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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통사에 관한 책을 읽은 게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80년대말 90년대초에 읽은 [다현사], [바보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서사연에서 펴낸 [한자발], 그리고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누런 근현대사 책 이후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여기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그동안은 1945년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현대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또 제도교육과 운동권 교육 모두를 통해 접했던 민족사 중심의 서술에 적잖이 물리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수구파들 덕에 최근 들어 더욱 시끄러워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화에 내 눈과 귀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후반과 21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미루고 있던 공부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은 강만길 교수가 큰 틀을 잡고, 그 제자들이 알맹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아무리 같은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고 조정작업을 거쳤다 하더라도, 책의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상(歷史像)을 잡아내는 맛은 한 개인의 독자적인 저서에 비해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운 점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이 저서의 통찰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한국통사 책을 통해 접했던 한반도를 '닫힌 공간'으로 서술하는 민족사완결주의적 사관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곧 이 책에서의 역사 서술대상 -곧 일제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의 남한 –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적 전개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처럼서술대상을 전체의 부분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한정짓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 – 예컨대, 강만길 교수가 언제고 보충되기를 희망하는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 – 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부분과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나아가 한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더 큰 실체인 동아시아나 자본주의 세계경제 간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곧 한반도라는 부분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의 역사적 전개 속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제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조선 땅이 일제 식민지화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었다는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편입 이전의 사회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 ‘봉건제’ 혹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저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이를 前자본주의 사회 일반과 관성적으로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30쪽, 79-80쪽, etc.). 봉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흥 이전에 서유럽과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이한 사회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둘째,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은 아무래도 학부에서 근현대사 교양수업을 듣는 대학 1-2학년생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료에 대한 각주 처리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각 장 끝에 주요참고문헌만을 덧붙이고 있다. 뭐 대중적으로 읽히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기왕에 연구자들이 공들여 연구한 내용일텐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각주처리를 하거나 박스 처리를 해서라도 그 사료를 명확히 게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구파들이 판치는 (또 노골적으로 그 수구파들에게 구애하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역사상(歷史像) 간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실증적 대질을 통해 수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선 말기 남발된 백동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에서 위조되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89쪽), 이 사실의 출처나 근거 혹은 사료가 무엇인 지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노동력 강제동원의 추정치를 제시하면서 자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일제의 조선인 동원이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183쪽)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naïve하다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이영훈 교수가 얼마전 종군위안부의 추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좋은 공격거리이다).
셋째, 이 책에서 구사된 비판적 역사 기술의 준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관점은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엘리트들의 정책 운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비판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의 준거이다. 이런 식이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정기의 역사 전개나 장면 정부의 역사적 한계 등을 비판할 때에는 '만약 자주적 국민국가를 세웠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식으로 늘 反사실적 준거가 동원된다. 이 자주적 국민국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이 국가가 존재해야한다는 현실적 전제를 유지한다면, 이 국가는 힘센 국가, 핵심부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핵심부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헤게모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과장을 약간 보태면, 자주적 국가는 결국 헤게모니인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反사실적 준거란 ‘우리가 미국만큼 힘이 셌으면’ 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반사실적 준거에 의지하기보다는 역사서술대상(식민지 조선과 이후의 남한 경제)의 희생이 과연 가해자 혹은 강자(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이득으로 연결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서술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반사실적 판단준거를 들이대는 것보다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넷째,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근현대사 공간의 역사적 사실들의 서술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역량 바깥의 문제이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신용옥의 “보론: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해서는 몇마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발전국가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비판을 별로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게 이 글은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가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을 대비시키면서 발전국가론이 간과하고 있는 재원의 성격변화(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를 강조한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역사학자의 개입으로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특수한 세계체제적 환경을 강조한 점 역시 옳다. 그러나 (1) 발전국가론을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우파’의 종별 규정”(312쪽)으로 바라보는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지나치게 독창적인 오해”이다. 더구나 양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2) 그의 주된 비판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발전국가론 문헌은 발전국가론의 기초를 닦았다 할 수 있는 찰머스 존슨(일본)이나 앨리스 앰스덴(남한), 로버트 웨이드(대만)의 대표적 저작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보이는 저작들을 발전국가'론'으로 동질화하여 취급하는 것 또한 성급해 보인다. 게다가, 90년대말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글을 단순히 발전주의 옹호론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3) 또한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의 준거도 좌에서 우로 오락가락 진동한다. 한 번은 전형적인 IMF의 논리를 들이대며 발전국가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온실이었다(322쪽)는 우파적 비판을 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발전국가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요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327-8, 329쪽)는 좌파적 비판을 하기도 한다. (4)또 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논문을 음모론 정도로 격하하고 있는데(329쪽), 도대체 이 글의 저자 신용옥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연구는 보통 특정 행위자의 행위가 구조에 미친 영향이 보다 강조될 경우 음모론처럼 보이는 반면, 개별 행위에 대한 전체 구조의 제약이 강조될 경우나 개별 행위가 전체 구조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가 강조되면 기능주의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연구는 음모론과 기능주의라는 양극단의 유혹에 언제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정책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이라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주장은 정당하다. 물론 이 복합체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며, 웨이드와 베네로소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행위 결과가 어떻게 구조의 약한 부분(경제위기에 노출된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드러났는 지를 훌륭하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음모론인가?
할 말은 더 있는데, 이 쯤에서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서 손색이 없다. 보론은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