나의 길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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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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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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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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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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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0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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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 5.16에서 10.26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2
조희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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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61년 집권해서 1979년 막을 내린 박정희 정권 하의 남한 역사에 대한 다각적 개괄서이다. 20년이 좀 못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던 이 시기는 성공한 쿠데타 5·16으로 시작해서 실패한 쿠데타 10·26으로 끝이 난다. 나는 그 정권의 시작과 끝이, 또 그 사이의 철권적 통치와 경제발전이 도저히 이후의 역사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한의 역사란 고작 60년에 지나지 않는다. 60년 중 20년의 세월을 지배한 이 비정상적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며,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남한 사회의 좌우를 가르는 중심적 패러미터이다.

이 책의 지은이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간의 기존의 소통불가능 상황을 타개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보편적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난 그의 의도가 비교적 잘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박정희에 대한 당대 대중 일부의 자발적 열광의 실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그에 대한 향수가 단지 보수세력의 조직적 동원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육사생도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총학생회까지도 5.16 군사쿠데타 지지 성명을 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또 혁신계 언론였던 『사상계』와 『민족일보』마저도 쿠데타에 기대를 표명했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들이 쿠데타에 의구심을 품었으면서도 쿠데타세력=나쁜 세력이라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정상적인 체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단순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3년 대선에서 여순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정희의 경력이 문제되자, 오히려 이는 진보성향의 표를 흡수하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박정희 개인과 그 시대의 복합적 모순성에 주목하면서, 이 체제를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개발동원체제”(developmental mobilization regime)로 정의한다 (12). 조희연박정희 체제 뿐만 아니라,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 스탈린 체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경제체제,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 등이 이 체제의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남한의 박정희 신드롬과 러시아의 스탈린 신드롬을 병치시키기도 한다 (233)). 이 체제는 국가가 사회의 반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대해 역작용하는 체제이며,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체제이다. 이 체제 속에서 국가는 “‘개발·조국근대화·산업화·수출증대같은 국가의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훈육하고 독려하는” ‘훈육국가의 형태를 띠게 된다 (173, 218). 사회체제 (혹은 축적체제)와 국가형태의 이러한 개념화는 이 책이 그 동안에 나온 다른 박정희 시대에 관한 책과 차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전의 역사책들은 그것이 어떠한 관점에서 서술되든 간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description)과 서술자의 정치적 입장에 기반한 해석(interpretation)이 무매개적으로 혼융됨으로써, 정치적인 논란을 유발했을지언정 학술적인 논의 구도 성립을 힘들게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류와 달리 조희연은 서술과 해석을 개념적 설명(explanation)으로 매개함으로써 신도, 악마도, 그렇다고 평범한 한국 남자도 아니었던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보수진영의 논의는 그 시절의 경제 발전의 성과와 그의 서민적 이미지를 집중 부각시키는 반면, 그 이면의 어두운 부분들 - 일본군 장교 복무, 남로당 활동, 쿠데타, 일체의 민주주의 부정, 노동·인권 탄압, 정치공작, 정경유착, 부패 등 - 을 각색·왜곡하거나 이에 면죄부를 주고자 하였다. 우파들은 박정희를 통째로 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해 좋아보이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입장을 취해온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 진영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취사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악으로 인식해왔다.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진영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대결구도이다. 따라서 얼마전 백낙청이 박정희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 칭하면서 박정희의 공과 과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정희에 대한 반()수구적 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번 대선 구도 초기에서 잘 보여졌듯,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양대 기득권 정치세력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스스로를 표상하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조희연은 기존의 보수, 진보, 그리고 백낙청 식의 양시양비론적 절충과 이 책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였던 것 간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박정희를 둘러싼 이러한 해석 차이란 결국 산업화 이후의,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대안을 둘러싼 각축전이다 (232). 보수는 민주주의, 인권, 복지를, 진보는 개발, 성장, 개방, 경제 운용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이 이 각축전의 배경이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와 그의 시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그 여럿 간의 모순과 갈등이 응축되어 있다. 현재적 시각에서 보고 싶은측면만을 봐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236). 조희연 (백낙청처럼) 박정희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화해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의 소통불가능의 교착국면을 좀 제대로 된 싸움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는 어떻게 역사적 박정희를 뛰어넘을 것인가하는 과제를, 진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국가와 경제를 운영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지은이 조희연 교수는 결코 쉬운 글을 쓰는 양반이 아니다. 그의 글을 보면 고난도 사회과학적 개념이 난무한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논문이 아니라 역사책이다. 따라서 쉽다. 이 책에서는 개념 사용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의 서술에 충실하면서도 그 사실이 상이하게 해석되는 현시대적 배경도 잘 서술되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교양과 지식의 업그레이드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정희 시대나 조희연의 연구에 관심이 많은 학문하는 사람들은 봅 제솝(Bob Jessop)의 설명틀에 의거하여 발전국가를 논의 했던 이전의 글(『동아시아 경제변화와 국가의 역할 전환』(한울) 4)과 곧 후마니타스에서 나온다고 광고하는 책(『한국민주주의와 개발동원체제』(후마니타스, 근간))과 같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자:

23쪽 밑에서 두번째 줄: 조취 조치

129쪽 밑에서7째 줄: 1972년에 → 1972

207 9째 줄: 성장했다는 성장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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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6-11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hani.co.kr/arti/SERIES/185/292136.html
원로언론인 임재경이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는 [길을 찾아서]의 한 회인데, 7.4 남북공동선언과 8.3조치 등으로 유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관변먹물들의 시도와 이로 인한 헷갈림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정말 헷갈렸"지만 그것은 확실히 "위장"이었다가 임재경의 결론.

2008-11-08 0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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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빠진 세계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4
이강국 지음 / 책세상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이 글의 지은이 이강국 교수가 좋다. 그의 글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한다. 비약도 없다. 아마도 이 책은 문고판이라 내용이 더 압축적이어서 그랬겠지만, 이전에 낸 책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후마니타스)에서도 어려운 경제학적 연구들을 야무지게 풀어낼 때에도 중언부언한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책에 비해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무엇보다 읽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이한 글로 풀어내는 그 내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불평등과 가난”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다양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난과 불평등의 동학을 잘 서술하고 있다. 그 동학의 중심에는 금융화로 정리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놓여 있다. 국제적 자본이동의 증가와 결부된 금융이익(이자와 배당)의 증가는 소득 불평등 뿐만 아니라 자산 불평등을 증가시킨다. 한국의 경우, 부동산 소유 격차 증대로 인한 불평등 증가가 교육의 양극화와 더불어 부의 세습에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면서 가난과 불평등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최선이라는 당연한 답을 내놓으면서도 분배와 성장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것이 아니라, 높은 성장, 균등한 소득 분배, 빈곤 해결의 선순환(193쪽)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정책적 제안을 내놓고 있다 (182-9쪽).

(1)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제고하는 것
(2) 위기 이후 시장지향적으로 변화한 금융 부문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빈곤층과 중소기업의 금융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
(3) 근로빈곤 문제와 노동시장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규직의 증대를 억제하고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4) 공교육을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평등한 교육과 보건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5) 거시경제라는 구조적인 관점에서 자유화와 개방으로 폭주하는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재고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너무 맞는 말만 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이 더 와닿는 이유는 이 다섯 가지 제안에 대한 현실 정치세력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립서비스 수준이 아닌 실제 정책에서 갈릴 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현실 속에서 이 다섯 가지 제안들은 진보적 경제정책의 시금석인 것 같다.

지은이는 책의 앞부분 어딘가에서 경제학자는 ‘차가운 이성’과 함께 ‘더운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알프레드 마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둘을 이강국 교수에게서 발견하는 것 같아 그의 앞으로의 작업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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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는 책이군요. 그리고 추석 잘 보내세요.

에로이카 2007-09-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님,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가위 동안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