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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남구현 지음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3년에 완성된 남구현 교수의 박사논문의 일부를 10년도 더 지난 2004년에 번역 출판한 것이다. 지구화에 관한 마지막 장은 2003년에 새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이 있지는 않다.
저자는 “가치, 잉여가치, 자본, 계급, 국가, 제국주의로 확장되는 범주적 발전”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국가와 제국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 심사시에는 “동구의 정통 맑시즘과 서구 맑시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단초를 열어주었다는 과찬”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뻥에 난 너무 순진하게 넘어가서 이 책을 사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허장성세도 눈에 거슬린다: "잉여가치의 범주를 출발점으로 '국가'와 '제국주의'의 두 범주를 발전시키고자 시도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다. 이는 오로지 범주적 발전, 대립물의 통일과 반대물로의 전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의 이중적 변증법 등 주로 맑스의 자본 분석에 구사되어진 변증법적인 사고로부터 배운 방법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능했다" (7). 남구현 선생이 처음 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책의 품질이나 저자의 성취를 평가할 때,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스스로 목적으로 설정한 가치로부터 제국주의로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얼마나 잘 구성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구성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읽을만한 부분은 2장밖에 없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2장과 다른 장들을 쓴 사람이 과연 동일인일까 싶을 정도이다.)
-범주적 발전의 분할
일단 그 “범주적 발전”의 방법론을 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은 미완성인 채로 끝이 난다. 따라서 가치에서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은 힘들긴 하지만, [자본]을 정성껏 읽으면 추적이 비교적 가능하다. 다른 한편, 애초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플란에 들어있던 국가, 세계시장과 해외무역, 식민지 부분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에 불행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근 40년에 걸쳐 저술된 방대한 맑스의 저작들 곳곳에국가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은 흩어져 있으며, 그 통찰들을 추적하여 [자본론]과 같은 형태로 맑스의 ‘국가론’과 ‘제국주의론’을 한 곳에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를 맑스는 쓰지도 않았다).* 동구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당시 박사 논문을 쓰던 젊은 학자 남구현 선생은 맑스 저작에 대한 열정적인 독해를 통해 바로 이 야심만만한 작업에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구성해낸 범주적 발전을 서너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계 구분은 서평자의 것이지, 저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 명토박아두자). 곧 먼저 그는 [자본]을 정성껏 읽음으로써, 가치로 시작하여 잉여가치, 자본을 거쳐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 a를 추적한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맑스의 기타 주요 저작의 독서와 두 개의 국가론 논쟁 – (1) 밀리반드와 풀란차스 간의 도구주의-구조주의 논쟁, (2) 알트파터와 히르쉬가 주도한 국가도출논쟁 – 에 힘입어 국가까지의 범주적 발전 b를 구성한다. 이어서 제국주의를 핵심부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범주적 발전 c를 구성한다. 그리고 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지구화를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혹은 현대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범주적 발전 d를 구성한다고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구화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딱히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범주적 발전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할 것 같다).
-범주적 발전 a, b 구성의 상대적 성공
범주적 발전 a, b는 2장에서 추적, 구성되며, c는 3장, d는 5장에서 다루어진다 (4장은 주변부 국가를 다루는데, 별 내용 없다). 이 중 2장은 상당히 훌륭하다. 곧 저자 남구현 선생의 [자본]에 대한 꼼꼼한 독해와 [자본] 1, 2, 3권을 넘나들며 계기 간의 연관을 포착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또, 기존 국가론 논쟁에서 제시된 대립구도에 개입하면서, 러시아의 법철학자 파슈카니스가 일찍이 1920년대에 제기했던 문제 – 왜 계급적 내용이 공적인 국가에 의한 계급중립적 형식을 취하게 되는가 – 를 다시금 제기하고, 저자가 구성해낸 맑스 독해에 기반하여 이는 “최대한의 자기 가치증식을 그 기본 동인으로 하는 자본 운동의 기본 법칙인 잉여가치법칙이 서로간에 평등한 상품판매자와 상품구매자를 규율하는 가치법칙의 관철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인 노동자와 구매자인 자본가 사이의 상품교환관계(임금을 매개로 한 계약관계)에 기초하여 착취가” 이루어진다 (89). 곧 국가의 계급성(내용)과 계급중립성(형식) 간의 대비는 잉여가치 창출(내용)과 가치에 기반한 등가교환(형식), 곧 착취(내용)와 평등한 개인간의 계약(형식) 간의 대립에 조응하는 것으로 유추되고, 이로부터 연장된 것으로 설명된다.
2장에서 방금 본 범주적 발전 a, b의 구성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 남구현 선생의 내공에 큰 기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냥 책을 덮어라. 이후의 장들은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환멸의 연속이다. 이 실망을 글로 표현하는 걸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저자에 의해 실패한 범주적 발전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자 적어둬야 하겠다.
- 제국주의, 범주적 발전 c의 궤도 이탈:
저자는 중심과 주변 간의 제국주의 모순을 자본과 노동 사이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품과 화폐 사이의 모순을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외적 대립으로서 파악하는 맑스의 방법론에서 영감을 받았다(93쪽, 강조는 인용자)”고 밝힌다. 그러면서 맑스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화폐의 역할을 밝힌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인용부분에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의 등식이다. 곧, 특정 상품 A [사용가치] = 일정액의 화폐 [교환가치]. 등호가 의미하는 등가성, 교환가능성은 이 등식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남구현은 이 등호를 대립으로 해석하며, 이를 두 개로 분리한다. 곧 (1) 한 상품 내부의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대립과 (2) 서로 대립하는 두 상품, 곧 좌변(특정 양의 특정 상품 A)과 우변(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 간의 대립으로 분리한 후, (2)는 (1)의 외화라는 맑스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이 등가물로부터 화폐로의 발전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책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 부분인 지는 모르겠다. 한편,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의 통일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그리고 더 나아가 화폐와 상품의 모순은 하나의 연관된 운동으로서의 형태변형으로만 존재한다." ). 여기까지는 좋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여기에서 받은 ‘영감’이 어떻게 중심과 주변의 대립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의 외화라는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뒤에 가서 설명이 나오나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중심과 주변의 대립(특별잉여가치의 이전transfer)은 결코 노동과 자본의 대립(잉여가치의 착취exploitation)의 외화로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심과 주변의 대립은 착취를 통해 설명될 수 없으며, 강한 (중심)자본과 약한 (주변)자본 간의 “경쟁”으로, 곧 자본간 경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Enrique Dussel). 강한 자본이 약한 자본을 “착취”한다고 말한다면, 그 ‘착취’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고 말할 때의 ‘착취’라는 개념과는 다른 헐렁한 수사일 뿐이다. 만약 저자가 중심-주변 간의 대립을 자본-노동 간의 대립이 외화된 것으로 정식화하려면, 우선 (1)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곧, 자본 일반)이 어떻게 자본간 경쟁(다수 자본)으로 외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2) 이 자본 일반(자본-임노동)과 다수 자본(중심-주변)의 관계가 어떻게 상품내부의 교환가치/사용가치와 화폐/상품 간의 관계와 조응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설명은 없고 영감만 달랑 있다.**
이 한번 엇나간 범주적 발전은 교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계속 이어진다. 난 저자가 부족하긴 하나마, 그리고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지만,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가치부터 시작해서 제국주의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추적/구성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작업을 할 요량이었으면, 레닌 말고 다른 고전맑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연구나 60년대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불균등발전을 맑스의 부등가교환에 의거 어떻게 설명하고자 했는지에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을 것이다. 저자가 힐퍼딩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그리고 Emmanuel, Bettelheim, Palloix, Mandel, Carchedi 등의 부등가 교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범주적 발전의 궤도가 그런식으로 틀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문헌들에 대한 검증을 자신의 뛰어난 맑스 독해에 기반한 그 대단한 ‘영감’ 으로 떼우고 넘어가려고 한다. (딱 걸렸다!)
- 지구화: 범주적 발전 d의 구성실패
게다가 저자는 19세기 후반의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이전을 포함하여 이전의 제국주의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글로벌리제이션과는 어떻게 유사하면서 동시에 또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93쪽의 설명을 보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이전의 중국이나 로마 제국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이고, 기껏해야 환원주의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 곧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전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간의 구분의 문제에 관한 가장 탁월한 개념화는 슘페터에 의해 이루어졌다.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그 작동원리상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제국주의는 '격세유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잠복기 이후 다시 나타나며, 또 사라지는 이 격세유전으로서의 제국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로마제국과 20세기 초반 당시의 제국주의를 비교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레닌은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당시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그 중 홉슨과 힐퍼딩이 감지했던 자본수출이나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자본주의 장기파동의 특정한 국면에 나타나는 주기적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홉슨, 힐퍼딩, 레닌은 장기파동을 인식하지 못했다). 장기파동의 한 국면,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브로델이 "자본주의의 가을"이라고 부른 것, 그것은 농익은 자본주의, 하지만 열매를 수확하고 나면, 낙엽도 다 져서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겨울을 맞이한다. 다시 생명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은 늘 사라지지만, 다시 온다. 이 가을은 슘페터에 의해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특징인 '격세유전'(반복성)으로, 레닌에 의해서는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성숙)로 포착된다. 또 이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1970년대 이후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자유주의를 통해 다시 나타난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의 증가와 금융자본의 팽창은 현재의 국면과 1870년대 후반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국면 양자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물론 현재는 과거 국면의 반복이 아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 아리기가 마치 역사를 반복되는 것으로 개념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몰이해를 드러낸다). 19세기 후반을 특징짓던 제국주의 열강 간의 경쟁은 지금의 국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저자 남구현 선생은 슘페터의 개념화가 갖고 있는 이러한 함의는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대신 슘페터 제국주의론의 지엽적인 측면에만 꼬투리를 잡아 흠집을 내는 (아마 레닌이 보기에도)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 낭비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저자는 범주적 발전 d를 구성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 그 밖의 아쉬움들
사실 3, 4, 5장에 나오는 독일어권 학자들의 논의를 일부(한글이나 영어로 번역되어 있거나, 애초부터 영어로 쓰여진 Schumpeter, Momsen, Senghaas, Elsenhans)를 제외하고는 난 잘 모른다. 따라서, 일단 어그러진 범주적 발전은 그렇다쳐도, 저자가 맑스를 읽었던 애정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기울여서 이 독일 학자들의 논의를 제대로 소개하고 저자 나름대로 비판했다면, 이 책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녔을터이고, 난 이 책의 평가에 별을 한두 개 더 첨가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자의적 해석과 성급한 비난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책의 가독성도 무척 떨어진다. 한 문장이 열몇 줄에 이르는 만연체(73-4쪽)도 그렇고, 잘못된 직역 (거대도시 metropolis[위성(satellite)과 대비되는 뜻에서 중핵이나 중추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낫다]), 비일관적인 번역 (저발전의 발전/저개발의 개발, 폴란차스/풀란짜스) 등이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어렵게 쓸 수 밖에 없는 것을 어렵게 쓰는 것과 조금만 노력하면 더 쉽게 쓸 수 있는 것을 그 노고가 귀찮아 어렵게 쓰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10여년 전에 박사논문으로 써놓았던 책을 그 동안 기회될 때마다 챕터별로 번역해서 논문 형태로 여기저기 발표하고,안식년에 독일까지 가서 다시 손보고, 제자들까지 동원되어 번역 도와주고, 학교에서 학술연구비 지원까지 받아 출간했으면, 좀더 잘 썼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형식은 돈받고 시장에서 팔리는 책인데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단 말인가? 우울한 일이다.
* 2010. 3. 29. 추기: "제국주의(역주?)는 태동하는 중간계급 사회가 봉건 제도로부터 스스로의 해방수단으로서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성숙한 부르조아 사회가 마침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변형시켜왔던, 국가권력의 가장 매춘적이고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 ... 역주: 보나빠르뜨 제국과 그 팽창적인 대외정책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자본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독점 자본주의 시대의 본격적인 제국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프랑스 내전>, 임지현, 이종훈 옮김, <<프랑스 혁명사 3부작>> (1991년 개정판), 소나무, 343쪽)
맑스가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는 나의 문장은 틀렸다. 제국주의란 부르조아 스스로의 해방수단이면서 동시에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발전한 국가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라는 맑스의 언급은 <프랑스 내전> 저작 전체의 맥락 속에서의 주변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언급이다.
* * 추기: 박승호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pp. 256-7)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3권에서 국가간 착취의 존재를 말한다: 일국의 3노동일이 타국의 1노동일과 교환될 경우,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변형되고, "이 경우 부국은 빈국을 착취한다. 이 착취관계는 ... 무역을 통해 빈국이 상호이득을 얻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이다"(Marx 1971: 106). 그런데 이 경우 착취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변형이라는 전제 하에서, 곧 부등가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착취(exploitation)란 자본과 노동력 간의 등가교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