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Hardcover)
Brenda R. Silver / Princeton Univ Pr / 198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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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브레인스토밍의 흔적이 담겨 있는 총 67권의 공책에 필기한 내용을 브렌다 실버가 정리해서 1983년에 펴낸 책이다. 


운 좋게 도서관 보존창고에 이 책이 있었고, 도서관 시스템이 전자정보화되기 전에 입수한 책인지 표지 뒷면에는 대출기록카드가 꽂혀 있는데, 이전에 빌려간 이가 아무도 없는지 깨끗하다. 2022년 11월의 나를 위해, 아마도 오직 나를 위해, 아무도 찾는 이 없었을 이 책을 오랫동안 고이 보관해준 도서관에게 고맙다. 내가 찾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 아무런 페이지 정보가 없어서 어제 저녁부터 한참을 뒤적이며 찾다 드디어 발견! 


버지니아 울프 전공자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찾아본 이유가 있지. ㅎㅎㅎ



창작을 위한 사유에는 단어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을 Gutsgruzzler로 대체하는데, 이 단어는 뭐라고 옮겨야 하나? 

내장폭식자? 순대러버? 

영웅담(heroism)은 병 이야기(botulism)로, 영웅(hero)은 병(bottle)으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울프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겨놓지 않았다. 



르 귄도 이 페이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툴리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그게 뭔지는 다음 리뷰에 써주마. ㅋ

이 노트북에 있는 몇몇 스케치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완성된 저작에 나름대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B.1절에는 새로운 단어들에 대한 탐색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를 다른 말로 바꾸려고 한다. 이는 『3기니』에서 작가가 반전 투쟁을 통해 남성과 여성 간에 새로운 단결이 탄생했음을 축하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태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녀는 "폭군, 독재자"라는 단어들도 똑같이 시효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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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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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국 중간선거가 끝났다.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총 열아홉 번 중 열여섯 번의 중간선거에서 대통령 소속 정당은 하원에서 최소 5석 이상의 감소를 보였다고 한다. 하원 의석이 감소하지 않았던 가장 최근의 예외가 2002년 조지 W.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라니, 벌써 20년 전이다. 이번 선거 역시 민주당이 하원에서 과반을 잃었으므로 예외는 아니었다(20221120일 현재 공화당은 과반인 218석을 확보하였고, 민주당은 212석으로 이전보다 9석 감소한 상태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과반을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나름 선전했다’, “졌잘싸등의 평이 나온다. 여기에는 펜실베니아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존 페터맨(John Fetterman)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그는 트럼프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러스트벨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의 색깔을 빨간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꿔놓았다. 그가 공화당의 붉은 물결(red wave)”, 트럼프 아들이 트위터로 바라마지 않았던 피목욕(bloodbath)”을 막아낸 것이다. 그의 상대는 트럼프의 후원을 받는 닥터 오즈(Dr. Oz)였는데, 그 역시 건강의학 토크쇼로 전국적 유명세를 누리는 셀럽 의사이다. 페터맨은 펜실베니아 부지사로 재임하면서 트럼프가 펜실베니아의 선거부정을 치졸하게 물고 늘어질 때도 물러서지 않고, 조사를 통해 발견한 부정투표 사례 네 건이 다 트럼프를 찍은 것임을 밝혀내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시간당 15달러의 최저임금, 전국민건강보험 등을 공약으로 내세운 그는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이면서 샌더스가 자신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트럼프의 기세를 한풀꺾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헌이 매우 크다. 공화당에서도 트럼프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한데, 과연 다음 미국 대선에서 또 그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미지수이지만, 작금의 미국 정치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문을 접고 이 책을 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진보적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블록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 헤게모니 블록이란 지배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이며, 지배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확고히 한다.”(16)

 

이 얇은 책에서 프레이저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분배와 인정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접속시켜 현재 미국의 정치 현실을 진단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사회 경제구조(분배)와 사회적 지위 질서(인정)의 두 측면에서 옳음(right)과 정의(justice)를 결합하였는데, 이 분배와 인정의 연계(nexus)가 그 헤게모니의 규범적 토대를 구성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러한 일반적 이론화는 현재적 비판대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전체적 세계관이 아니라, 여러 인정 프로젝트들과 조응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젝트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최소한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주의와 견고하게 연결되어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였다고 한다(56-57). 진보적 신자유주의약탈적이고 금권정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자유주의적·능력주의적 인정 정치와 결합했다”(18).

 

프레이저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이 고안하고 레이건이 실행한 신자유주의 우파 근본주의버전은 뉴딜적 사고방식과 신좌파를 계승한 사회운동이 상식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에서는 헤게모니가 될 수 없었지만, 클린턴을 비롯한 신민주당(New Democrats)은 미국 경제의 골드만삭스화와 진보적인 인정 정치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해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인권, 탈인종주의,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 등에 동원되는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등의 담론이 바로 진보적 인정의 핵심적 정서를 이루는데, 이제 이 해방을 향한 비경제적 열망들이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를 쌔끈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위험한 동맹에 카리스마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제공하였다(20-22). 


이들은 자신의 선배격인 뉴딜 연합의 기존 헤게모니 블록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한다. 곧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하였던 조직 노동자, 이민자, 흑인, 거대 산업자본 일부를 대신해서 기업가, 은행주, 교외 거주자, ‘상징 노동자’, 신사회운동, 라틴계 미국인, 청년 세대들을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빌 클린턴은 다양성, 다문화주의, 여성인권을 외치면서 금융화(골드만삭스화)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하였다(22-23).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진보적 인정을 결합했다면, 옆집에서는 반동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반동적 인정 정치를 결합하면서, 종족민족주의, 반이민, 친기독교적인 지위질서의 수호를 내세웠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분배가 아니라 인정의 차원에 있었다”(24). 클린턴이 NAFTA, 중국의 WTO 가입, 글래스스티걸법의 폐지로 본격화된 은행의 탈규제 등으로 세계화와 금융화를 선도하는 동안 미국의 오랜 산업도시들은 역풍을 제대로 맞게 되었고, 이들은 지지정당을 상실한 채 방치되었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까지 겉보기에만 치열한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은 사실 두 버전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문화주의와 종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 사이에서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을 고르든 금융화와 탈산업화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다. ... 노동자계급과 중산계급의 생활수준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26).

 

기성정치 세력은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고 금융화로 빚에 시달리다 집을 압류당한 이 노동자 가족들을 외면하였다. 2015~16년의 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상실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오른쪽에서는 트럼프가, 왼쪽에서는 샌더스가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상식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샌더스가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에 방점을 찍어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를 고발했다면, 트럼프는 똑같은 문구를 채택하면서도 거기에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색채를 입혔다”(30). 

배제의 언어와 포용의 언어가 부딪혔다. 프레이저는 이들이 대변하고자 한 집단, 또는 상상적 헤게모니 블록을 각각 반동적 포퓰리즘진보적 표퓰리즘으로 명명한다(32). 이제 프레이저답게 깔끔한 인정(포용/배제)과 분배(신자유주의/포퓰리즘)의 양축을 가진 2X2 테이블이 완성된다.

 

분배

인정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포용

진보적 신자유주의

(클린턴, 오바마, 펠로시?)

진보적 포퓰리즘

(샌더스, 페터맨?)

배제

반동적 신자유주의

(레이건, 부시 부자)

초반동적 신자유주의

(대통령 트럼프)                    

 

 

반동적 포퓰리즘

(후보 트럼프)


샌더스의 도전은 민주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가뿐히 제압함으로써,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명확히 했다. 당선 후 트럼프는 후보 시절 공약했던 포퓰리즘적 분배 정치를 폐기하면서 한층 더 강력해지고 사악해진 반동적 인정 정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33). 반동적 포퓰리즘이 초반동적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어디 트럼프뿐이겠는가? 그의 뒤를 따랐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도, 또 나름의 개성(?)을 지닌 채 지정학적 특수성을 활용하면서 위기 심화와 국격 저하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의 굥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그람시를 인용하며 트럼프의 반동적 포퓰리즘은 진보적 신자유주의헤게모니의 붕괴 후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시대의 병적 증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39).

 

2. 반트럼프 진영에 대한 우려와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

프레이저는 친클린턴 진영이 바라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복원은 결코 대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는 인정에 의한 분배의 잠식 the eclipse of redistribution by recognition”(55)에 지나지 않는다. 반트럼프 진영에서는 인종과 계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사고하는 좌파의 낡은 경향이 등장하고 있는데, 프레이저는 이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하나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전에 해온 방식대로 분배를 포기하고 인정을 택할 경우, 이는 다시 트럼프를 만들어냈던 조건들을 다시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한 새로운 트럼프들의 등장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곧 반인종주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LGBTQ+, 환경운동 등도 다양성, 능력주의, 역량강화(empowerment) 등 신자유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진 수사들을 동원하면서 분배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는 해방적 외양을 부여하고, 트럼프 진영에는 저 라떼나 홀짝거리면서 잘난 척하는 것들에 대한 적대심만을 높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20-22, 41-42, 64).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프레이저는 우선 두 가지 분리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취약한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고, 둘째, 경제적으로 버림받은 러스트 벨트, 남부, 농촌 노동계급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종주의와 종족민족주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경원시하는 이 두 지지자 그룹이 함께 지지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해야 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의 다른 곳에 위치한 희생자들이고, 이들이 함께 해야만 이 근원적 현실, 곧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금융화의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40, 46-48).

 

프레이저는 이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 블록의 유력한 후보로 진보적 포퓰리즘을 꼽고 있는데, 진보적 포퓰리즘이 새로운 상식을 구성하는 대항 헤게모니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에서의 계급과 지위 문제가 공유하는 공통의 뿌리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금융 자본주의 체제를 하나의 통합된 사회 전체로 이해하면서 여성과 이민자, 유색인, 성소수자가 경험하고 있는 피해를 우익 포퓰리즘에 가까운 노동계급이 경험하고 있는 피해와 연결해야만 한다(46)”.

 

3.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

이 힘든 작업을 해내는 것이 정치인들이나 현장 활동가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올해 75세인 프레이저는 맑스와 폴라니를 결합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밑그림을 제시한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체제가 아니라 그보다 큰 제도화된 사회질서(48)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현행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에 불가결한 비경제적 배경 조건의 집합까지도 포괄한다. 이를테면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임금 노동의 공급을 보장해주는 무임금의 사회적 재생산노동도 그러한 조건의 집합에 포함된다.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와 예측 가능성, 인프라를 공급하는 공적 권력의 조직된 장치들(, 치안, 규제기관, 운영 역량)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을 시탱할 수 있는 거주 가능한 지구를 비롯해 재화 생산에 필요한 필수적인 에너지와 원재료를 제공하는 자연과 우리의 신진대사 간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상대적으로 지속 가능한 조직들도 마찬가지다”(48).

 

여기에서 간략히 요약된 그녀의 아이디어는 올해(2022) 출판된 카니발 자본주의로 결실을 맺은 것 같다.

 

4. 이론적 전유

프레이저는 논쟁과 대화를 즐기는 올해 75(1947년생)의 철학자이다. 푸코, 하버마스, 버틀러, 호네트 등 쟁쟁한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그 대상이 살아 있는 경우는 함께 논쟁하면서, 그 비판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이론적 자양분을 자기화하면서 새로운 작업들의 내실을 다져나간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은 단지 오늘날의 미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치평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한 99%를 위한 페미니즘: 선언(2019), 멀리는 호네트와의 논쟁, 분배냐, 인정이냐(2003)와 후속 논쟁을 정리한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서(2008)의 현재적 귀결이자, 카니발 자본주의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다. 카니발 자본주의의 내용이 자못 궁금하다.

 

5. 다시 미국 정치 얘기...

며칠 전 뉴스는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였던 낸시 펠로시가 의장직에서 내려오면서 차기 지도부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 연설을 보도하였다. “이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시간이 왔다.”




2007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여성의 유리천장 깨기신화의 주인공이면서 트럼프 탄핵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녀가 기꺼이 자리를 비켜준 새로운 세대는 누가 될까? 미국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낮은 반면, 페터맨 같은 민주당 내 좌익 또는 민주당을 선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 같다. 이들이 프레이저가 바라는 진보적 포퓰리즘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다.

 

그러다가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좌파가 부러웠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도 미국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유의미한 저항의 흐름을 꿈꾸고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불평등 감소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력하나마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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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 페미니즘과 기술과학 아우또노미아총서 14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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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러웨이의 스트래선에 대한 의존은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분적 연결들>이 아니라, 90년대 초반의 저작들이 인용된다. 


figuration과 figure(50~)를 둘 다 "비유"로 번역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자는 "형상화"로 후자는 "형상" 또는 "인물"로 옮겼어야 옳을 것 같다. 물론 이 한국말들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뜻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비유"보다는 낫다. "비유"로 옮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푸코의 "생명정치"를 해러웨이가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오랜 궁금증을 조금 풀어주었다. Sarah Franklin의 "생명 그 자체(life itself)"라는 개념이 푸코의 "생명정치"와 해러웨이의 "technobiopolitics"를 매개하는 것 같은데, 프랭클린은 누구인가? 처음 봤다. 


참고문헌에는 르 귄의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이 있는데, 색인에는 르 귄 이름이 없어서 어디에서 어떤 맥락으로 인용되는지 한참 찾았다. 6장의 450쪽 각주 30번(영어판 미주 14번)에 나온다.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면 잘 봐야지...


라투르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맑스에 대한 참조들도 눈에 띄는데, 이것 역시 나중에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제 짬은 그만 내고, 도망친 할 일로 다시 돌아가자. 에효~

아리스토텔레스의 "figures of discourse(담론의 비유?)"는 수사학상의 공간적 배열에 관한 것이다. figure는 기하학적인 동시에 수사학적이다. topics와 tropes는 둘 다 공간적 개념이다. "figure"는 프랑스어로 얼굴을 뜻하는데, 영어에서는 이야기의 윤곽이라는 개념의 뜻을 보유하고 있다. "To figure"는 세다, 계산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이야기 속에 끼다, 역할을 맡다 등을 의미한다. figure는 또한 그림그리기이다. figure는 graphic representation과 시각 형태 일반과 관련이 있으며, 이 사실은 시각적으로 포화된 기술과학 문화에서 적지 않은 중요성을 띠고 있다. figure는 반드시 재현적(representational)이거나 미메시스일 필요는 없지만 비유적(tropic)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figure는 문자적(literal)이거나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여서는 안된다. - P55

Figures는 동일시와 확실성에 문제를 일으킬(trouble) 수 있는 자리바꿈(displacement)을 적어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Figurations는 그 안에 살 수 있는 수행적 이미지들이다. 말로 된 것이든 시각적인 것이든, figurations는 경합적인 세계들이 압축되어 있는 지도일 수 있다. 수학을 포함한 모든 언어는 figurative하다(비유적이다). 곧 비유들(tropes)로 이뤄진다. 곧 우리를 literal-mindedness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bump들로 구성된다. 나는 figuration이 모든 물질-기호론적 과정들의 비유적(tropic) 성질을 명백하고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것을, 특히 기술과학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 P55

Figures는 언제나 해석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종의 시간적 양상(temporal modality)을 동반한다. 나는 푸코(1978)의 생명권력 개념이 신체에 대한 관리행정(administration, 경영), 치료, 감시를 통해 그 살아있는 유기체의 힘을 담론적으로 구성하고, 증가시키고, 관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푸코는 자위행위를 하는 어린이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이론적 개념에 형상(shape)을 부여한다. 이 아이는 맬더스적인 커플, 히스테리컬한 여자, 그리고 동성애자 변태의 형상들을 재생산한다. 이 생명정치적인 형상(인물)들의 시간성은 발전적(developmental)이다. 이들은 모두 건강, 퇴화, 그리고 생산 및 생식의 유기적 효율성 및 병리학의 드라마 등과 연관되어 있다. 발전적 시간은 기독교 리얼리즘 및 기술과학적 휴머니즘의 속성인 구원의 역사의 시간성의 합법적 계승자인 것이다. - P56

이와 유사하게 나의 사이보그 형상들(figures)은 내가 기술생명권력(technobiopower)이라고 부르는 돌연변이의 시간-공간 체제 내에 거주한다. - P57

수렵인 남자(Man the Hunter)가 전후의 보편적 인간 가족 속에서 기술, 언어, 혈연관계의 결속을 구체화하였다. 동일한 적응행동 속에서 기술과 기호학의 어버이인 -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어버이인 - 수렵인 남자는, 아름답고 기능적인 최초의 물건들을 만들었고 최초의 중요한 말들을 말하였다. 이 설명 속에서 수렵은 경쟁과 공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손-눈 협조 체제를 가진 활보하는 두 발의 原人들(protohumans)에게 가능했던 새로운 생존 전략에 관한 것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거대한 두뇌와 힘든 출생을 획득하게 된 이 존재들은, 짝들과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전리품을 공유하는 맥락 속에서, 협동, 언어, 기술, 여행욕구 등을 개발하였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수렵가설에서는 수컷들이 인간 진화의 능동적인 추진력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논리는 1970년대에는 지나치게 강요되지 않았다. - P449

1970년대에는 채집인 여자(Woman the Gatherer)가 전면에 부각되었고, 여성 오르가즘이나 아이에게 유용한 아빠를 여성이 선택하는 것 같은 몇몇 쓸모있는 가족 개혁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멜빵(baby slings), 뿌리와 견과류를 담는 가방(carrying bags), 성인들의 일상적인 가십, 아이들에게 말하기 등이 날렵하게 잘 빠진 발사체(elegant projectiles), 모험으로 가득찬 여행, 정치적 웅변, 위험에 맞서는 남성적 단결들로 이뤄지는 시초에 관한 드라마(originary drama)와 경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각주 30에서 다른 페미니스트 저작들과 함께 Le Guin(1988)이 나옴.] - P450

회절 Diffraction - P63

... 나는 이 책을 <회절>Diffraction, 즉 린 랜돌프가 그린 분열된 인물(a split figure)의 그림으로 끝맺는다. 그 분열된 인물은 얇은 막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간섭패턴들 때문에 의미가 만들어지고 체험되는 방법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 P61

내가 발명한 의미론의 범주인 회절은 서양 철학 및 과학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광학적 은유 및 도구를 이용한다. 반영성이 비판적 실천으로 추천되었으나, 나는 반영성이 반사처럼 동일한 것을 다른 곳으로 환치할 뿐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복제와 원본에 관한 근심과 믿을 만한 것과 정말로 실재하는 것에 관한 탐색 문제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반영성은 기술과학의 지식 속에 있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과 상황적 지식에 관해 사고할 때, 리얼리즘과 상대주의 사이에서의 잘못된 선택을 피하기에는 나쁜 전의(bad trope, 부적절한 비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기호적 장치들 사이에 차이를 낳는 것, 기술과학의 광선을 회절시켜 우리의 생명과 몸의 기록 필름 위에 보다 유망한 간섭패턴을 얻는 것이다. 회절은 세계 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광학적 은유이다. - P63

린 랜돌프의 ... 그림은 다른 곳으로 치환된 동일한 것의 반사가 아닌 간섭패턴을 그리고 있다. 랜돌프는 페미니즘 해석에서나 기술과학 해석에서나 내가 속한 문화의 편협한 천년 말(the end of the millennium)을 전의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강력한 비유(figure, 형상!)를 제공해주었다. 다시 말하자면 랜돌프의 여성은 천년 말이 빗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려하기 위한 장치이다. 목적론에 탐닉했던 사람들이 막판에 그 이상 더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겟는가? - P64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 회절은 원본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 반사들과 달리, 회절들은 동일한 것을 다소 왜곡된 형태로 다른 곳으로 추방하지 않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산업들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회절은 이 고통스러운 기독교 천년 말에 또 다른 종류의 비판적인 의식을 표현하는 은유일 수 있다.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은유일 수 있다. 회절은, 보다 정설적인 표명 뿐 아니라 신성하고 세속적인 기술과학적 설화들 속에서, 기독교 서사와 플라톤주의의 광학이 비스듬히 일그러진 것이다. 회절은 여러 중요한 의미들을 만드는 서술적·그래픽·심리학적·정신적·정치적 기술이다. - P503

<기만당한 여자들: 경계선 밖의 여성들에 대한 표현> 연작을 위해 그린 이 그림에 관해 랜돌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여성의 삶 속에서 강력한 남성 비유에 관한 차단된 기억은,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를 나타낸다. 연륜 및 정신적 변형에 따라 발생하는 추이들, 한 몸에 통합되어 있는 여러 자기들selves이, 두 개의 머리, 여분의 손가락, 중간 지대에 있는 형이상학적 공간 등등으로 표현된 이 중앙에 있는 인물로 구체화되어 있다. 회절은 미지의 세계라는 심연 앞에 놓여 있으며, 미래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은하수에 있는 그 물질의 구조적 패턴은 목련 꽃에서도 반복될 수 있으나, 이런 생산은 아마도 텍사스 출신의 화가들에게는 특이한 시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가 되는 몸들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P503

동시대의 여성들은 여성들의 현실을 SF세계 속에 놓음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간접 패턴으로 구성된 장소에 놓음으로써,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와 다른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부적절하고, 기만적이며, 적합하지 않은, 마술적인 어떤 것, 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우리가 이것(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 - 역주), 즉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 현실적이며(자연적이지 않으며), 삶의 불결함으로 인해 더럽혀진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1993: 9). - P503

만약 당신이 쫓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종류의 세계와 세속적인 것이라면, 당신의 눈에는 질병과 치료가 실제로 동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영성보다는 여러 개의 차이 패턴을 생산하는 회절이 여기에서 요구되는 작업을 표현하는 데 더 유용한 은유일지 모른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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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2-10-17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한가해지시면 글 많이 올려주세욤

에로이카 2022-10-18 06:23   좋아요 0 | URL
네, 뚱이님. 감사합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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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라는 물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간 것 같다. 현재의 기후위기 안에서 형성 중인 녹색계급에 대한 수행적 글쓰기. 녹색계급은 어떻게 해야 긍지를 가진 변혁주체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브레인스토밍. 라투르 글 치고는 읽기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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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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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라투르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은 책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라투르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니콜라이 슐츠와의 공저이기 때문일 수도, 비교적 친숙한 주제인 계급을 다루기 때문일 수도, 또는 번역이 무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는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물이었는데, 신기후체제 하의 새로운 계급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에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1. 계급투쟁: 기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개념

엄밀한 분석과 주장이라기보다는 단상들의 메모이다. 저자들은 계급투쟁 개념의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에 주목한다(16).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이 성격을 잘 보여준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탄생, 성장, 국가권력의 장악, 자본주의의 세계화, 상업공황,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성장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훌륭한 역사적 기술이다. 2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처음에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역사적 경향을 식별해내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재배열하면서 현재부터 미래에 이르는 투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2장과 마지막 4장은 일종의 투쟁의 시나리오, 그것에 맞춰 투쟁을 지도하고 수행(perform)해야 하는 대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수행적 성격에 주목했던 하트와 네그리는 맑스가 그랬듯 자신들의 제국도 도래할 계급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분석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논의들이 있고,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공산당 선언도 교리문답 같은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견실한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쓰여질 수 있었다. 짧은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영화 예고편 광고 같다. 내용을 살펴보자.

 

2.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저자들은 녹색계급이 존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맑스주의만큼은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녹색계급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시나리오처럼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22-23). 그러나 바로 여기에 두 개의 단서를 덧붙인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제 물질은 맑스가 분석했던 인간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식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비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곧 분석대상으로서 하부구조의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 생산체계가 파괴체계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지구의 자연을 생산을 위해 추출해야 하는 자원이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으로 사유해야 한다(26). 곧 생산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 토지, 화폐는 원래 상품이 아니었다는 칼 폴라니의 논의에 접목된다. 사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많은 생태사회주의자들 제임스 오코너, 미카엘 뢰비 등 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나마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생산이 거주가능조건의 파괴와 동일시되는 임박한 파국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는 동원은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극복할 필요성의 제기이다.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차가웠던 물이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생산 체계(system of production)는 생성 체계(system of engendering)에 둘러싸여 있다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면서, 다른 계급들이 생산관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이를 제한하고자 하며, 이제 계급 갈등이 생산체계 내부(1)뿐만 아니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의 인터페이스(2)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34-35). 이 제2열의 투쟁에서 녹색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중심으로 옛 계급들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38-39). 이 서술은 분명 기술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이다. 곧 그러기를 바라고, 저자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바램과 다짐이 투영된 말이다.

 

이 형성 중인 녹색계급은 행위 지평을 생산의 외부로, 또 한 나라의 외부로 넓혀나가야 한다. 이 녹색계급이 대립하는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계급들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므로 반동적이고,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녹색계급은 진보적이며 해방적이다(43). 여기에서 저자들은 해방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해방은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해방이 아니라, 비로소 무언가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의 해방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발전(development)의 끝에 놓인 채 전진할수록 더 물러나는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envelopment), 곧 거주가능조건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전자가 생산 안에서의 사고라면, 후자는 생성 안에서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성 안에서 우리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더 좋다. 인클로저 운동이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면, 이제 이 해방하는 속박은 자연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50-52). 이제 진보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체계 둘레를 감싸고 있는 생성체계로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것이 된다(60).

 

그렇다면 누가 녹색계급을 구성하는가? 7장에서 잠재적 구성원들이 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토착 민족, 미래 세대, 지식인, 종교가 녹색계급을 구성 중이지만, 정작 그 계급은 자신이 잠재적으로 다수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곧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긍지가 없다(73).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축 계급으로서의 긍지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빌어온다. 이러한 차용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미래의 기동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객관적이익 심지어 그것이 생태적 이익이라고 해도 -에 매달리지 않고, 매번 문화 전체를 휘저어 섞어야 다른 계급들을 설득시켜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모방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81-82).

 

녹색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9장의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녹색 계급의 주제는 일국의 영토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지구(global? earth?)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권력 획득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장치를 차지해야 하며(97), 풀뿌리부터 건설되는 정당이 필요하다(103). 그래야 투표할 수 있다. 근대화와 글로벌화의 국가가 아니라 생태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녹색계급의 정당은 아마도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현대의 군주로서 지도를 수행하는 당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칼 슈미트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동지와 적을 새롭게 구분하며, 기존의 계급제휴를 붕괴시키고,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뭔가 역할을 하기는 바라는 것 같다(111-112). 또 언젠가 올지 모르는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113). 그런데 그 당의 이미지, 또는 짙은 안개 속에서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녹색계급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삐에로(112, 97)라면? 맥이 빠지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삐에로가 허당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로 변신하여 모든 기후악당들을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가능도 할 수 있겠다만... 글쎄... 이 맥빠짐은 무엇일까? 내가 그저 우리가 잠재적 다수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한탄과 불평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04).

 

3. 부록

이상이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쓰여진 76개의 메모를 정리하고, 아주 약간의 느낌을 덧붙인 것이다. 출판사가 이 분량만으로는 책을 내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역자 후기를 포함하여 다섯 편의 짧은 글들이 더 실렸다. 이 중에서는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론을 소개한 역자 후기와 슐츠의 계급이론을 소개한 김환석의 글이 볼 만하다.

 

4. 단상과 의문

라투르 책 치고 쉬워서 좋았지만,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단상과 의문을 글로 적어 남긴다. 라투르와 슐츠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녹색계급에게 우리가 함께 싸우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긍지, 곧 집합적 효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와는 별도로 나는 이 의도가 좋다. 그토록 맑스주의를 싫어했던 라투르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다니. 장하십니다! 좋습니다! 나도 힘을 합해 싸울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바이럴 효과를 노리는 일종의 카피캣 마케팅이 아니려면, 몇 가지 지점이 좀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들은 계급투쟁을 생산체계 내부의 기존 계급투쟁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간의 투쟁으로 분류하는데, 두 투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사회적 계급과 지구사회적 계급에 대한 슐츠의 구분(140) 역시 양자를 추상적으로 범주화할 뿐이다. 물론 슐츠의 글을 직접 다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난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과 이 프로젝트의 정합성과 갈등의 지점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는 으로 이뤄진 것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추상을 통해 이 선들의 네트워크를 으로 인식하여 세계를 절대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이 면을 한 번에 뒤집으려던 맑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 294-311). 그런데 그것이 생성체계가 밖을 감싸고 있는 생산체계의 이미지든, 슐츠가 표로 정리한 두 계급의 구별이든 추상의 산물 아닌가? 또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라투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뇌피셜이 자가발전한 꼬투리 잡기일까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녹색계급은 해방을 지향하는 좌파이지만, 그저 반자본주의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21),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개인의 호오를 떠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녹색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수행할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좌파가 가능한가? 내가 구닥다리라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신이 녹색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이런 팜플렛을 쓴 저자들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비교될 만한 대단한 글은 아니다. //코 아니다! 이것이 무언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글이라면, 그 도래할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녹색 계급(ecological class) 자체라기보다는, 이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구일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과하다 싶은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에 지루했다면, 반대로 이 글은 맑스의 계급 이론에 대한 선택적 단순화 때문에, 그리고 라투르가 이전에 맑스주의에 대해 써댄 말들 때문에 그리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짧고 쉽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들을 제기하게 만든 책이다.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가 너무 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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