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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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체제 변동이라는 주제로 한 우물을 파온 노중기 선생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세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1부에서는 87년 노동체제와 그 전후의 노동체제의 성격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 2, 3장은 모두 대상 시기를 소시기로 구분하여 노동체제 변동의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97년 이후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성립을 다루는 4장은 발표 당시인 2006년에도 해당 노동체제가 지속 중이어서 그런 지, 소시기 구분은 없었다. 1부에 소개된 노동체제 변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군부 독재기의 억업적 배제 체제 (1961-87), (2) 1987년 체제 (1987-1997), (3)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1997-)로 나눠볼 수 있다. 1부는 술술 읽히는 데에 반해서 지은이의 주장이 이제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져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3장에서 1960-70년대의 노동체제를 “국가 코포라티즘의 배제적 하위 유형”으로 규정했던 최장집을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최장집의 이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이론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고, 한국노총이 외형적 코포라티즘 기제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체제 규정적 요소”는 아니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83-87).

1부를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노중기스럽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고 맞는 말만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이 중 몇몇 글들을 이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나의 이런 판단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6년 이후를 살펴보는 5장부터 10장까지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합의 시도들과 이에 대한 주요 논자들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코포라티즘 담론을 겨냥하고 있다. 5장과 10장은 1부의 1, 2, 3장처럼 소시기별로 사회적 합의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경제위기가 그 직접적 원인이었던 노사정 합의 실험은 “노동의 저항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다”(233)는 전략적 목표를 지닌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경제위기와 노사정위원회는 “노사관계의 자유화•민주화”라는 노동 측의 압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라는 국가•자본 측의 압박 사이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던 1987년 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241).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시도들을 코포라티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와 코포라티즘은 양립 가능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제3세계에서 코포라티즘의 이식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논의는 1부와 달리 아주 흥미롭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원론적 논의들(274, 285)을 살펴보면서 이를 “국가의 경제 개입을 통해서 조직적 강제와 동의가 동시에 조직화되는 계급적 타협 체제”(243)로 정의한다. 코포라티즘은 원래 2차 대전 후 “포드주의 체제의 거시적 계급 타협을 유지시킨 통제와 이익 대표의 교환 체제” (309-310)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코포라티즘은 전통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갖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나라들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모델이나 아일랜드 모델 등을 들먹이면서, 미래 한국 사회 노동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면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단순 이원론을 고집했던 사회적 합의론자들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무시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305). 지은이의 이 비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나저나 이전에 읽었던 조영철과 정이환의 책도 그랬지만,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 이 이론적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무척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이다.] 8장에서는 한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험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특히 동유럽에서 시도된 코포라티즘의 이식 시도들 또한 고찰된다. 그는 서구의 연구들이 “서구 내부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제3세계 내부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역사적 조건 상의 차이를 구별한다: “불안정한 민주화 이행과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스페인),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동유럽 국가), 경제 위기와 기존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의 연장 (멕시코), 배제적 노사관계로부터의 이행과정(브라질, 칠레, 한국) 등”.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취약한 정권이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포섭해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또한 지적된다 (319).

9장에서는 한국과 멕시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코포라티즘이 신자유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섣불리 이식되었을 경우 어떠한 파멸적 결과가 양산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비교들이 시도된다. “국가-지배 정당-공식 노조로 이어진 강력하고 집중적인 권력 체제, 그리고 노동계급에 대한 거의 완벽한 포섭과 통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와 달리 한국은 “기업별로 분산된 노조 체제, 노동 정당의 부재와 반노동자 이데올로기의 만연, 오랜 국가 폭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모두 “신자유주의 하의 통제의 위기”라는 동일한 구조적 변인을 공유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위기는 코포라티즘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 위기는 사회 협약의 실험을 끊임없이 야기한 힘이 되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새로운 사회 협약”은 다시 여러 공통성들을 보인다: (1) “사회협약은 실질적 교환 체계라기보다 ‘참여와 협조'라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 정당화 기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 “협약은 노동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3) “‘협약의 정치’는 ‘국가 폭력’이라는 또 다른 통제 장치로 보완되어야 했다.” (4) “전 과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흔히 강압적 수단을 동원해 합의를 도출했다.” (5) "‘사회 협약의 정치’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에 종속된 하위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358-360) 곧 이들 두 나라에서 사회협약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달 벨트”였을 뿐이다 (347).

1부는 다소 지루했고, 2부는 재미있었다면, 3부는 어떠한가? 3부, 특히 그 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망을 다룬 마지막 13장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글인 것 같다. 또 그동안 전투적 노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해야 한다는 노중기 선생의 말을 그냥 ‘맞는 말’ 정도로 가벼이 여겼었는데, 이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비판 대상은 노동운동 내 국민파로 대변되는 흐름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선이었다. [사실 난 이 노선 자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읽는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얼토당토 않은 노동자 항복 선언을 사회적 “합의”로 포장한 “노사민정 합의”는 이 정권에서 노동자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판 ‘사회적 조합주의’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와 유럽의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etal corporatism)의 異種交配”이다 (409).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에 대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연대와 계급적∙대중적 정치투쟁의 원리를 제거했다. 또 사민주의에서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주의와 정책 참가만을 수입했다” (409-410).

13장의 서두에서 지은이는 “1987년 노동체제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거의 완전히 해체”된 반면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위력은 압도적”으로 발전한 변화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맞게 된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극복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9장에서 코포라티즘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면, 이 13장에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역사적 다양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의 세 가지 역사적 기원을 준별한다: (1) 1970-90년대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 급속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경험한 제3세계 일부에서 전개된 “강력한 억압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2)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미국 노조 운동, (3) 신자유주의 하에서 “본래의 순수한 경제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정치적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유럽 사민주의 노조 운동. 이 일반적 분류 속에서도 그는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의 차이 또한 주목하고 있다 (474).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의 사용 범위는 무척 넓고, 그 개념적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노중기는 여기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크게 네 가지의 이념적 지향들, 곧 민주성∙자주성∙연대성∙변혁성의 이념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개념적 정의를 분명하게 한다 (476-479).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과거 제3세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주요 지향은 민주성(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적극적 참가,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과 자주성(노조는 지배 세력의 통치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자주적 기구)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의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강조점은 연대성(노조가 조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 대중과 중간계급 집단과 조직적으로 연대)과 변혁성(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향)에 있었다.

지은이는 또 이러한 개념화에 입각하여 1987년 노동체제의 산물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네 가지 요소와 함께 기업별노조 체제 및 그것에 기인한 협소한 경제주의를 동시에 내포한 운동 전략”이었다 (485). 민주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확보는 당면 과제였지만, 연대성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자족적인 노조 활동을 전제로 한 연대”에 그쳤으며, “변혁성은” 과격한 구호와 이념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자유와 국가와 자본의 노조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전투적 노조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87년 노동체제의 구조적 제약은 전자[민주성, 자주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했고 이는 서구의 학자들에게 우리 민주 노조 운동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1997년 이후 구조조정 정치과정에서 후자의 측면[연대성과 변혁성의 한계]이 중요해지자 사회적 노조주의 지향의 이론가와 활동가는 전투적 노조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487).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지은이는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귀결은 일본식 기업 단위 노사 협력주의(혹은 미시 코포라티즘)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체제 하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연발생성이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들 일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는 위로부터 지도부의 목적의식적 노력을 매개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운동과 미조직 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현장 의지를 묶는 이중적 전략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 새로운 단계 사회운동성의 핵심은 “연대성과 변혁성의 확장 및 제도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발전방향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 또한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적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13장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현재의 노동운동이 처한 내우외환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지은이의 진단과 처방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사회적 합의의 신자유주의적 결과의 파괴성이 누적된 지금 지은이의 주장은 더욱 돋보인다. 또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유지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퇴조 흐름은 분명 경쟁력 코포라티즘으로 정리되는 사회적 합의에의 참여 압력의 명분을 대폭 침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자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실낱 같은 희망을 실력을 통해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은이의 경고대로 일본의 미시 코포라티즘이나, 과거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그리고 현재의 한국노총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도 못하고 괜히 현실에 대한 갑갑함만 토로한 것 같아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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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03-13 23:37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재미있어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노조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맨 마지막 장만 보세요.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인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 근거가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들은 허벅지 찔러가면서 공부한다고 마음 먹지 않으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2009-05-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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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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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무엇이 문제인가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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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분석한 저작으로서 이 책만큼 국내외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책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IMF가 부과했던 구조조정과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넓이를 동시에 지닌 훌륭한 경제학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2.
먼저 지은이들은, 거셴크론의 논의의 독창적 연장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의 비교역사적 특정성을 고찰하고 있다. 거셴크론은 19세기 (개별기업가와 은행에 의해 주도된) 영국, (겸업은행이 주도한) 독일, (국가 주도의) 러시아의 상이한 발전경험을 유형화하면서, 각국의 발전 궤적을 국가간 경쟁이라는 맥락 위에 자리매김한다. 거셴크론은 이처럼 다른 발전 주도 주체의 차이를 후발국에는 부재한 선발국의 이점 – 자본, 테크놀로지, 금융 상의 이점 - 을 “대체”(substituting)하기 위한 후발국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로 이해한다. 지은이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거셴크론의 따라잡기 전략을 “대체” 전략이라 이름 짓고, 이를 20세기의 상황에 응용하여 미국, 일본, 한국의 발전과정에 적용한다. 20세기 일본과 한국의 따라잡기는 19세기 독일과 러시아의 따라잡기 과정과 유사성을 보인다. 상업은행과 종합상사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케이레츠 모델은 독일의 겸업은행이 했던 역할과 유사하며, 일본보다 사적 부문이 훨씬 더 취약했던 한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러시아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대체전략을 통한 따라잡기를 시도했던 일본이나 한국과는 달리, 싱가포르와 타이완은 선진국의 이점을 제도적 배열을 통해 대체하기보다는 “보완”(complementing)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3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중심적 역할은 공통적으로 드러나지만, 보완전략을 취했던 싱가포르와 타이완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벌이 주요 산업화를 담당하게 된다. 국유화된 은행은 국가와 재벌의 관계를 매개하는 주요 고리였다. 지은이들이 “주식회사 한국 (Korea Inc.)”이라고 부르는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는 이처럼 후발국가 한국이 선진경제를 따라잡는 과정 중에 선진경제의 이점을 대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지은이의 분석 초점은 바로 이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에 집중된다.

이 책의 몸통 격인 3장은 1997년 금융위기의 결과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전개와 이에 대한 IMF와 주류경제학의 진단과 처방을 비판적으로 검토, 기각한 후, 그것과 대별되는 자신들의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그것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비효율성과 부패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라고 보고, 구조조정은 이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지은이들은 주류 입장이 구조적 문제를 과장했을 뿐 아니라,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짧은 지면에 경제위기 전개 과정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한다. 1996년부터 현저하게 드러났던 한국 경제의 문제는 무역적자의 폭증이었는데, 이 자체는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라는 주기적 문제였다. 지은이들은 만약 이 주기적 문제에 의해 야기된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 외채의 급증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는 위기를 안 겪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해 구조적 문제로 지목된 산업정책, 정실자본주의, ‘대마불사’ 논리, 재벌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위기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였다기 보다는 과거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추동했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1998년 말 이후의 경제회복도 구조조정 정책의 성과가 아니었으며,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정책은 위기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심화시켰고, 경제회복은 IMF가 한국 정부가 긴축정책에서 케인즈주의적 경제 팽창정책으로 정책선회를 허용하였던 1998년 중반 이후에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외국 자본도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책선회가 가능했던 것은 1998년 하반기 이후의 세계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세계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8월 러시아와 브라질의 위기가 터지고 뉴욕의 헤지펀드인 LTCM이 부도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을 위시한 G7 경제가 이자율 인하와 통화공급 증가를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이 이자율을 낮추고 원화절하를 한 것은 원래 IMF 프로그램에도 들어있지 않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이 콜시장 금리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이 글로벌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실행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IMF와 달리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옛 모델에서 새로운 발전 모델로의 “이행 실패” (transition failure)에서 찾으면서 이를 (1) 발전국가 모델의 쇠퇴, (2) 금융자유화 과정의 실패, (3) 재벌의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적응 실패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4장에서는 5대 재벌들의 ‘빅딜’과 기타 재벌들의 ‘워크아웃’을 통해 이루어진 기업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데, 불공정거래로 지목된 재벌의 내부거래의 금지나 금융기관들이 자산건전성 분류기준(forward-looking criteria)이나 BIS 비율을 준수토록 함으로써 기업 대출을 힘들게 한 것 등이 기대한 효과보다는 비용이 훨씬 더 컸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이 과거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이었던 국가와 재벌의 위험부담 기능을 사실상 해체시키면서 본질상 보수적 자금운용을 할 수밖에 없는 금융부문에게 이 기능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특징은 바로 주요 위험부담 주체의 부재로 요약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미명 아래 강요된 이 특징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인데, 지은이들은 따라잡기 발전 전략을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발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거셴크론의 논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끝에서 지은이들은 한국이 경제위기로 폭발한 “이행 실패”를 딛고 “이차 추격 시스템(second-stage catching-up system)”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경제영역에서 후퇴할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궁극적인 시스템 관리자(the ultimate system manager)로서 경제체제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의 특수성 간의 조정자(media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 해외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권을 다시금 획득해야 하고, 해외 금융에 대한 개방은 국내 상황의 고려에 기반해서 협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를 잘 수행한다면 재벌구조를 해체함으로써 금융 위험을 감소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재벌의 다각적 구조 (diversified structure)에 기반한 내부의 자원동원과 계열사간 상호지원은  바로 재벌의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데,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3.
분석의 철저함이나 주장의 뚜렷함 모두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또한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28년 동안 지속되어온 레이거노믹스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옛날 책 제목이 생각나는데, 오늘날 이 시점 역사의 판단은 IMF와 주류경제학은 틀렸고, 신장섭, 장하준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은이들의 반신자유주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전에 서평을 썼던 책 두 권이 계속 떠올랐다. 하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http://blog.aladin.co.kr/eroica/2157950 )이고, 다른 하나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http://blog.aladin.co.kr/eroica/1948027 )였다. 전자는 금융자유화가 그것이 기대했던 원활한 기업의 자금 조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 떠올랐으며, 후자는 국가가 고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체제를 다시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었을 때 떠올랐다. 세 저작 모두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내가 쉽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 지은이들의 초점은 국가 – 은행 – 재벌의 연계이다. 지은이들이 이 책에서 이 초점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을 테고, 또 이렇게 초점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분석과 주장이 더욱 빛난다. 그러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주요 특징인 국가와 재벌에 의해 부담된 위험은 이 연계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지은이들은 다루지 않는다. 이 연계가 과거 고도 성장을 추동해 온 발전모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은이들의 진단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연계 바깥에 수출을 통한 기업의 이윤실현에 유리한 기회구조 – 세계적으로 팽창중인 시장 – 에 적절한 타이밍에 결합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연계 내부의 주요 위험 부담 주체, 곧 국가가 비용과 위험을 국민들에게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부터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과거 발전모델에 있어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들은 한국 경제 자체의 성숙과 글로벌리제이션이 과거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차 추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은이들의 제안대로 연계 내부를 재정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연계와 연계 외부 간의 채널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지은이들은 국가가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 간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다루고 있지 않다.

지은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시장은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는 폴라니의 인식은 제도주의 경제학의 한 기초를 이룬다. 국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라는 제도적 배열의 변화를 통해 경제 발전과 위기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제도주의 경제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연계 또한 그 외부의 더 큰 사회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며, 만약 2차 추격시스템이 이전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처럼 다시 한 번 하층 계급에게 고통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시장 전제(market despotism)를 통해 위험을 전가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보다도 나을 게 없을 것이다.

어떠한 책을 읽고, 지은이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의 비판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 서평은 결코 지은이들의 이 훌륭한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2차 추격 시스템”으로의 이행이라는 지은이들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연계 내부 자체의 재배열 문제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 장하준, 신장섭에 대한 독자들의 호오 여부는 사실 재벌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재벌 체제의 존속을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인정하면 이들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기각하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지은이들의 대안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어 재벌에 대한 입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국가 - 재벌 - 은행 연계 외부로 전가되었던 위험이 어떻게 재구조화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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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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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 훌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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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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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앙드레 고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예전에 출판되었던 한 편집서(이병천,박형준 편저,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I』)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는 고르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번역이 별로 좋지는 않다. 글쎄 번역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유명한 저서 ‘노동자 계급이여 안녕’(Farewell to the Working Class)의 제목이 불쾌해서였는지, 고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그 책을 펴보니, 줄은 잔뜩 쳐져 있는데, 그 논문들에서 그가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반 바뀌고 집어든 책이 이번에 나온 『에콜로지카』이다. 이 책은 고르가 자살한 다음 해인 2008년에 출판된 책인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과 인터뷰들 중, 고르의 핵심 사상이 잘 표현된 글들을 골라 편집한 Essential Gorz인 셈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깊이보다는 한 학자의 일생에 걸친 작업들의 맛보기인 셈이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그 화해 불가능성
옮긴이는 역자 후기에서 “고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174)고 단언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읽은 고르는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는『자본론』에서 집약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의에 충실하다. 그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를 낳는 두 개의 원천, 즉 대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고갈시킴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수단과 기술을 발전”시킨다(『자본론』1권 15장 마지막 부분). 이에 반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는 “연합된 생산자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집합적 통제를 통해 자연과의 교환을 규제”하는 사회(『자본론』제3권 7부 48장)이다 (150, 59). 이처럼 고르의 생태주의적 지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이질적인 어떤 것을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 아니다. 고르의 생태주의적 입장은 『자본론』내부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언명을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르크스나 고르 모두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상 노동착취적이며, 반생태적이다.

고르가 마르크스와 갈라지는 지점은 자연의 착취를 공통분모로 하여 자본이 노동의 포섭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고르의 비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은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은 일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곧 자본과 노동, 양자는 그들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과 그 생산의 부산물)의 구체적 형태와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오는 보상, 곧 이윤과 임금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된다 (121, 143).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옹호하며,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약탈의 공동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149).

자본주의적 노동의 역사
고르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논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지 노동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140-148). 그에 따르면, 18세기 공장제 수공업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노동은 그저 자연에 복종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을 변형시키고 지배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140). 이는 몰개성적이고 대체가능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야기한다(141).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동일한 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에 기반한 것이다 (35, 141-144). 이 동질적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에 의해서만 노동착취에 대해 저항할 수 있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라는 토대 위에서 일치단결하여 투쟁하게 된다. “계급의 일치감과 소속감이 왕성”했던 이 “영웅적 시기”에 노동운동은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생활비로 ‘충분한’ 임금을 요구하면서, 주로 생존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145-146).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전까지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를 지녔던 소비자들이 점점 더 ‘차별화된 개인적 욕망’을 지닌 소비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소비자의 개성화와 차별화는 산업 판로의 확대를 낳는 동시에 노동자의 결집력과 계급의식을 파먹어” 들었다 (147). 노동과정에서의 존엄성 상실은 높은 임금으로 가능해진 소비 생활에 의해 보상된다. 대략 1973년까지 지속된 포드주의 시기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가 총생산 증가를 상회함으로써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중산층화와 함께 천연자원의 초토화를 가속화시켰다 (147-149).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반경제
이 책은, 포드주의 이후에 일어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야기,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반혁명과 금융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114-119쪽 정도가 예외).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는 대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통화주의적 경제 운용, 감세, 고용의 유연화, 금융 자유화 등을 동반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 시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신자유주의 국면을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영광의 30년 시기에 대한 반동이자 그 시기의 추세에 대한 역전으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고르는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출되는 것으로 본다. 곧 이전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논리적 연장으로 해석된다. 그는 대략 1980년대부터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위기의 원인으로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공학 혁명”을 들고 있다 (114). [Cf. 도미니크 쁠리옹, 『신자본주의』 67-68쪽 참조]

고르는 이 과거 30년 동안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기본 범주, 즉 노동, 가치, 자본이 더는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남들이 다할 줄 아는 보편적 기본 기술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적 주특기와 노하우(비물질적 구성요소)를 통해 생산과정에 기여할 것을 요구 받는다.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투여되는 상이한 질을 지닌 개별 노동의 가치는 더 이상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는 데에 반해 “상징, 이미지, 메시지, 스타일, 유행을 생산하는 비물질적 차원”의 가격은 상승한다 (169).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그 물질성 충만했던 노동으로부터 추론된 가치 개념은 이제 적용 곤란하게 된다. 또 포드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많은 비용을 들여 지식의 사유화와 인위적 품귀화를 통하여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하려는 시도가 소위 지식경제의 출현이라는 트렌드로 관찰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의 비물질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본에게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33). 그러나 “상품의 성격에서 비물질적인 내용이 차지하는 무게가 늘어감에 따라 … 공급의 독점이 점점 자본에서 벗어난다” (37). 정보 혁명은 이전까지 사유되고 독점되었던 비물질적 콘텐츠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복제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물질적 콘텐츠를 교환가치를 상실한 무상의 ‘공유재’로 만들어 버린다 (38). “컴퓨터와 인터넷은 상품의 지배를 기초부터 무너뜨린다” (39).

자본주의적 팽창, 곧 만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혁명은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에 내재해 있는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킨다. 그리고 이는 애초의 기대를 배반하는 反경제라는 역설적 결과를 산출한다. 지식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는 달리 측정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통의 표준에 의해 교환될 수 없는 가치이다 (17). 이 반경제에서 “지식의 ‘가치’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얼마나 전파되는가로 측정”된다 (18). 
 

알라딘 서재질
알라딘 서재는 지식의 반경제의 좋은 예 아닐까? 물론 알라딘 서재를 비롯한 인터넷 사업체(언론, 서점, 포탈)들의 블로그는 블로그에 올라오는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한다 (서재지수). 이 측정된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확증된 경우 시스템에 의해 보상된다 (thanks to). 이를 지식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이라 부른다면 너무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까? 알라딘 서재는 분명 지식을 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논리에 포섭하려는 논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생존을 위해, 곧 자신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인 임금을 위해 노동한다. 알라디너는 서재지수 올라가고, thanks to 받으면 기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알라딘 서재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외도 좀 있는 것 같다). 이는 이 책에서 펼쳐진 고르의 논의를 알라딘 서재에 장난삼아 적용해본 것이다.

나는 고르보다는 회의적이다. 서재질의 미덕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나의 알라딘 서재질이 지식의 상품화 논리에 지적 유희마저 복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의 문제

쓰다 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딴 데로 새버렸다. 사실 고르의 생태주의적 대안의 매력이나 이 책의 번역상의 문제에 대해 꼭 좀 지적할 부분들이 있었는데, 요약과 공상이 너무 길었다. 다 집어치우고 나중에 출판사에서 재판 찍게 되거든 참고하라는 마음으로 대표적인 굵직한 실수 몇 개만 지적하겠다.

- 옮긴이는 154쪽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사이의 비율”로 번역하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이며,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둘 다 불변자본이다. 책 전체에 걸쳐 고정자본이란 번역어는 계속 나오는데 (19, 38, 148, 151, 그리고 또 여기저기) 148쪽의 “물적 설비에 투자된 고정자본”의 경우처럼 고정자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59쪽에서 『자본론』 3권 48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에서 역자는 necessity를 “필요성”으로 번역한다. 이 원문은 내가 갖고 있는 비봉판 김수행의 『자본론』3권 하편의 1011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김수행은 이를 “필연”으로 옮긴다 (내가 갖고 있는 『자본론』은 개역판이 아니기 때문에 좀 그렇지만, 이 부분은 김수행의 번역도 별로 좋지 않다). 분명 necessity에는 필요성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자유의 왕국과 대비되는 필연의 왕국이라는 맥락에서 필요성보다는 “필연”으로 옮기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필요”라는 번역어는 37쪽에서도 나오고, 109-110쪽에서도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결여로 인한 필요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유와 대비되는 필연을 뜻한다고 읽는 것이 올바른 독해일 것 같다.

- 116쪽: “현금가능자산” → “유동성 자산”

- 144쪽: “『노동, 임금, 그리고 자본』” → “『임노동과 자본』”  


같은 출판사에서 앙드레 고르의 유명한 저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책속표지에 선전해 놓았던데, 그 때는 이런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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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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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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