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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박승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이 책은 박승호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지은이는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통해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조류들을 살펴보고 있다. 아글리에타와 셰네 등의 조절이론, 네그리의 자율주의 이론, 브레너의 국제경쟁론 등이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고, 그 비판의 준거는 홀로웨이, 본펠드, 클라크 등이 주도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이다. 그런데, 저자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굵직한 입장들이 워낙에 논쟁적인 저작들을 생산해낸 덕에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이론과 입장들은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전체 스펙트럼을 거의 다 포괄하는 듯 싶다. 워낙에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는 탓에 제 입장에 대한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가 불균등해 보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을 취미나 구색 맞추기 수준에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본 서평은 지은이가 펼치는 방대한 문헌 검토와 비판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책 두께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의 엑기스는 20페이지도 채 안되는 마지막 5장에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다. 책을 통독할 수 없는데, 내용이 궁금하면 5장을 보면 되고, 시비거리를 찾고 싶으면 [디지탈 말]에 실린 정성진 선생의 서평을 보면 될 것이다.
2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장을 통해 지은이는 맑스의 물신주의 비판을 강조함으로써,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에서 통상 간과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복권하고자 하는 야심을 밝힌다. 그는 자본이 노동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자본의 모순적 존재형태에 주목함으로써, 대부분의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의 초점에서 비껴나가 있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물신주의비판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적 방법론이라면,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중심 개념이자 기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중의 추상'으로서의 가치의 자기증식운동, 즉 자본운동은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일시키고 끊임없이 변혁해가는 원동력으로 현상한다.” (147).
3장 전반부에서는 70년대 서독 “국가도출논쟁”에서도 인용되었던 자본주의 국가의 중립적 형태에 대한 파슈카니스의 유명한 문제제기를 매개고리로 도입하여, 방대한 맑스 저작의 독해를 통해 2장에서 형성된 물신주의 비판의 강조점을 필자가 상당히 많이 의지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의 정당화로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지은이의 주목을 받는 개념은 “경제적 강제”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확대재생산은 그것의 ‘경제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분리된 계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양자는 ‘경제적 강제’의 매개를 통해 상호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206). 따라서 “자본축적 형태와 국가형태는 동일한 계급관계 및 계급투쟁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 (208).
3장의 중반 이후는,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의 총체는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224)라는 홀로웨이의 입론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제적 국가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국민국가형태, 제국주의에 의한 국가체계 규정, 세계시장, 세계화 논쟁 등을 이전에 전개된 논지와 맑스와 여러 맑스주의자들(만델, 홉스봄, 본펠트, 홀로웨이)의 논지에 입각하여 두루 살펴보고 있다. 서평자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지만, 할 말도 좀 있는 부분이다.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형에 대한 좌파적 분석들, 즉 브레너, 조절이론,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개방적 맑스주의(, 그리고 이젠 좌파라고 하긴 좀 그런 카스텔까지 곁다리로) 등이 검토, 비판된다. 이를 통해 지은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가지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627-8).
1.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는 ‘지구적 자본’의 출현으로 표현되고, 자본간 경쟁의 중층적 형태를 통해 과잉설비, 과잉생산의 조건을 형성한다.
2.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계급 역관계가 부과하는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수요 성장의 둔화와 저성장을 초래하며, 수출지향적 축적형태와 국민국가간 경쟁을 강제한다.
3.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 및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노동자계급의 저항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부과받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통화주의 정책의 후퇴로서의 케인스주의적 신용팽창 정책의 재도입과 그에 따른 기업과 가계의 부채경제화를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금융적 축적’ 전략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직접금융시장의 발달을 가져오는 한편, 자본은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는 구별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한 ‘도주전략’으로서 ‘금융적 전략’을 추구한다.
그리고 (주로 셰네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적 통찰을 도출해낸다: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 가지 특징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치법칙의 역사적 현상형태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다. 요컨대 생산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577).
3.
돈을 주고 책을 사봐야 하는 상품구매자로서의 독자 입장에서 책 한 권에 대한 평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가격 대비 만족도’에 의해 좌우된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최상급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박승호 선생은 이 600여페이지의 책을 쓰기 위해 그것의 백수십 배에 달하는 독서를 했을 것이다. 지은이가 여기서 한 것처럼 맑스 원전에 대한 방대한 독서와 함께 현대 좌파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 조류들을 체계적으로 한 번 정리해보겠다는 엄두를 이전?국내의 그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자신의 입장을 국독자론이든 조절이론이든 자율주의 맑스주의든 브레너의 자본간 경쟁 분석이든 서구에서 개진된 입장들과 동일시하기는 쉬워도, 이들 전반에 대한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그 조감도 위에 희미하나마 위치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방대한’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이와 비슷한 공부를 하는 동료들과 후배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고마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박승호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 값진 일이다. 나는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통독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갈수록 느끼는 거지만, 무언가를 읽고, 그것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덕분에 이후의 공부에도 문헌 속에서 헤매는 시간을 못해도 반은 줄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책은, 만약 그것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경제주의 비판이라도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출판될 수 있다는, 그래서 학술원에 의해 “우수학술도서”로까지 선정될 수 있다는 좋은 전례를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치적 입장의 좌우를 막론하고, 그 어떤 경제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경제주의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영역의 우위를 표명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별로 파편화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른 것이다. 전자에도 훌륭한 사례가 있을터이지만, 이 책의 지은이의 입장은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지은이는 전자를 수행하는 이들 중 다수와 달리,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라진 ‘계급투쟁’의 복원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는 형태 분석을 통한 물신주의 비판[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물신화되어 현상한 것(형태)과 거기에 깃들여 있는 내용 간의 대비, 곧 사물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과 자본과 노동의 관계 (곧 계급투쟁)간의 대비]이 방법론적으로 충실하게 구사됨으로써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 경제주의 비판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평가가 필요한 문제이지만, 그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서평자도 공감하는 바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어떤 정통 맑스주의자에 의해서 쓰여진 일국적 분석단위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지은이가 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물신주의 비판의 연장이었다. 곧 ‘국민경제’를 국민국가의 ‘경제적 형태’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 산출된 물신적 의식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298). 좌파 경제학 비판에 만연해 있는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지은이의 이러한 비판은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월러스틴의 비판과 내용상 유사하다. 월러스틴은 단일정치체가 경제를 관장하는 세계제국과 달리, 자본주의는 단일정치체가 부재하며,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조응을 통해 작동한다고 개념화한 바 있다. 양자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언급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는 하나의 유기적 총체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의 토대가 ‘경제적 형태’의 총체로서의 세계시장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이라는 토대에 입각한 상부구조는 세계국가가 아니라 ‘국제적 국가체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는 세계국가형태가 아니라 국민국가 형태로 총괄되기 때문이다” (289-90).
[2006. 2. 14. 추기: Peter Burnham (2002). "Class struggle, states and global circuits of capital" 122쪽을 보면, 월러스틴에 대한 이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번햄은 Picciotto(1991)와 Brenner(1977)에 근거하여, "생산관계를 변화시킨 것은 무역이 아니고, 봉건제와 포스트봉건제적 생산관계 간의 모순이 세계시장과 국가형태 양자의 변화로 귀결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 짧은 구절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월러스틴과 브레너 간의 절충을 모색하는 듯 싶다. 절충이 아니라 종합이고, 지양이면 더 좋겠지만... 아무튼 지양의 싹을 갖고 있다고는 봐줄 수 있을 것같다. 피치오토의 글을 한 번 찾아봐야 하겠다. 박승호 선생의 이 책은 나를 이 끝없는 차연(differance)으로 이끈다. ]
[2006. 3. 1. 추기: Sol Picciotto (1991). "The Internationalisation of Capital and the International State System" 218-9쪽을 보면 브레너의 월러스틴 비판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4.
책이 포괄하는 제 분석의 넓이는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지만, 분석의 깊이나 지은이의 독창성(그리고 지적 용기)은 사실 좀 아쉽다. 물론 서평자는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다루고 있는 여러 비판적 분석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은 탓인지,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의 불균등함, 곧 깊이의 불균등함이 여과없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지은이는 제 비판들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수시로 이에 개입하는데, 어떤 경우는 그냥 한마디 참았으면 더 낫지 않았나 싶을 때가 꽤 많았다. 비판이라기보다는 꼬투리라는 인상을 받는 곳들이 다소 있었다. 어차피 정리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이 책의 본문 격인 2, 3, 4장은 모두 소결을 통해 끝나는데, 소결에서는 본문에서 논의된 바에 기반하여 무언가 진일보된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각 장 본문에서 이야기된 바를 몇 페이지에 걸쳐 요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책 전체의 결론인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 결론이라 할만한 무언가 새로운 말은 전혀 없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책 전체의 유기적 연결에도 장애로 작용한다. 이 파편적 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책은 세 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일 뿐, 응집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라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물론 이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의 광대함 때문이고, 그것이 또 미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경제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물신주의 비판을 통해 계급투쟁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무대로 복귀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탄탄한 기반 위에서 출발한 듯 싶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우리의 이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저자는 너무 신중하다. 수많은 일급 맑스주의자들의 이름이 나오며, 저자 나름대로 이들과 대결하기도 한다. 나는 지은이가 이 책의 주요비판 대상으로 설정한 세 조류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증분석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논문과 관계되어 있는 다른 탓인지… 도무지 이 책에서는 저자가 세상에 대해 내지르는 게 없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저자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개방적’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추상성과 일면성으로 인한 ‘계급환원주의’적 경향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532). 죄송하지만,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일국적 분석단위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지은이가 맑스의 원전 이해에 강력한 내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최초 방향 설정에서는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못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고,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대립되는 논점이 명확히 드러났어야 하는 부분, 무엇보다도 가치법칙의 작동 범위 문제나 핵심과 주변 간의 불평등 교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미흡하다. 가치법칙은 원칙상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또 이들 간에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cf. 로스돌스키, 돕). 게다가 국민국가들의 국경은 자본주의 세계시장 내부의 상품 흐름들에게 일종의 문턱(threshold)으로서 역할한다 (cf. 그로스만, 에마뉴엘). 지은이는 이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논란의 여지는 무시하고) 가치법칙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그 작동 범위로 한다고 하면서, 자세한 논의는 정성진 (1984)과 이채언 (2002)을 참조하라고 각주에서 말한다. 나는 지은이가 말한대로 이 글들을 기꺼이 찾아볼 것이다. (정말 착한 독자다. 지은이가 시킨대로 한다. 난 보통 이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책의 완결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저자는 가치의 실증분석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그 모호한 주장 - 가치 법칙은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 변형되지만 관철된다 - 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저자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에 대한 얕은 이해 수준을 내비친다. 저자는 종속이론이 주변국가들의 발전을 “중심/주변관계에서 부과되는 외적 제약이라는 맥락에서만 파악”하고, “그 관계의 내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할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218-9). 이것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종속 분석이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못해서이지, 종속이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브라질의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를 분석한 Ruy Mauro Marini의 논의나 페루를 중심 대상으로 제국주의와 배제적 주변화(marginalization)를 분석한 Anibal Quijano의 저작들을 지은이가 접해본 바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아리기를 자주 언급하면서도, 그의 주저작인 The Long Twentieth Century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으며 참고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저작 이후부터 아리기의 사전에서 “반주변부”라는 단어가 사라지는데, 저자는 이를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것이야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이긴 하다. 나중에라도 읽고 배우고 비판하면 되는 문제니까…. 그러나 다음 문제는 이보다는 좀 심각해 보인다. 지은이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이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외적 연관으로만 파악한다고 하지만, 지은이가 의지하고 있는 홀로웨이의 헤게모니/종속 혹은 지은이의 제국주의/신(재)식민지의 이분할 역시 외적 연관을 넘어서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계체계 분석이 더 많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데에 비해, 지은이나 홀로웨이의 주장은 역사적 연구가 별로 뒷받침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세상에 대해 얘기한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은이가 이제는 세상에 대해서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기를.... 그것을 통해서 중심과 주변의 내적 연관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만약 이런 작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은이가 세계체계 분석이나 종속이론을 외적연관에 그친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흔한 야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보자. 지은이는 셰네(Chesnais)와 강남훈을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4장 내에서는 좀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책 전체 수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응집성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이 점을 좀더 신경 썼다면, 곧 맑스에게 있어 (특별)잉여가치의 이전으로서의 지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전의 케인스주의 시대에는 지금과 또 어떻게 달랐고, 그것이 계급투쟁에 끼친 함의나, 반대로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는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책 전체의 응집력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책의 한 부분에서 지은이는 (이른바 '긴 20세기'의 역사를) (1)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 (2) 케인스주의 시대, (3) 신자유시대로 국면 구분을 시도하는데, 이를 좀더 발전시켜 자본/노동의 대립, 중심/주변의 대립 등이 제 국면에 따라 어떻게 다르면서도 유사하게 전개되는 지를 각 국면 간의 비교를 통해 더욱 풍부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루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책은 이 시대에 책 값하는 몇 안되는 책중 하나이다. 꽁으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 읽고 “배운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말하면 너무 상투적인 선전일까? 하지만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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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6. 추기: 이 책을 읽은 후 이 책에서 인용된 참고문헌들 중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인용한 참고문헌들에서 원래 주장하는 바와 지은이의 이해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몇몇 있다.
(1) 서평 본문에서 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비판의 공을 지은이 박승호 선생에게 돌려 칭송했지만, 이는 모두 박승호 선생의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박승호 선생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 같다. 또 박승호 선생이 인용한 홀로웨이나 본펠트, 번햄 등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저자가 논문의 전반부에서 방대한 맑스의 저작을 인용, 재구성한 것 또한 저자 자신의 역량이라기 보다는 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간접적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맑스로부터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들이 똑같이 위의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에 그대로 나온다.)
(2) 지은이는 만델의 Late Capitalism을 인용하면서 전자본주의적 세계시장과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맑스의 주장, 그리고 지은이가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Werner Bonefeld가 "The Spectre of Globalization: On the form and Content of the World Market"를 통해 펼친 주장- 세계시장은 자본주의의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그 자신의 전제이자 동시에 결과이다 - 과는 모순된다. 이 점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브레너의 70년대식 이해에 머물고 있다. 지은이가 브레너나 만델의 생각을 따를 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러려면, 그가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본펠트의 이해와 대결하는 과정을 책에서 전개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매뉴팩쳐와 대공장산업을 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로 구분하지 않고 자본주의 내부의 다른 국면들로 이해하는 스위지의 견해가 보다 맞다고 생각한다.
(3) 서평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성진(1984)과 이채언(2002)의 논문들은 저자의 논지를 뒷받침한다기 보다는 저자는 얼버무리고 넘어간 문제들을 좀더 잘 보여주고 있다. 정성진의 논문은 논문이 쓰여지던 당시까지의 국제적 불평등 교환에 대한 논쟁 구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덕택에 가치의 국제적 작동범위에 대한 서평자 본인의 이해란 대략 그 논쟁 구도 중 어느 한 편에 가까운 것이며, 그것도 아주 초보 수준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논문이 오래된 탓에 끝에서 불평등 교환의 이론적 대안을 생산양식접합론에서 찾고 있는데, 정성진 선생이 아직도 그러한지 궁금하다. 요즘도 생산양식접합론 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이채언의 논문은 국제적 가치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환율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채언 선생이 착취를 이해하는 방식 - 착취는 등가교환"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며,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 -은 다소 혼란스럽다. 무엇보다도 이는 착취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모든 것을 지시함에 따라 더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비개념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이는 잉여가치의 착취와 잉여가치의 이전 양자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다른 한편, 여기에서 이채언은 가치법칙이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되어 관철되는 경우와 본질적으로 변형되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구분하는데, 박승호 선생의 주의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박승호는 그냥 애매하게 정성진, 이채언 두 훌륭한 맑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대해 살펴본 좋은 논문들이 있고, 그것을 보면 되는데, 거기에 따르면 가치법칙은 일국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범위에서도 수정되건 본질적으로 변형되건 작동한다더라 하는 식의 안이한 처리를 하고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