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 강의가 본문 격으로 실려져 있고, 부록으로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실려 있으며, 책의 끝에는 정운영 선생에 대한 추도사가 실려져 있다. 뒤메닐과 레비의 부록글은 윤소영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좌파 경제학 비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독이 필요한 글이며, 책에서 가장 마음에 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록과 추도사는 서평에서 제외하고 다섯 개의 강의를 통해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펼치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워낙에 이말 저말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요를 정리하고, 다음에 평을 하기로 한다. 개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눴다: 1. 역사동역학, 2. 역사적 자본주의론, 3. 이데올로기 비판, 4. 윤소영의 역사, 현실 인식,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앞의 개요 부분, 특히 중에서도 1, 2, 3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다.

 

 

개요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책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범위는 알튀세르가 [자본] 난점(논리와 역사의 관계) 공백(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칭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란 이러한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칭하는 것이다 (67). 따라서 지은이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며,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다. 전자는 2강과 3강에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통해 다루어지며, 후자는 4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또 지은이는 알튀세르적인 경제학 비판은 곧 그로스만의 경제학 비판을 현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69, 105).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알튀세르 초기의 개념을 차용해 본다면, 이중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있다.

 

1.

                            일반성I                                                               일반성II                                          일반성III

난점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       혁신된 그로스만적 계보

공백    스피노자, 게루, 마트롱, 바디우, 이리가레, etc.                 상동                                              인권의 정치

 

[약간의 caveats 추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반성 III 현재 주어진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의 상이다. 이데올로기(일반성I) 과학(일반성 III) 대한 초기 알튀세르의 엄격한 구분은 무시한다. 윤소영은 구분이 비판사회학(일반성I) 경제학 비판(일반성 III), 소외론(일반성I) 이데올로기 비판(일반성 III) 간의 대조에는 적용될 있고, 이것은 알튀세르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 싶어하), 비판사회학과 소외론은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취급한다.]

 

1.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뉴턴의 동역학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가속도법칙과 같은 운동의 법칙이며,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중력법칙과 같은 힘의 법칙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할 있는 행성운동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다 (133). 뒤메닐과 폴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경험법칙이 아니라 가속도 법칙과 같은 정의법칙이며,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행성운동법칙과 같은 경험법칙이다 (133, 138, 141). 

 

 

2.

                                운동의 법칙                                    힘의 법칙                         행성운동법칙

정의법칙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            

경험법칙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         이윤율 하락의 법칙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자본의 추상화는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노동의 구체성은 노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논리와 역사 양자의 결합은 역사동역학 역사적 자본주의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동역학 모델에서의 궁극적인 설명대상인 동시에, 동역학 모델 외부의 상쇄 경향과의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역사동역학 바깥에 위치해 있다. 반면, 열역학 모델은 이윤율 하락 법칙과 이에 대한 반작용 요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0). 열역학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엔트로피(비가역성) 증가의 법칙인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적 요인의 네겐트로피(가역성) 상호작용을 통해서 설명된다. 뒤메닐은 이러한 역사동역학에 개의 동역학(부문간 경쟁, 경기순환) 추가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개념적 패러미터들을 정립한 , 뒤메닐과 아리기를 따라, 이윤율의 이론궤도와 현실궤도를 추적한다 (161-165, 219).

 

2. 역사적 자본주의

지은이는 1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혁신의 역사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242).

(1) 1차 산업혁명              1780년대-   : 면직물 산업,

(2) 1차 교통, 통신혁명      1850-60년대: 철도, 전신            1880-90년대: 전화

(3) 2차 산업혁명              1910-20년대: 자동차 산업

(4) 2차 교통, 통신혁명      1950-60년대: 항공, 우주산업      1980-90년대: 컴퓨터, 인터넷산업

 

위의 1에서도 나와 있듯이 윤소영은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등에 주로 의지하여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동역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금융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에포크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제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요한 변화는 법인자본주의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단계가 관찰된다 (196, 202-220): (1) 1890-1900년대의 법인혁명, (2) 1910-20년대 관리자혁명, (3) 1930-40년대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형성된 법인자본의 다양한 제도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2차 교통, 통신혁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금융화와 법인자본주의 제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여기에 9.11 이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평행적 발전 (251)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3. 인권의 정치

발리바르에 의해 스피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마르크스에게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충할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인간학에는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논리적 궁지,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성이 아닌 개인성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대중의 공포에서 찾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서 대중의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인권의 정치라는 비철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283). [cf. 여기서 철학과 비철학의 결합은 난점으로부터 야기된 논리와 역사의 결합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진경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 같은 것처럼 읽힌다.]

 

인권 개념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시민, 시민-주체를 뜻한다. 인권의 정치, 시민권의 정치의 메커니즘이 봉기(주체화) 구성(주권적 주체로서 시민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인권의 정치는 바로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에 더하여 자유=평등이라는 등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가지 등식을 선언하는 , 그것이 바로 봉기이다. 봉기적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constitution, 헌법)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전개된 헌법의 토대가 소유인가 공동체인가라는 쟁점은 현대정치를 결정하는 첫번째 모순[소유-공동체 모순]이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두는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순은 지양되고 가지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소유 내부에서는 소유권-노동권 모순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민족공동체-계급공동체(노동자연합) 모순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개를 통해서 소유권과 민족공동체가 결합하고, 노동권과 노동자연합이 결합하면서 현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301). 결합 간의 대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이 현대정치를 특징짓는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지 역사적 형태를 갖고 있다: (1) 기독교적 공산주의, (2) 시민적 공산주의, (3) 마르크스주의, (4) 페미니즘.

 

4. 윤소영의 역사현실인식

책의 도입 부분인 1강에서 윤소영은 1979-80년의 경제위기와 87년의 3저호황, 97년의 경제위기 등과 정권의 성격, 운동권의 흐름들을 일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의 1979 4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Volcker Recession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에 따라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은 남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일단은 무척 새로운 해석이다.

 

97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본질은 이윤율의 급속한 하락, 원인은 금융화와 재벌이다.

 

윤소영은 1981년경 시작된 미국경제의 에포크가 2012-13 정도에 종료될 것으로 파악한다 (58, 153, 158, 163-4, 185-186). 그는 1929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2012 대선에서 집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윤소영이 보기에, 위기에 집권한 좌파당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산주의적 이행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약 2012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행을 뜻하므로 역사의 반동. 그러나 윤소영이 보기에 2010년대의 최종적 위기는 영국자본주의에서 미국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결되었던 지난 위기와 달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이행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한 공산주의적 이행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노동자는 대중에서 계급으로 떨쳐일어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뀐다. 이거 뭔가? 이게 윤소영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로스만의 붕괴론인가?]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윤소영은 여기저기서 난삽하게 자신의 정치적 판단들을 밝히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별노조 대신 일반노조,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 (2) 성매매금지법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이나 주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성을 인정해 한다. (3) 학교는 확대되어야 하고, 가족은 축소되어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합이 좋은거다. (4)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것은 뻘짓인데, 소액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초민족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해주자는 것이다 (233-234, 236). (5)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웃기는 거다 (297-8). (6)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주목받는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은 금융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원인에 대한 투쟁, 금융세계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윤소영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식으로 엄밀한 서평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경제수학도 젬병이고, 불어도 못하며,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베토벤과 PD 음악에 대한 윤소영의 말들을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걸 하려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헛물만 가능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기로 했다. [ 사실 윤소영의 절대지에 대한 추구는 나름대로(!) 존경하지만, 절대미에의 탐닉과, 절대지와 절대미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어떤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특권화하려는 것은 미안하지만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1강에서 나온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79년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새로웠다. 일리 있다. 그런데 논의를 지배블럭으로부터 확장시켜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밀한 역사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은 윤소영이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럴 능력도 될거라고 본다. 주장이 약빨이 먹히려면, 항쟁참여자들이 자신의 적을 뭐라고 규정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된 것인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윤소영은 '협상된 이행'으로서의 문민화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신군부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본다. 민주화라는 말은 나온다. 민주화에 대한 경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주류화되기 이전 전노협 시절의 남한 노동운동이 브라질이나 남아공 같은 사회운동노조주의라고 있다는 주장과도 닿아있. 그런데 브라질과 남아공의 사회운동노조주의에 대한 Gay Seidman 연구, Manufacturing Militance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지역운동과의 결합이라는 미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노동계급운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것이었다. 남아공과 브라질의 경우는 노동운동이 민주화를 추동했던 반면, 87 7, 8, 9 투쟁은 6 민주항쟁이 갖고 권력 공백이라는 정치적 기회에서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추동자였다기 보다는 수혜자였다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참조). 또 90년대 중반까지 전국연합의 존재는 바로 노동운동이 운동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바로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정치적 방향이 아니라, 서술개념으로서) 쉽게 8-90년대 남한에 적용할 없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통해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인권의 정치 , 그동안은 말로만 듣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있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에 취향이 없다. 그렇다. 이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주체의 양분(266-8)을 설정함으로써, 개인성과 특이성, 필연성과 우발성 끊임없는 사변적 이항대립의 늪에서 헤매다 정작 현실적 설명대상으로 돌아와서 현실적 관계들의 변화와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설득하려면,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틀을 통해서 설명했을 , 얼마나 설명이 되는 지가 보여져야 한다. 윤소영이 후배들에게 기여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법칙을 받아들여야 하고, 영어만 갖고는 되니까 불어도 하고, 경제수학도 잘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갖고는 안된다. ? 우리가 윤소영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지 불어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안의 부분으로서 남한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을 원하는 것이다. 말미(330-335)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종속심화-독점강화 명제에 대한 현재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자기비판과 종속심화를 설명하는 데에 존재하는 난점이 피력된다. 그가 문제들을 딛고 신자유주의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이론적 문제를 해명하며 화려하게 복귀할 것을 기대해본다. [이왕이면 2012년 이전에...]  

 

윤소영 선생에 대해 거는 나의 기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발리바르와 브뤼노프 등이 전개했던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이론이 개진되며, 이것이 트론티나 네그리의 사회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대비된다 (92, 201). [이 점에서 이는 이진경이 주장한 바 있는 '기계적 포섭'과도 대비될 수 있다.] 이 틀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라는 맑스주의적 가치론의 기본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나 (덤프트럭 운전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자기착취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점이다. [농민의 노동자성에 대한 이 주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오래전 김준보 선생이 한 적이 있다고 얼핏 들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한 글인데, 며칠전 번역되어 나온 [이윤에 굶주린 자들](울력, 2006)에 실려 있는 르원틴의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도 참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이론적, 현실적 파급력이 매우 큰 주제이다. 달리 말해, 광범위하면서도 심도있게 논쟁될 수 있고, 이론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주제다. 제대로 한 번 파고들 필요가 있으며, 윤소영 선생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구조와 주체의 양분은 피치못할 추상의 폭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의 폭력은 윤소영의 현실 이해에 그대로 재현된다.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가 옳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알튀세르가 옳다는 이러한분법적 현실 인식은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모습 사이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나름 공부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나 투쟁, 중에 하나 골라서 그것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다름 없이 들린다. [그나저나 사르트르는 현장활동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정당화 의도가 엿보인. 그러나 사람들이 윤소영에게 이론외적으로 불만인 것은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한다는 (훌륭한!) 사실이 아니다. 세간의 불만의 초점은 그가 인권의 정치 얘기하면서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냉소만을 보인다는 것에 맞춰져 있. 윤소영 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혁명의 비극적 숭고성은 베토벤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순간이나, 자유결합을 실천하는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봉기의 순간,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카이로스적 순간에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조직을 위해 노력하는 크로노스의 일상적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거기에는 냉소가 아니라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민주의에 대한 거부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운영 선생은 윤소영이 過識하다고 했단다. 윤소영 선생의 냉소는 어쩌면 자신의 과식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소영은 지적 차이를 결국에는 소멸되어야 것이라는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과 같은 적대적 모순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설정해놓은 일반성 III, 그로스만적 전통(붕괴론)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동시에 알튀세르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실천의 특권화, 자기정당화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윤소영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의 순간이라는 카이로스적 관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153, 344). 자본주의적 이행과 공산주의적 이행 간의 충돌이라는 이 세계관은 좀 다르긴 해도 월러스틴의 것과 유사하다. 어디 2012년을 한 번 지켜보자. 그리고 그 이후 윤소영 선생이 뭐라고 하는지도...

 

 

사족

 

  책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강의를 녹음한 것을 다시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치고는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다. 지은이의 잘난척과 뒷談話는 재미없는 강의 들으면서 졸고 있는 학생들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는 약빨이 먹혔을 몰라도, 그것을 활자로 접해야 하는 독자에게는 흐름을 끊는 것이다.부르디외와 라뒤리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나, 박현채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 같은 고인들도 속으로는 PD 옳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야부리를 듣자고 독자들이 윤소영의 책을 사보는 아니다.  강의 도중 번번히 나오는 과천연구실에서 나온 책광고들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참고문헌들을 각주처리해서 쪽수까지 알려주는 지은이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강의녹취록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좀더 제대로 , 이두가 아니라 한글로 쓰여진 제대로 책을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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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 92 밑에서 7 : 트론트 -> 트론티

 

 

궁금한

1.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경험법칙인가, 정의법칙인가, 혹은 양자를 매개하는 어떤 것인가?

2.        일반성II (유물변증법) 원칙상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성 I III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논리와 역사의 결합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은 동일한 것인가? 만약 동일한 것이라면,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대중의 공포) 상응할만한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도 동일한 방법으로 주목되는가? 혹시 난점과 공백이 마르크스의 아포리아인가?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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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z 2006-03-2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후, 올리시는 글들 매우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도 사 볼까 했는데, 워낙 정리와 비평을 잘해 주셔서 그다지 얻을 건 없는 책이겠구나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세요. ^^

에로이카 2006-03-2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raz님 반갑습니다. 제 글을 재미있게 읽으시는 분이 다 계시네요. 근데... 저 때문에 이 책을 안 사보시기로 했다는 건... 감히 부탁드리는 건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윤소영 교수 만큼 한 길 열심히 가시는 분도 드문 세상인데... 마음을 착하게 먹고, 배운다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또 배울 게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 지은이를 원래부터 싫어한다면 모를까.... 저도 나중에 moraz님 서재에 한번 놀러갈께요..

moraz 2006-03-24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사실 윤소영 교수 책이 5권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읽은 것은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 밖에 없네요 -_- (그 책은 얇지만 몇 가지 중요한 조류를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은 사지만 그런데 웬지 손은 잘 안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사 놓고 또 안읽는거 아닌지 몰라 망설이던 차에 cophonyinme님의 글을 보니까 제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 배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 말씀하신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 그리고 저는 서재에 가도 리스트 밖에 없고요. 대신 지금 다른데로 옮길까 말까 생각중인 moraz.egloos.com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어요.

2006-08-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박승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이 책은 박승호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지은이는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통해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조류들을 살펴보고 있다. 아글리에타와 셰네 등의 조절이론, 네그리의 자율주의 이론, 브레너의 국제경쟁론 등이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고, 그 비판의 준거는 홀로웨이, 본펠드, 클라크 등이 주도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이다. 그런데, 저자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굵직한 입장들이 워낙에 논쟁적인 저작들을 생산해낸 덕에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이론과 입장들은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전체 스펙트럼을 거의 다 포괄하는 듯 싶다. 워낙에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는 탓에 제 입장에 대한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가 불균등해 보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을 취미나 구색 맞추기 수준에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본 서평은 지은이가 펼치는 방대한 문헌 검토와 비판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책 두께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의 엑기스는 20페이지도 채 안되는 마지막 5장에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다. 책을 통독할 수 없는데, 내용이 궁금하면 5장을 보면 되고, 시비거리를 찾고 싶으면 [디지탈 말]에 실린 정성진 선생의 서평을 보면 될 것이다.


2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장을 통해 지은이는 맑스의 물신주의 비판을 강조함으로써,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에서 통상 간과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복권하고자 하는 야심을 밝힌다. 그는 자본이 노동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자본의 모순적 존재형태에 주목함으로써, 대부분의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의 초점에서 비껴나가 있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물신주의비판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적 방법론이라면,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중심 개념이자 기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중의 추상'으로서의 가치의 자기증식운동, 즉 자본운동은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일시키고 끊임없이 변혁해가는 원동력으로 현상한다.” (147).

3장 전반부에서는 70년대 서독 “국가도출논쟁”에서도 인용되었던 자본주의 국가의 중립적 형태에 대한 파슈카니스의 유명한 문제제기를 매개고리로 도입하여, 방대한 맑스 저작의 독해를 통해 2장에서 형성된 물신주의 비판의 강조점을 필자가 상당히 많이 의지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의 정당화로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지은이의 주목을 받는 개념은 “경제적 강제”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확대재생산은 그것의 ‘경제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분리된 계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양자는 ‘경제적 강제’의 매개를 통해 상호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206). 따라서 “자본축적 형태와 국가형태는 동일한 계급관계 및 계급투쟁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 (208).

3장의 중반 이후는,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의 총체는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224)라는 홀로웨이의 입론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제적 국가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국민국가형태, 제국주의에 의한 국가체계 규정, 세계시장, 세계화 논쟁 등을 이전에 전개된 논지와 맑스와 여러 맑스주의자들(만델, 홉스봄, 본펠트, 홀로웨이)의 논지에 입각하여 두루 살펴보고 있다. 서평자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지만, 할 말도 좀 있는 부분이다.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형에 대한 좌파적 분석들, 즉 브레너, 조절이론,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개방적 맑스주의(, 그리고 이젠 좌파라고 하긴 좀 그런 카스텔까지 곁다리로) 등이 검토, 비판된다. 이를 통해 지은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가지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627-8).
1.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는 ‘지구적 자본’의 출현으로 표현되고, 자본간 경쟁의 중층적 형태를 통해 과잉설비, 과잉생산의 조건을 형성한다.
2.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계급 역관계가 부과하는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수요 성장의 둔화와 저성장을 초래하며, 수출지향적 축적형태와 국민국가간 경쟁을 강제한다.
3.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 및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노동자계급의 저항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부과받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통화주의 정책의 후퇴로서의 케인스주의적 신용팽창 정책의 재도입과 그에 따른 기업과 가계의 부채경제화를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금융적 축적’ 전략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직접금융시장의 발달을 가져오는 한편, 자본은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는 구별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한 ‘도주전략’으로서 ‘금융적 전략’을 추구한다.
그리고 (주로 셰네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적 통찰을 도출해낸다: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 가지 특징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치법칙의 역사적 현상형태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다. 요컨대 생산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577).


3.
돈을 주고 책을 사봐야 하는 상품구매자로서의 독자 입장에서 책 한 권에 대한 평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가격 대비 만족도’에 의해 좌우된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최상급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박승호 선생은 이 600여페이지의 책을 쓰기 위해 그것의 백수십 배에 달하는 독서를 했을 것이다. 지은이가 여기서 한 것처럼 맑스 원전에 대한 방대한 독서와 함께 현대 좌파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 조류들을 체계적으로 한 번 정리해보겠다는 엄두를 이전?국내의 그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자신의 입장을 국독자론이든 조절이론이든 자율주의 맑스주의든 브레너의 자본간 경쟁 분석이든 서구에서 개진된 입장들과 동일시하기는 쉬워도, 이들 전반에 대한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그 조감도 위에 희미하나마 위치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방대한’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이와 비슷한 공부를 하는 동료들과 후배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고마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박승호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 값진 일이다. 나는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통독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갈수록 느끼는 거지만, 무언가를 읽고, 그것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덕분에 이후의 공부에도 문헌 속에서 헤매는 시간을 못해도 반은 줄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책은, 만약 그것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경제주의 비판이라도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출판될 수 있다는, 그래서 학술원에 의해 “우수학술도서”로까지 선정될 수 있다는 좋은 전례를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치적 입장의 좌우를 막론하고, 그 어떤 경제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경제주의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영역의 우위를 표명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별로 파편화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른 것이다. 전자에도 훌륭한 사례가 있을터이지만, 이 책의 지은이의 입장은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지은이는 전자를 수행하는 이들 중 다수와 달리,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라진 ‘계급투쟁’의 복원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는 형태 분석을 통한 물신주의 비판[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물신화되어 현상한 것(형태)과 거기에 깃들여 있는 내용 간의 대비, 곧 사물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과 자본과 노동의 관계 (곧 계급투쟁)간의 대비]이 방법론적으로 충실하게 구사됨으로써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 경제주의 비판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평가가 필요한 문제이지만, 그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서평자도 공감하는 바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어떤 정통 맑스주의자에 의해서 쓰여진 일국적 분석단위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지은이가 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물신주의 비판의 연장이었다. 곧 ‘국민경제’를 국민국가의 ‘경제적 형태’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 산출된 물신적 의식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298). 좌파 경제학 비판에 만연해 있는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지은이의 이러한 비판은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월러스틴의 비판과 내용상 유사하다. 월러스틴은 단일정치체가 경제를 관장하는 세계제국과 달리, 자본주의는 단일정치체가 부재하며,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조응을 통해 작동한다고 개념화한 바 있다. 양자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언급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는 하나의 유기적 총체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의 토대가 ‘경제적 형태’의 총체로서의 세계시장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이라는 토대에 입각한 상부구조는 세계국가가 아니라 ‘국제적 국가체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는 세계국가형태가 아니라 국민국가 형태로 총괄되기 때문이다” (289-90). 
 

[2006. 2. 14. 추기: Peter Burnham (2002). "Class struggle, states and global circuits of capital" 122쪽을 보면, 월러스틴에 대한 이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번햄은 Picciotto(1991)와 Brenner(1977)에 근거하여, "생산관계를 변화시킨 것은 무역이 아니고, 봉건제와 포스트봉건제적 생산관계 간의 모순이 세계시장과 국가형태 양자의 변화로 귀결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 짧은 구절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월러스틴과 브레너 간의 절충을 모색하는 듯 싶다. 절충이 아니라 종합이고, 지양이면 더 좋겠지만... 아무튼 지양의 싹을 갖고 있다고는 봐줄 수 있을 것같다. 피치오토의 글을 한 번 찾아봐야 하겠다. 박승호 선생의 이 책은 나를 이 끝없는 차연(differance)으로 이끈다. ]
[2006. 3. 1. 추기: Sol Picciotto (1991). "The Internationalisation of Capital and the International State System" 218-9쪽을 보면 브레너의 월러스틴 비판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4.
책이 포괄하는 제 분석의 넓이는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지만, 분석의 깊이나 지은이의 독창성(그리고 지적 용기)은 사실 좀 아쉽다. 물론 서평자는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다루고 있는 여러 비판적 분석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은 탓인지,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의 불균등함, 곧 깊이의 불균등함이 여과없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지은이는 제 비판들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수시로 이에 개입하는데, 어떤 경우는 그냥 한마디 참았으면 더 낫지 않았나 싶을 때가 꽤 많았다. 비판이라기보다는 꼬투리라는 인상을 받는 곳들이 다소 있었다. 어차피 정리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이 책의 본문 격인 2, 3, 4장은 모두 소결을 통해 끝나는데, 소결에서는 본문에서 논의된 바에 기반하여 무언가 진일보된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각 장 본문에서 이야기된 바를 몇 페이지에 걸쳐 요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책 전체의 결론인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 결론이라 할만한 무언가 새로운 말은 전혀 없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책 전체의 유기적 연결에도 장애로 작용한다. 이 파편적 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책은 세 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일 뿐, 응집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라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물론 이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의 광대함 때문이고, 그것이 또 미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경제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물신주의 비판을 통해 계급투쟁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무대로 복귀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탄탄한 기반 위에서 출발한 듯 싶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우리의 이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저자는 너무 신중하다. 수많은 일급 맑스주의자들의 이름이 나오며, 저자 나름대로 이들과 대결하기도 한다. 나는 지은이가 이 책의 주요비판 대상으로 설정한 세 조류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증분석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논문과 관계되어 있는 다른 탓인지… 도무지 이 책에서는 저자가 세상에 대해 내지르는 게 없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저자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개방적’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추상성과 일면성으로 인한 ‘계급환원주의’적 경향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532). 죄송하지만,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일국적 분석단위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지은이가 맑스의 원전 이해에 강력한 내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최초 방향 설정에서는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못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고,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대립되는 논점이 명확히 드러났어야 하는 부분, 무엇보다도 가치법칙의 작동 범위 문제나 핵심과 주변 간의 불평등 교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미흡하다. 가치법칙은 원칙상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또 이들 간에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cf. 로스돌스키, 돕). 게다가 국민국가들의 국경은 자본주의 세계시장 내부의 상품 흐름들에게 일종의 문턱(threshold)으로서 역할한다 (cf. 그로스만, 에마뉴엘). 지은이는 이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논란의 여지는 무시하고) 가치법칙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그 작동 범위로 한다고 하면서, 자세한 논의는 정성진 (1984)과 이채언 (2002)을 참조하라고 각주에서 말한다. 나는 지은이가 말한대로 이 글들을 기꺼이 찾아볼 것이다. (정말 착한 독자다. 지은이가 시킨대로 한다. 난 보통 이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책의 완결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저자는 가치의 실증분석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그 모호한 주장 - 가치 법칙은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 변형되지만 관철된다 - 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저자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에 대한 얕은 이해 수준을 내비친다. 저자는 종속이론이 주변국가들의 발전을 “중심/주변관계에서 부과되는 외적 제약이라는 맥락에서만 파악”하고, “그 관계의 내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할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218-9). 이것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종속 분석이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못해서이지, 종속이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브라질의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를 분석한 Ruy Mauro Marini의 논의나 페루를 중심 대상으로 제국주의와 배제적 주변화(marginalization)를 분석한 Anibal Quijano의 저작들을 지은이가 접해본 바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아리기를 자주 언급하면서도, 그의 주저작인 The Long Twentieth Century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으며 참고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저작 이후부터 아리기의 사전에서 “반주변부”라는 단어가 사라지는데, 저자는 이를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것이야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이긴 하다. 나중에라도 읽고 배우고 비판하면 되는 문제니까…. 그러나 다음 문제는 이보다는 좀 심각해 보인다. 지은이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이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외적 연관으로만 파악한다고 하지만, 지은이가 의지하고 있는 홀로웨이의 헤게모니/종속 혹은 지은이의 제국주의/신(재)식민지의 이분할 역시 외적 연관을 넘어서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계체계 분석이 더 많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데에 비해, 지은이나 홀로웨이의 주장은 역사적 연구가 별로 뒷받침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세상에 대해 얘기한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은이가 이제는 세상에 대해서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기를.... 그것을 통해서 중심과 주변의 내적 연관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만약 이런 작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은이가 세계체계 분석이나 종속이론을 외적연관에 그친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흔한 야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보자. 지은이는 셰네(Chesnais)와 강남훈을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4장 내에서는 좀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책 전체 수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응집성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이 점을 좀더 신경 썼다면, 곧 맑스에게 있어 (특별)잉여가치의 이전으로서의 지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전의 케인스주의 시대에는 지금과 또 어떻게 달랐고, 그것이 계급투쟁에 끼친 함의나, 반대로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는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책 전체의 응집력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책의 한 부분에서 지은이는 (이른바 '긴 20세기'의 역사를) (1)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 (2) 케인스주의 시대, (3) 신자유시대로 국면 구분을 시도하는데, 이를 좀더 발전시켜 자본/노동의 대립, 중심/주변의 대립 등이 제 국면에 따라 어떻게 다르면서도 유사하게 전개되는 지를 각 국면 간의 비교를 통해 더욱 풍부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루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책은 이 시대에 책 값하는 몇 안되는 책중 하나이다. 꽁으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 읽고 “배운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말하면 너무 상투적인 선전일까? 하지만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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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6. 추기: 이 책을 읽은 후 이 책에서 인용된 참고문헌들 중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인용한 참고문헌들에서 원래 주장하는 바와 지은이의 이해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몇몇 있다.

(1) 서평 본문에서 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비판의 공을 지은이 박승호 선생에게 돌려 칭송했지만, 이는 모두 박승호 선생의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박승호 선생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 같다. 또 박승호 선생이 인용한 홀로웨이나 본펠트, 번햄 등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저자가 논문의 전반부에서 방대한 맑스의 저작을 인용, 재구성한 것 또한 저자 자신의 역량이라기 보다는 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간접적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맑스로부터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들이 똑같이 위의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에 그대로 나온다.)

(2) 지은이는 만델의 Late Capitalism을 인용하면서 전자본주의적 세계시장과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맑스의 주장, 그리고 지은이가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Werner Bonefeld가 "The Spectre of Globalization: On the form and Content of the World Market"를 통해 펼친 주장- 세계시장은 자본주의의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그 자신의 전제이자 동시에 결과이다 - 과는 모순된다. 이 점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브레너의 70년대식 이해에 머물고 있다. 지은이가 브레너나 만델의 생각을 따를 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러려면, 그가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본펠트의 이해와 대결하는 과정을 책에서 전개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매뉴팩쳐와 대공장산업을 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로 구분하지 않고 자본주의 내부의 다른 국면들로 이해하는 스위지의 견해가 보다 맞다고 생각한다.

(3) 서평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성진(1984)과 이채언(2002)의 논문들은 저자의 논지를 뒷받침한다기 보다는 저자는 얼버무리고 넘어간 문제들을 좀더 잘 보여주고 있다. 정성진의 논문은 논문이 쓰여지던 당시까지의 국제적 불평등 교환에 대한 논쟁 구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덕택에 가치의 국제적 작동범위에 대한 서평자 본인의 이해란 대략 그 논쟁 구도 중 어느 한 편에 가까운 것이며, 그것도 아주 초보 수준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논문이 오래된 탓에 끝에서 불평등 교환의 이론적 대안을 생산양식접합론에서 찾고 있는데, 정성진 선생이 아직도 그러한지 궁금하다. 요즘도 생산양식접합론 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이채언의 논문은 국제적 가치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환율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채언 선생이 착취를 이해하는 방식 - 착취는 등가교환"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며,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 -은 다소 혼란스럽다. 무엇보다도 이는 착취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모든 것을 지시함에 따라 더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비개념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이는 잉여가치의 착취와 잉여가치의 이전 양자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다른 한편, 여기에서 이채언은 가치법칙이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되어 관철되는 경우와 본질적으로 변형되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구분하는데, 박승호 선생의 주의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박승호는 그냥 애매하게 정성진, 이채언 두 훌륭한 맑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대해 살펴본 좋은 논문들이 있고, 그것을 보면 되는데, 거기에 따르면 가치법칙은 일국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범위에서도 수정되건 본질적으로 변형되건 작동한다더라 하는 식의 안이한 처리를 하고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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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6-12-02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함의 면에서 훌륭한 저자에 훌륭한 서평자시군요. 600쪽이라는데 펴보고 재밌으면 어쩌나 걱정되는군요.

에로이카 2006-12-0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나름 재미있게, 또 열심히 봤어요. 그런데 만약 지금 다시 서평을 쓰면, 좀 다르게 쓸 거 같네요... 그래도 현대정치경제학비판 제조류에 대한 좋은 소개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남구현 지음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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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993년에 완성된 남구현 교수의 박사논문의 일부를 10년도 지난 2004년에 번역 출판한 것이다. 지구화에 관한 마지막 장은 2003년에 새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이 있지는 않다.

 

저자는 가치, 잉여가치, 자본, 계급, 국가, 제국주의로 확장되는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적용하여 국가와 제국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 심사시에는 동구의 정통 맑시즘과 서구 맑시즘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 새로운 이론적 단초를 열어주었다는 과찬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뻥에 너무 순진하게 넘어가서 책을 사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허장성세도 눈에 거슬린다: "잉여가치의 범주를 출발점으로 '국가'와 '제국주의'의 두 범주를 발전시키고자 시도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다. 이는 오로지 범주적 발전, 대립물의 통일과 반대물로의 전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의 이중적 변증법 등 주로 맑스의 자본 분석에 구사되어진 변증법적인 사고로부터 배운 방법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능했다" (7). 남구현 선생이 처음 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책의 품질이나 저자의 성취를 평가할 때,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스스로 목적으로 설정한 가치로부터 제국주의로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얼마나 잘 구성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책의 구성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나는 책에서 읽을만한 부분은 2장밖에 없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2장과 다른 장들을 사람이 과연 동일인일까 싶을 정도이다.) 

 

-범주적 발전의 분할

일단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은 미완성인 채로 끝이 난다. 따라서 가치에서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은 힘들긴 하지만, [자본] 정성껏 읽으면 추적이 비교적 가능하다. 다른 한편, 애초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플란에 들어있던 국가, 세계시장과 해외무역, 식민지 부분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에 불행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40년에 걸쳐 저술된 방대한 맑스의 저작들 곳곳에국가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은 흩어져 있으며, 통찰들을 추적하여 [자본론] 같은 형태로 맑스의 국가론 제국주의론 곳에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국주의라는 자체를 맑스는 쓰지도 않았다).* 동구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당시 박사 논문을 쓰던 젊은 학자 남구현 선생은 맑스 저작에 대한 열정적인 독해를 통해 바로 야심만만한 작업에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구성해낸 범주적 발전을 서너 단계로 나누어 있다고 생각한다 ( 단계 구분은 서평자의 것이지, 저자의 것이 아니라는 명토박아두자). 먼저 그는 [자본] 정성껏 읽음으로써, 가치로 시작하여 잉여가치, 자본을 거쳐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 a 추적한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맑스의 기타 주요 저작의 독서와 개의 국가론 논쟁 – (1) 밀리반드와 풀란차스 간의 도구주의-구조주의 논쟁, (2) 알트파터와 히르쉬가 주도한 국가도출논쟁 힘입어 국가까지의 범주적 발전 b 구성한다. 이어서 제국주의를 핵심부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범주적 발전 c 구성한다. 그리고 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지구화를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혹은 현대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범주적 발전 d 구성한다고 봐줄 수도 있을 같다. (그런데, 지구화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딱히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범주적 발전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할 같다).

 

-범주적 발전 a, b 구성의 상대적 성공

범주적 발전 a, b 2장에서 추적, 구성되며, c 3, d 5장에서 다루어진다 (4장은 주변부 국가를 다루는데, 내용 없다). 2장은 상당히 훌륭하다. 저자 남구현 선생의 [자본] 대한 꼼꼼한 독해와 [자본] 1, 2, 3권을 넘나들며 계기 간의 연관을 포착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 기존 국가론 논쟁에서 제시된 대립구도에 개입하면서, 러시아의 법철학자 파슈카니스가 일찍이 1920년대에 제기했던 문제 계급적 내용이 공적인 국가에 의한 계급중립적 형식을 취하게 되는가 다시금 제기하고, 저자가 구성해낸 맑스 독해에 기반하여 이는 최대한의 자기 가치증식을 기본 동인으로 하는 자본 운동의 기본 법칙인 잉여가치법칙이 서로간에 평등한 상품판매자와 상품구매자를 규율하는 가치법칙의 관철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인 노동자와 구매자인 자본가 사이의 상품교환관계(임금을 매개로 계약관계) 기초하여 착취가이루어진다 (89). 국가의 계급성(내용) 계급중립성(형식) 간의 대비는 잉여가치 창출(내용) 가치에 기반한 등가교환(형식), 착취(내용) 평등한 개인간의 계약(형식) 간의 대립에 조응하는 것으로 유추되고, 이로부터 연장된 것으로 설명된다.

 

2장에서 방금 범주적 발전 a, b 구성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 남구현 선생의 내공에 기대를 하게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냥 책을 덮어라. 이후의 장들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환멸의 연속이다. 실망을 글로 표현하는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저자에 의해 실패한 범주적 발전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자 적어둬야 하겠다.

 

- 제국주의, 범주적 발전 c의 궤도 이탈:

저자는 중심과 주변 간의 제국주의 모순을 자본과 노동 사이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품과 화폐 사이의 모순을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외적 대립으로서 파악하는 맑스의 방법론에서 영감 받았다(93, 강조는 인용자)” 밝힌다. 그러면서 맑스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화폐의 역할을 밝힌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인용부분에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의 등식이다. , 특정 상품 A [사용가치] = 일정액의 화폐 [교환가치]. 등호가 의미하는 등가성, 교환가능성은 등식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남구현은 등호를 대립으로 해석하며, 이를 개로 분리한다. (1) 상품 내부의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대립과 (2) 서로 대립하는 상품, 좌변(특정 양의 특정 상품 A) 우변(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 간의 대립으로 분리한 , (2) (1) 외화라는 맑스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가물로부터 화폐로의 발전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책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 부분인 지는 모르겠다. 한편,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의 통일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그리고 더 나아가 화폐와 상품의 모순은 하나의 연관된 운동으로서의 형태변형으로만 존재한다." ). 여기까지는 좋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여기에서 받은 영감 어떻게 중심과 주변의 대립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의 외화라는 주장을 정당화시킬 있는가? 뒤에 가서 설명이 나오나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중심과 주변의 대립(특별잉여가치의 이전transfer) 결코 노동과 자본의 대립(잉여가치의 착취exploitation) 외화로서 설명될 없다. 왜냐하면, 중심과 주변의 대립은 착취를 통해 설명될 없으며, 강한 (중심)자본과 약한 (주변)자본 간의 경쟁으로, 자본간 경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Enrique Dussel). 강한 자본이 약한 자본을 착취한다고 말한다면, 착취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고 말할 때의 착취라는 개념과는 다른 헐렁한 수사일 뿐이다. 만약 저자가 중심-주변 간의 대립을 자본-노동 간의 대립이 외화된 것으로 정식화하려면, 우선 (1)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곧, 자본 일반)이 어떻게 자본간 경쟁(다수 자본)으로 외화될 있는가, 그리고 (2) 이 자본 일반(자본-임노동)과 다수 자본(중심-주변)의 관계가 어떻게 상품내부의 교환가치/사용가치와 화폐/상품 간의 관계와 조응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설명은 없고 영감만 달랑 있다.**   

 

한번 엇나간 범주적 발전은 교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계속 이어진다. 저자가 부족하긴 하나마, 그리고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지만,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가치부터 시작해서 제국주의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추적/구성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작업을 요량이었으면, 레닌 말고 다른 고전맑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연구나 60년대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불균등발전을 맑스의 부등가교환에 의거 어떻게 설명하고자 했는지에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을 것이다. 저자가 힐퍼딩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그리고 Emmanuel, Bettelheim, Palloix, Mandel, Carchedi 등의 부등가 교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범주적 발전의 궤도가 그런식으로 틀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문헌들에 대한 검증을 자신의 뛰어난 맑스 독해에 기반한 대단한 영감으로 떼우고 넘어가려고 한다. ( 걸렸다!)

 

- 지구화: 범주적 발전 d의 구성실패

게다가 저자는 19세기 후반의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이전을 포함하여 이전의 제국주의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글로벌리제이션과는 어떻게 유사하면서 동시에 또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93쪽의 설명을 보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이전의 중국이나 로마 제국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이고, 기껏해야 환원주의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 곧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전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간의 구분의 문제에 관한 가장 탁월한 개념화는 슘페터에 의해 이루어졌다.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그 작동원리상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제국주의는 '격세유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잠복기 이후 다시 나타나며, 또 사라지는 이 격세유전으로서의 제국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로마제국과 20세기 초반 당시의 제국주의를 비교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레닌은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당시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그 중 홉슨과 힐퍼딩이 감지했던 자본수출이나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자본주의 장기파동의 특정한 국면에 나타나는 주기적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홉슨, 힐퍼딩, 레닌은 장기파동을 인식하지 못했다). 장기파동의 한 국면,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브로델이 "자본주의의 가을"이라고 부른 것, 그것은 농익은 자본주의, 하지만 열매를 수확하고 나면, 낙엽도 다 져서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겨울을 맞이한다. 다시 생명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은 늘 사라지지만, 다시 온다. 이 가을은 슘페터에 의해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특징인 '격세유전'(반복성)으로, 레닌에 의해서는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성숙)로 포착된다. 또 이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1970년대 이후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자유주의를 통해 다시 나타난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의 증가와 금융자본의 팽창은 현재의 국면과 1870년대 후반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국면 양자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물론 현재는 과거 국면의 반복이 아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 아리기가 마치 역사를 반복되는 것으로 개념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몰이해를 드러낸다). 19세기 후반을 특징짓던 제국주의 열강 간의 경쟁은 지금의 국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저자 남구현 선생은 슘페터의 개념화가 갖고 있는 이러한 함의는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대신 슘페터 제국주의론의 지엽적인 측면에만 꼬투리를 잡아 흠집을 내는 (아마 레닌이 보기에도)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 낭비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저자는 범주적 발전 d를 구성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 그 밖의 아쉬움들

사실 3, 4, 5장에 나오는 독일어권 학자들의 논의를 일부(한글이나 영어로 번역되어 있거나, 애초부터 영어로 쓰여진 Schumpeter, Momsen, Senghaas, Elsenhans) 제외하고는 모른다. 따라서, 일단 어그러진 범주적 발전은 그렇다쳐도, 저자가 맑스를 읽었던 애정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기울여서 독일 학자들의 논의를 제대로 소개하고 저자 나름대로 비판했다면, 책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녔을터이고, 책의 평가에 별을 한두 첨가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자의적 해석과 성급한 비난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책의 가독성도 무척 떨어진다. 문장이 열몇 줄에 이르는 만연체(73-4) 그렇고, 잘못된 직역 (거대도시 metropolis[위성(satellite)과 대비되는 뜻에서 중핵이나 중추로 번역되는 것이 낫다]), 비일관적인 번역 (저발전의 발전/저개발의 개발, 폴란차스/풀란짜스) 등이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어렵게 밖에 없는 것을 어렵게 쓰는 것과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있는 것을 노고가 귀찮아 어렵게 쓰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10여년 전에 박사논문으로 써놓았던 책을 동안 기회될 때마다 챕터별로 번역해서 논문 형태로 여기저기 발표하고,안식년에 독일까지 가서 다시 손보고, 제자들까지 동원되어 번역 도와주고, 학교에서 학술연구비 지원까지 받아 출간했으면, 좀더 썼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형식은 돈받고 시장에서 팔리는 책인데 이렇게밖에 없단 말인가? 우울한 일이다

 

 

 

* 2010. 3. 29. 추기: "제국주의(역주?)는 태동하는 중간계급 사회가 봉건 제도로부터 스스로의 해방수단으로서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성숙한 부르조아 사회가 마침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변형시켜왔던, 국가권력의 가장 매춘적이고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 ... 역주: 보나빠르뜨 제국과 그 팽창적인 대외정책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자본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독점 자본주의 시대의 본격적인 제국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프랑스 내전>, 임지현, 이종훈 옮김, <<프랑스 혁명사 3부작>> (1991년 개정판), 소나무, 343쪽) 

  

맑스가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는 나의 문장은 틀렸다. 제국주의란 부르조아 스스로의 해방수단이면서 동시에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발전한 국가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라는 맑스의 언급은 <프랑스 내전> 저작 전체의 맥락 속에서의 주변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언급이다.   

  

* * 추기: 박승호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pp. 256-7)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3권에서 국가간 착취의 존재를 말한다: 일국의 3노동일이 타국의 1노동일과 교환될 경우,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변형되고, "이 경우 부국은 빈국을 착취한다. 이 착취관계는 ... 무역을 통해 빈국이 상호이득을 얻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이다"(Marx 1971: 106). 그런데 이 경우 착취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변형이라는 전제 하에서, 곧 부등가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착취(exploitation)란 자본과 노동력 간의 등가교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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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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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통사에 관한 책을 읽은 게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80년대말 90년대초에 읽은 [다현사], [바보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서사연에서 펴낸 [한자발], 그리고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누런 근현대사 책 이후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여기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그동안은 1945년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현대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또 제도교육과 운동권 교육 모두를 통해 접했던 민족사 중심의 서술에 적잖이 물리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수구파들 덕에 최근 들어 더욱 시끄러워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화에 내 눈과 귀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후반과 21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미루고 있던 공부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은 강만길 교수가 큰 틀을 잡고, 그 제자들이 알맹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아무리 같은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고 조정작업을 거쳤다 하더라도, 책의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상(歷史像)을 잡아내는 맛은 한 개인의 독자적인 저서에 비해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운 점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이 저서의 통찰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한국통사 책을 통해 접했던 한반도를 '닫힌 공간'으로 서술하는 민족사완결주의적 사관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곧 이 책에서의 역사 서술대상 -곧 일제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의 남한 –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적 전개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처럼서술대상을 전체의 부분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한정짓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 – 예컨대, 강만길 교수가 언제고 보충되기를 희망하는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 – 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부분과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나아가 한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더 큰 실체인 동아시아나 자본주의 세계경제 간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곧 한반도라는 부분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의 역사적 전개 속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제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조선 땅이 일제 식민지화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었다는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편입 이전의 사회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 ‘봉건제’ 혹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저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이를 前자본주의 사회 일반과 관성적으로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30쪽, 79-80쪽,  etc.). 봉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흥 이전에 서유럽과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이한 사회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둘째,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은 아무래도 학부에서 근현대사 교양수업을 듣는 대학 1-2학년생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료에 대한 각주 처리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각 장 끝에 주요참고문헌만을 덧붙이고 있다. 뭐 대중적으로 읽히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기왕에 연구자들이 공들여 연구한 내용일텐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각주처리를 하거나 박스 처리를 해서라도 그 사료를 명확히 게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구파들이 판치는 (또 노골적으로 그 수구파들에게 구애하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역사상(歷史像) 간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실증적 대질을 통해 수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선 말기 남발된 백동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에서 위조되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89쪽), 이 사실의 출처나 근거 혹은 사료가 무엇인 지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노동력 강제동원의 추정치를 제시하면서 자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일제의 조선인 동원이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183쪽)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naïve하다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이영훈 교수가 얼마전 종군위안부의 추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좋은 공격거리이다).

 

셋째, 이 책에서 구사된 비판적 역사 기술의 준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관점은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엘리트들의 정책 운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비판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의 준거이다. 이런 식이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정기의 역사 전개나 장면 정부의 역사적 한계 등을 비판할 때에는 '만약 자주적 국민국가를 세웠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식으로 늘 反사실적 준거가 동원된다. 이 자주적 국민국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이 국가가 존재해야한다는 현실적 전제를 유지한다면, 이 국가는 힘센 국가, 핵심부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핵심부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헤게모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과장을 약간 보태면, 자주적 국가는 결국 헤게모니인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反사실적 준거란 ‘우리가 미국만큼 힘이 셌으면’ 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반사실적 준거에 의지하기보다는 역사서술대상(식민지 조선과 이후의 남한 경제)의 희생이 과연 가해자 혹은 강자(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이득으로 연결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서술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반사실적 판단준거를 들이대는 것보다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넷째,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근현대사 공간의 역사적 사실들의 서술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역량 바깥의 문제이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신용옥의 “보론: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해서는 몇마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발전국가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비판을 별로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게 이 글은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가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을 대비시키면서 발전국가론이 간과하고 있는 재원의 성격변화(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를 강조한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역사학자의 개입으로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특수한 세계체제적 환경을 강조한 점 역시 옳다. 그러나 (1) 발전국가론을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우파’의 종별 규정”(312쪽)으로 바라보는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지나치게 독창적인 오해”이다. 더구나 양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2) 그의 주된 비판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발전국가론 문헌은 발전국가론의 기초를 닦았다 할 수 있는 찰머스 존슨(일본)이나 앨리스 앰스덴(남한), 로버트 웨이드(대만)의 대표적 저작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보이는 저작들을 발전국가'론'으로 동질화하여 취급하는 것 또한 성급해 보인다. 게다가, 90년대말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글을 단순히 발전주의 옹호론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3) 또한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의 준거도 좌에서 우로 오락가락 진동한다. 한 번은 전형적인 IMF의 논리를 들이대며 발전국가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온실이었다(322쪽)는 우파적 비판을 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발전국가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요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327-8, 329쪽)는 좌파적 비판을 하기도 한다. (4)또 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논문을 음모론 정도로 격하하고 있는데(329쪽), 도대체 이 글의 저자 신용옥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연구는 보통 특정 행위자의 행위가 구조에 미친 영향이 보다 강조될 경우 음모론처럼 보이는 반면, 개별 행위에 대한 전체 구조의 제약이 강조될 경우나 개별 행위가 전체 구조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가 강조되면 기능주의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연구는 음모론과 기능주의라는 양극단의 유혹에 언제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정책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이라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주장은 정당하다. 물론 이 복합체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며, 웨이드와 베네로소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행위 결과가 어떻게 구조의 약한 부분(경제위기에 노출된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드러났는 지를 훌륭하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음모론인가?

 

할 말은 더 있는데, 이 쯤에서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서 손색이 없다. 보론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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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국주의 한울아카데미 737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주요개념

(1) spatio-temporal fix

개념을 한국말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 'fix' 중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첫째, 문자 그대로의 뜻은 '고정' 정도로 번역할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인가 [자본의 한계]인가 (아님 [희망의 공간]?) 에서는 시공간 고정으로 번역되었던 같다). 투하된 총자본 일부는 상당기간 동안 물리적 형태로 토지에 '고정'된다 (건물, 하수도, 도로, 공공 교육체계, 의료복지 체계, etc.). 둘째, 은유적 함의로서, 어떤 오작동이나 고장에 대한 '수리'라는 뜻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뜻한다. 자본주의의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는 가지가 있을 있다. 하나는 단기적 이윤 확보가 용이치 않은 공공 하부구조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함으로써, 고용창출 효과와 더불어 미래의 경제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케인즈주의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가치 실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품들의 판로를 개척하거나 값싼 노동력을 고용하여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지리적 팽창을 도모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적 방식)이다. 실제의 경우에서는 양자가 조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이윤이 회수되는 시점을 시간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후자의 경우는 자본의 순환범위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위기에 처한 잉여자본의 순환과 잉여가치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가지 의미들 - , '고정' '수리' - 서로 충돌한다. 자본이 고정된 곳에는 자본이 투여된 건축물들 뿐만 아니라, 자본에 고용된 인간들과 그들의 가족들, 생활공간들,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첫번째 ). 만약 자본이 위기에 대한 타결책으로 보다 값싼 노동력이 있는 외국으로 이동했다고 해보자 (두번째 ). 사회적 관계는 자본이 철수한 후에는 공장 건물들만 남는 것이 아니라, 공장과 동네의 활기를 구성했던 사람들이 남는다. 사회적 관계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관성은 자본 철수에 대한 저항을 유발한다.

 

사회적 관계의 관성이 야기하는 저항은 하비가 'switching crises'라고 칭하는 - 자본의 흐름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움직임으로써 야기되는 효과 -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전체는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한 남아 있게 되지만, 부분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들(금융위기, 탈산업화, 가치감소 devaluation) 갈수록 격화된다.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은 '강탈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동반한다.

 

(2)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개념을 통해 하비는 하나의 오래된 난국을 피할 있었다. 개념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아민, 프랭크, 월러스틴)이나 Socialist Register 필진 일부는 지속적인 원시적 축적, 혹은 지속적인 본원적 축적 (ongoing primitive/original accumulation)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써야 했다. 형용모순의 시발점은 로자 룩셈부르크인데, 그녀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있다. 자체는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있어서, 룩셈부르크가 보여준 이론적 설명은 맑스의 확대재생산도식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하린에 의해 철저하게 공박된다). 로스돌스키 또한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동시적 진행 테제에 대해 비판한 있는데, 지금 기억하기로는 맑스에게 있어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에 역사적으로는 선행하는, 그리고 분석적으로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같다.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이 양자의 유기적 연결과 동시적 진행을 이야기했던 것은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보았던 것이 현재의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맑스가 소위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어떤 내용이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것 자체가 본원적 축적인 것은 아니다. (? 맑스의 본원적 축적이나 아담 스미스의 사전적 축적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한 것이니까; 또한 맑스에게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에 있어 계기로 고려되지 않으니까) 하비의 기여는 세계체제 분석이 본원적 축적의 지속적 진행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통해 제기하고자 했던 올바른 관찰을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적 교정을 통해 정당화한 것이다. '강탈에 의한 축적'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것의 핵심이면서도, 자본주의 확대재생산의 내적 계기로서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재생산 도식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대신 하비는 ‘자본축적의 분자적 과정’(아쉽게도 여기에 대한 충분한 분석은 제시되지 않는다) 강탈에 의한 축적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자신의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강탈에 의한 축적의 주요 담지자로서 국가와 금융기관을 들고 있다. 

 

2. 이론적 개입으로서의 의의

(1) 레닌주의적 제국주의 개념의 교정

평화적인 초제국주의 시대의 도래 가능성을 점친 카우츠키를 비판한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표현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든 간에, 그것이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이든, 최후의 단계이든, 최근의 단계이든 간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파국을 알리는 하나의 단계이며, 이는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있는 것이었다. 하비는 좌파 내에서 지배적이었던 레닌주의적 개념을 한나 아렌트의 제국주의 개념과 대비시킨다. 레닌과 달리, 아렌트는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를 부르주아의 첫번째 정치적 지배의 시대로 이해한다. 하비는 이런 대립적인 개념화 (최후와 최초) 간의 대비를 통해, 제국주의의 지배적 이미지(1. 레닌주의적 개념화따라서 2. 오류) 불식시킨다. 동시에 그는 맑스 뿐만 아니라 슘페터와 브로델에 의해 영향 받은 아리기의 자본주의적 팽창 논리와 영토적 팽창 논리 간의 교체 진행 테제를 도입한다. 여기에 위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자신의 개념적 교정을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제국주의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2)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 어디선가에서의 새로운 주체 구성

하비는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서 상정된 무차별적, 동질적, 비정형적 집단인 '다중' 어느 마법처럼 분연히 떨쳐일어나 지구를 접수하게 거라는 한편의 순진한 환상과, 반대로 특수한 투쟁 고유의 1차적 중요성만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집단과의 소통과 연대를 힘들게 하는 다른 한편의 국부적, 특수주의적 주체관 사이 어디 쯤에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투쟁 주체의 표적은 금융기관과 국가기구이다. 어느 정도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허탈함이란... 아마 그것은 하비가 채울 몫은 아닌 같다.

 

3. 아리기의 하비 수용

하비의 이 책에 끼친 지오바니 아리기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에서 개진된 하비의 분석들 역시 아리기에게 영향을 끼쳤다. 얼마전 아리기는 New Left Review에 하비가 이 책에서 개진한 내용들을 역사적 자본주의의 전개에 관한 설명에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 지를 흥미진진하게 밝혀 놓은 바 있다 ("Hegemony Unravelling" I & II , New Left Review. 32: pp.23-80, 33: pp.83-116). 그는 대체로 하비에 공감하면서, 그를 추켜 세우기도 하고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의 공간적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 하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예컨대 하비가 자신의 논리를 오독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한다. 아리기는 하비의 spatial fix라는 개념을 기존에 자신이 주장해왔던 축적체제 주기와 헤게모니 교체 메커니즘에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하비의 설명 모두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아리기는 클린턴 시대의 신경제를 헤게모니 쇠퇴 직전의 번영기 (belle epoque)로 해석하며, 신자유주의로부터 신보수주의로의 전화를 이 번영기의 종말로 이해한다. 또한 이는 클린턴 시절 경제정책의 기조 역할을 했던 글로벌리제이션 담론이 아들 부시 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소멸되었다는 점을 통해 강조된다. 현재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적할 국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피터 고완이 그의 역작을 통해 개념화한)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는 갈수록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전의 쇠퇴하는 헤게모니는 모두 채권국이었던 데 반해, 현재 미국은 채무국이라는 점은 미국 헤게모니 쇠퇴가 이전의 역사적 헤게모니의 쇠퇴와 구분되는 가장 특이한 점이다. 아리기는 이를 통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가파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전까지는 헤게모니의 교체에 (현재 이라크에서의 전쟁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규모 전쟁이 동반되었다. 과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은 어떠할 것인가? 몰락하기는 몰락하는가? 아리기보다 오래 살면서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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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0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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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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