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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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 훌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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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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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앙드레 고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예전에 출판되었던 한 편집서(이병천,박형준 편저,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I』)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는 고르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번역이 별로 좋지는 않다. 글쎄 번역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유명한 저서 ‘노동자 계급이여 안녕’(Farewell to the Working Class)의 제목이 불쾌해서였는지, 고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그 책을 펴보니, 줄은 잔뜩 쳐져 있는데, 그 논문들에서 그가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반 바뀌고 집어든 책이 이번에 나온 『에콜로지카』이다. 이 책은 고르가 자살한 다음 해인 2008년에 출판된 책인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과 인터뷰들 중, 고르의 핵심 사상이 잘 표현된 글들을 골라 편집한 Essential Gorz인 셈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깊이보다는 한 학자의 일생에 걸친 작업들의 맛보기인 셈이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그 화해 불가능성
옮긴이는 역자 후기에서 “고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174)고 단언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읽은 고르는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는『자본론』에서 집약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의에 충실하다. 그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를 낳는 두 개의 원천, 즉 대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고갈시킴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수단과 기술을 발전”시킨다(『자본론』1권 15장 마지막 부분). 이에 반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는 “연합된 생산자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집합적 통제를 통해 자연과의 교환을 규제”하는 사회(『자본론』제3권 7부 48장)이다 (150, 59). 이처럼 고르의 생태주의적 지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이질적인 어떤 것을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 아니다. 고르의 생태주의적 입장은 『자본론』내부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언명을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르크스나 고르 모두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상 노동착취적이며, 반생태적이다.

고르가 마르크스와 갈라지는 지점은 자연의 착취를 공통분모로 하여 자본이 노동의 포섭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고르의 비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은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은 일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곧 자본과 노동, 양자는 그들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과 그 생산의 부산물)의 구체적 형태와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오는 보상, 곧 이윤과 임금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된다 (121, 143).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옹호하며,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약탈의 공동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149).

자본주의적 노동의 역사
고르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논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지 노동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140-148). 그에 따르면, 18세기 공장제 수공업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노동은 그저 자연에 복종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을 변형시키고 지배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140). 이는 몰개성적이고 대체가능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야기한다(141).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동일한 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에 기반한 것이다 (35, 141-144). 이 동질적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에 의해서만 노동착취에 대해 저항할 수 있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라는 토대 위에서 일치단결하여 투쟁하게 된다. “계급의 일치감과 소속감이 왕성”했던 이 “영웅적 시기”에 노동운동은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생활비로 ‘충분한’ 임금을 요구하면서, 주로 생존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145-146).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전까지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를 지녔던 소비자들이 점점 더 ‘차별화된 개인적 욕망’을 지닌 소비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소비자의 개성화와 차별화는 산업 판로의 확대를 낳는 동시에 노동자의 결집력과 계급의식을 파먹어” 들었다 (147). 노동과정에서의 존엄성 상실은 높은 임금으로 가능해진 소비 생활에 의해 보상된다. 대략 1973년까지 지속된 포드주의 시기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가 총생산 증가를 상회함으로써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중산층화와 함께 천연자원의 초토화를 가속화시켰다 (147-149).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반경제
이 책은, 포드주의 이후에 일어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야기,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반혁명과 금융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114-119쪽 정도가 예외).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는 대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통화주의적 경제 운용, 감세, 고용의 유연화, 금융 자유화 등을 동반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 시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신자유주의 국면을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영광의 30년 시기에 대한 반동이자 그 시기의 추세에 대한 역전으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고르는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출되는 것으로 본다. 곧 이전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논리적 연장으로 해석된다. 그는 대략 1980년대부터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위기의 원인으로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공학 혁명”을 들고 있다 (114). [Cf. 도미니크 쁠리옹, 『신자본주의』 67-68쪽 참조]

고르는 이 과거 30년 동안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기본 범주, 즉 노동, 가치, 자본이 더는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남들이 다할 줄 아는 보편적 기본 기술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적 주특기와 노하우(비물질적 구성요소)를 통해 생산과정에 기여할 것을 요구 받는다.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투여되는 상이한 질을 지닌 개별 노동의 가치는 더 이상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는 데에 반해 “상징, 이미지, 메시지, 스타일, 유행을 생산하는 비물질적 차원”의 가격은 상승한다 (169).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그 물질성 충만했던 노동으로부터 추론된 가치 개념은 이제 적용 곤란하게 된다. 또 포드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많은 비용을 들여 지식의 사유화와 인위적 품귀화를 통하여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하려는 시도가 소위 지식경제의 출현이라는 트렌드로 관찰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의 비물질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본에게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33). 그러나 “상품의 성격에서 비물질적인 내용이 차지하는 무게가 늘어감에 따라 … 공급의 독점이 점점 자본에서 벗어난다” (37). 정보 혁명은 이전까지 사유되고 독점되었던 비물질적 콘텐츠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복제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물질적 콘텐츠를 교환가치를 상실한 무상의 ‘공유재’로 만들어 버린다 (38). “컴퓨터와 인터넷은 상품의 지배를 기초부터 무너뜨린다” (39).

자본주의적 팽창, 곧 만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혁명은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에 내재해 있는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킨다. 그리고 이는 애초의 기대를 배반하는 反경제라는 역설적 결과를 산출한다. 지식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는 달리 측정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통의 표준에 의해 교환될 수 없는 가치이다 (17). 이 반경제에서 “지식의 ‘가치’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얼마나 전파되는가로 측정”된다 (18). 
 

알라딘 서재질
알라딘 서재는 지식의 반경제의 좋은 예 아닐까? 물론 알라딘 서재를 비롯한 인터넷 사업체(언론, 서점, 포탈)들의 블로그는 블로그에 올라오는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한다 (서재지수). 이 측정된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확증된 경우 시스템에 의해 보상된다 (thanks to). 이를 지식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이라 부른다면 너무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까? 알라딘 서재는 분명 지식을 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논리에 포섭하려는 논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생존을 위해, 곧 자신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인 임금을 위해 노동한다. 알라디너는 서재지수 올라가고, thanks to 받으면 기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알라딘 서재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외도 좀 있는 것 같다). 이는 이 책에서 펼쳐진 고르의 논의를 알라딘 서재에 장난삼아 적용해본 것이다.

나는 고르보다는 회의적이다. 서재질의 미덕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나의 알라딘 서재질이 지식의 상품화 논리에 지적 유희마저 복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의 문제

쓰다 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딴 데로 새버렸다. 사실 고르의 생태주의적 대안의 매력이나 이 책의 번역상의 문제에 대해 꼭 좀 지적할 부분들이 있었는데, 요약과 공상이 너무 길었다. 다 집어치우고 나중에 출판사에서 재판 찍게 되거든 참고하라는 마음으로 대표적인 굵직한 실수 몇 개만 지적하겠다.

- 옮긴이는 154쪽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사이의 비율”로 번역하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이며,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둘 다 불변자본이다. 책 전체에 걸쳐 고정자본이란 번역어는 계속 나오는데 (19, 38, 148, 151, 그리고 또 여기저기) 148쪽의 “물적 설비에 투자된 고정자본”의 경우처럼 고정자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59쪽에서 『자본론』 3권 48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에서 역자는 necessity를 “필요성”으로 번역한다. 이 원문은 내가 갖고 있는 비봉판 김수행의 『자본론』3권 하편의 1011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김수행은 이를 “필연”으로 옮긴다 (내가 갖고 있는 『자본론』은 개역판이 아니기 때문에 좀 그렇지만, 이 부분은 김수행의 번역도 별로 좋지 않다). 분명 necessity에는 필요성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자유의 왕국과 대비되는 필연의 왕국이라는 맥락에서 필요성보다는 “필연”으로 옮기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필요”라는 번역어는 37쪽에서도 나오고, 109-110쪽에서도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결여로 인한 필요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유와 대비되는 필연을 뜻한다고 읽는 것이 올바른 독해일 것 같다.

- 116쪽: “현금가능자산” → “유동성 자산”

- 144쪽: “『노동, 임금, 그리고 자본』” → “『임노동과 자본』”  


같은 출판사에서 앙드레 고르의 유명한 저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책속표지에 선전해 놓았던데, 그 때는 이런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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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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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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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본주의
쁠리옹 지음, 서익진 옮김 / 경남대학교출판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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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같은 책. 가격과 퀄러티 모두 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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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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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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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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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본주의
쁠리옹 지음, 서익진 옮김 / 경남대학교출판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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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역사는 계급투쟁과 약탈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혁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위력과 그 질긴 생명력은 바로 이 체제혁신능력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의인화의 무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살아남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꾼다. 이 말은 곧 자본주의가 그 안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대가 이전과는 다른 시대라고 느끼게 하고, 그 시대의 의미를 당대에 깨닫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한다. 화가를 배려하지 않는 못된 모델처럼 자본주의는 스케치가 끝나기도 전에 조명과 의상, 표정과 포즈를 바꿔버린다. 도미니크 쁠리옹의 『신자본주의』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적 경제 위기 직전 시기의 자본주의에 대한 크로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원서는 2003년에 르뻬르 문고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쁠리옹은 이 책의 출판 당시 자본주의의 새로움을 정보통신 기술 혁신으로부터 파급된 지식 경제의 출현과 금융의 세계화라는 두 과정의 맞물림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실 이 자본주의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책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밀레니엄 전환기에 크게 유행을 하였다. 그 강조점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후쿠야마 (정치), 오마에, 라이시, 카스텔 (테크놀로지) 등도 그렇고, 쁠리옹과 이론적으로 가까운 아글리에타나 브와이예, 셰네 (금융) 같은 프랑스 조절이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전의 책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새로움에 대한 또 하나의 단순한 호들갑만은 결코 아니다. 쁠리옹은 미국의 신경제 호황과 이어진 IT 거품 붕괴를 기술혁명과 증시공황의 주기적 반복을 특징으로 갖는 자본주의의 역사의 연장으로 파악한다. 그는 요셉 슘페터와 프랑수아 카론을 따라 IT 신기술, 신소재, 생명 공학 등의 새로운 기술 혁명을 제3차 산업혁명(18-20)으로, 알프레드 챈슬러를 따라 2000년대 초반의 e-공황을 자본주의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기술혁신과 연관된 주식위기(69-74)의 하나로 파악한다. 1990년대 이후의 벤처 자본이나 혁신 클러스터에 대한 열광과 환멸은 이처럼 자본주의의 새로움과 더불어 역사적 구속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지식 경제의 출현과 전통적 경제 논리의 기각
제3차 산업혁명과 금융세계화의 결합은 “정보와 지식이 전략적인 지위를 점하는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초래하였고, 이는 지식의 생산과 전파의 기존 논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유형재의 경제’로부터 ‘무형재(intangibles)의 경제’로의 이행, 대량생산 대량소비에서 서비스의 개인별 맞춤 생산으로의 이행을 초래한다. “생산물의 내용이 갈수록 정보로 채워”짐에 따라 “생산물은 더 이상 불변의 특성을 구비하고 일정하게 결정된 가치를 가진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을 가지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를 발생시킬 수 있는 진화적인 대상으로 간주된다” (21-22). 이동통신회사들의 판매행위에서 알 수 있듯, 물질적 생산물은 실제 가치 이하로 팔리지만, 이를 통해 더 비싼 서비스를 소비하도록 유인한다. 이는 지식을 ‘무형자본’(교육, 훈련, 연구개발, 보건 등의 인적 자본, 지적 재산권, 상표)으로 변형시키며, 주식시장에서 평가되는 기업 가치도 물질적 자산보다는 이 무형 자본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27, 67). IT 신기술에 기초한 ‘현대 기술 시스템’의 비용 구조는 기존의 전형적인 비용구조와 전혀 달리, “고정비용은 막대한 반면 가변비용은 극히 작다. 따라서 비용은 생산량에 (거의) 비례하지 않”으며, 초기 생산 비용, 곧 생산물의 구상 과정에는 매우 높은 비용이 들지만, 이후의 추가 단위 생산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는 기업으로 하여금 생산규모를 확대하게 하는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이는 ‘네트워크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이동통신회사를 선택할 때 가입자 수가 가장 많은, 그래서 가장 방대한 네트워크를 가진 회사가 선호”된다 (26). [얼마전 결정된 KT와 KTF의 합병과 이에 대한 SK, LG의 반발은 좋은 예이다.]

경제의 이러한 변화는 경제를 이해하던 기존의 방식들이 기반하고 있던 전제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전제인 “순수완전경쟁의 표준 모델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는 이른바 ‘원자성’ 가설([시장에는] 수많은 주체들이 존재하고 그 중 어느 누구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다)은 타당성을 상실한다” (26-27). “비용의 대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순간 자연독점과 공공재의 상황이 조성되고, 이러한 상황은 완전경쟁 모델의 논리와 상충되기 마련이다” (29). 부정되는 것은 주류경제학의 전제만이 아니다. 리카르도와 맑스의 고전파 이론의 가정들 중 하나인 “노동가치” 또한 기각된다 (68). “유형재건 무형재건, 상품의 교환가치는 궁극적으로 더 이상 그 속에 포함된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로 지식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가치와 이윤의 주요 원천으로 된 반면 이 지식이란 생산요소가 그 공공재적 성격으로 인해 교환가능한 자본으로 변환되기는 어렵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모순을 지적 재산권의 제도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는 원자성 가설의 궁지와 비슷한 어려움을 초래한다. [상품으로서 지식의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무형자산의 화폐가치는 등가 관계가 아니라 세력 관계를 반영”하게 되며, 이는 ‘시장 조절과 공권력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68, 29)

자유금융시장 경제의 역설적 결과
“무형재의 경제”로의 생산물 시스템 이행과 관치금융에서 “자유 금융시장 경제”로의 금융 시스템 이행은 상호 강화하며 병행한다. 이 새로운 금융 시스템 하에서는 “자본시장이 은행금융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하고, 나아가 금융시장의 조절에서 경쟁 논리가 공공정책보다 더 중요시된다”(44). 이 이행의 원인은 “주요 공업국들이 ... 공공적자의 보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제 투자자들 특히 기관투자자들에게 공채의 매입을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연원한다. 이로 인해 국가의 정책은 글로벌 금융시장의 운동에 종속되었으며, “주주가치 극대화”는 기업 경영의 시대적 사명으로 부상한다. 기업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첨단 금융기법의 동원과 더불어, (1) 인수․합병, (2) 기업역량의 재집중, (3) 가치사슬의 리엔지니어링, (4) 자본강도의 감축 등을 시도한다 (100-104). 그러나 이러한 개별 기업들의 주주가치 극대화 행위들은 집합적으로 역설적인 결과를 산출한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유럽 시장 전체에서 주식의 순발행액 즉, 주식의 환수와 주주에게 지불된 배당금을 뺀 주식 발행총액은 마이너스였다. 달리 말해서, 주식시장은 기업들에게 자금을 조달해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업들로부터 자금을 빼나간 것이다! ... 주식시장의 세 가지 기능 - 자금조달, 평가 및 기업 재구조화 - 중에서 주식시장들이 진정으로 수행하고 있는 기능은 마지막 두 가지 뿐이다” (104).

아글리에타의 patrimonial capitalism 비판
그렇다면 이 새로운 금융 시스템과 새로운 정보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새로운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새로운 조절 원리를 갖고 있는가? 아마도 좌파 중에서는 아글리에타가 이 질문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성장체제를 patrimonial capitalism이라고 칭하였다. [서익진은 이를 ‘재산 자본주의’라고 번역한다. 아글리에타의 입장은 간략하게나마 「세계화, 사회 모델간 경쟁: 초국적 경제 정책의 요소」(이병천, 백영현 엮음,『한국사회에 주는 충고』) 에 실려 있고,『시민과 세계』2002년 2호에 실린 프랑수아 셰네의 「금융주도 축적체제론 논쟁: 쟁점과 비판」(410-429쪽)에 잘 요약되어 있으며, 셰네는 이 입장에 무척 비판적이다.] 이 낙관주의는 지속가능성과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근거를 찾고 있다. 먼저 증권의 공급은 축소, 제한되는 데 반하여 수요는 확장되는 상황은 증시에서 주식 운용의 수익성을 높이고, 주식 배당 수익의 증가는 임금과 생산성 간의 연동이 단절되어도 가계의 소비지출을 늘일 수 있게 해준다. 곧 “증시에서 주식 운용의 성과가 보장되는 한, 기업의 임금총액에 대한 축소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비와 경제 활동은 위축되지 않을 수 있다” (115). 다른 한편, “노동자들이 주주가 되면 집단적 자본 소유자로서의 지위를 매개로 기업의 의사결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자본 소유의 성격 자체가 변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투자자들의 발전을 매개로 노동자 주주제가 확장된다면 포드주의 시기의 임노동 타협을 대체하는 새로운 노자 타협의 초석이 마련”된다고 본다(116).

쁠리옹은 아글리에타의 이 아이디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 길지만 인용하자.
“과연 노동자 주주제가 ... 과거의 계급투쟁을 대신할 노사 파트너십을 조장함으로써, 혹은 그것이 ... '주주 민주주의'를 조장할 '대중 자본주의'를 가져다줌으로써, 노자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노동자 주주제는 주로 간부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며, 그래서 기업내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특히 주식에 투자된 저축의 대부분은 금융 성과를 중시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된다. ... 이 관리자들은 ... 주가지수를 추종하는 동일한 관리 정책을 실행하며 또 그 목적은 순전히 금융적인 데 있다. ... 노동자 주주는 일종의 '정신분열적' 상황에 처해 있다[Cf. 로버트 라이시, 『수퍼 자본주의』]. 그는 임노동자로서 임금 인상과 일자리의 유지를 원한다. 반면 그는 주주로서 자신의 저축에 대해 최대의 수익을 요구한다. 그런데 주주의 이러한 요구는 기업의 인건비 삭감으로 귀착되기 십상이다.”

쁠리옹의 아글리에타 비판은 옳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 내용과는 별도로 할 말이 좀 있다.
얼마전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1946.html)에서는 “‘대전환’의 시대”라는 기획의 일환으로 아글리에타와의 긴 인터뷰를 실은 바 있다. 여기에서 아글리에타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기존의 “주주가치 극대화에 밑바탕을 둔 성장체제”, 곧 “빚지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는 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 책에서 쁠리옹에 의해 비판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patrimonial capitalism에 대한 그 자신의 낙관적 견해로부터 한 발 물러선 것임이 분명하다. 애초의 낙관과는 달리 이 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포드주의로 회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연기금이나 국부펀드 같은 기관투자자들에게 “금융시장에서의 주요 행위자에 걸맞는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곧 지속가능성은 부정하지만 이상적 정당화는 여전히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대담은 이 부분에 대한 아글리에타 자신의 모순을 잘 드러내준다. 포드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 사이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면서 기관투자자들이 장기투자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이것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대담자가 patrimonial capitalism에 대한 아글리에타의 이전 정식화를 몰랐을까? 그건 아마도 아닐 것이다. 신문에 실리는 인터뷰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현 경제위기의 중대성에 대한 전문가적 고견을 싣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대담자가 이 부분에 대해 아글리에타에게 추궁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무척 아쉽기 짝이 없다. 
 


이야기가 잠시 딴 데로 샜는데 (이건 스스로 느끼는 내 서평의 치명적이자 만성적인 약점이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오자. 쁠리옹은 금융자본의 권력에 대한 제한을 설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이들의 처방책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시장의 논리에 근거하여 근대 자본주의의 남용을 교정하려는 ‘적응주의 전략’”이고, 두 번째는 “새로운 조절들은 강력한 대항권력의 형태를 취해야 하며, 이 대항권력은 주주 자본주의의 과도함과 위험들을 제한하는 데 불가결하다”고 보는 ‘급진 개혁주의’ 전략이다. 후자에 따르면, “기업에서 노동자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주주 노동자들의 대표로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표 그 자체로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148-149). 아글리에타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전후한 그의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입장으로 보이는 반면, 쁠리옹은 ATTAC과 같은 형태의 운동들이 세계 시민사회에서 금융자본에 대한 대항권력으로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 착목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책 속표지의 지은이 소개에 따르면, 쁠리옹은 ATTAC 학술위원회 회장이라고 한다. 이전에도 그의 글은 셰네가 편집한 『금융의 세계화』 4장에 수록되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대충의 내용 요약은 http://blog.aladin.co.kr/eroica/1938748 볼 것). 『금융의 세계화』는 프랑스에서 1996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이 무척 궁금하던 차였는데, 쁠리옹의 이 책을 읽게 되어 무척 기뻤다. 물론 그러면서도 현재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 때 느꼈던 갈증은 더욱 커졌다.  


쁠리옹은 2000년 3월에 폭발한 증시위기가 1929년 대공황 이래 가장 큰 것이며, 1873년에 시작된 장기침체와 두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고 한다 (71-72). 첫째, 이 두 위기는 모두 국제무역과 세계화의 진전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 금융 호황으로 인한 기업들의 과잉설비와 방만한 투자로 인해 위기가 연장되었다. 그러면서도 2000년의 위기는 1873년의 위기보다는 짧을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첫째 이유는 19세기 말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공공재정의 비중이 커져 있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개입이 안전판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자가 주택을 소유한 중간 계급의 증가"가 "증시 위기 발발시 안정화 요인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폭발한 지금 이 두 번째 이유는 그 정당성을 상실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쁠리옹은 2000년의 증시 위기에 대한 이 해석을 지금도 견지하고 있을까? 그가 이 책에서 분석한 2000년 증시위기의 의미는 2008년에 본격화된 세계 경제위기와의 연관 속에서 사후적으로 더 명료해질 것이다.  


서평 맨 앞에서도 말했듯, 자본주의는 늘 변신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급속한 변동은 새로움의 당대적 의미를 파악하기 무척 곤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165쪽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움의 당대적, 역사적 의미를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다. 종합적이면서도 간결할 수 있는 것은 대가의 저작이 가질 수 있는 미덕임이 분명한데, 이 책은 그러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미덕 하나는 프랑스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 간의 유사성에서 기인한다. 쁠리옹이 이 책에서 보여준 프랑스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은 한국이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경제로 변모하는 과정의 분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정도"(10)라는 역자서문이 처음에는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어쨌든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쁠리옹의 입장이 매우 궁금하다. 옮긴이 서익진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 분야의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번역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또 출판사들의 깊은 관심 또한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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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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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이병천 엮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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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출판된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이다.
이제 60년 남짓 되는 남한의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998-2007)의 10년이 꼴랑 전부이다. 그러니, 이 책은 그 자유주의 세력 집권기의 한 가운데에서 출판된 셈이다. 보수우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시기의 한 복판에서 지은이들은 왜 그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을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서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정희 신드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중권은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박정희 소동이 “한때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이제 한마당 희극으로 끝난 듯”하다고 평가절하하였다 (339-340). 그러나 당시 진중권은 몇년 후 박근혜와 이명박이 경쟁적으로 박정희의 후계자적 정통성을 주장함으로써 보수우파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진중권은 틀렸다. 그러나 바로 그가 틀렸기 때문에 (곧 박정희 신드롬이 한마당 희극이 아니라, 747이라는 개발공약을 앞세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됨에 따라 단순한 신드롬을 넘어서 정치를 바꾼 실질적 효과를 갖고 왔기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이병천의 총론을 포함하여 모두 열 두 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개발독재의 제 측면에 대한 경제학적 고찰을 싣고 있으며, 2부는 개발독재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함께, 이후 자유주의 집권기의 박정희 신드롬과 소위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 등을 다루고 있다. 글 하나 하나를 정리하는 것은 관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가장 흥미로왔던 서익진의 글과 여러 필자에 의해 반복되어 다루어진 주제 중 세 가지 사항 – 복선적 산업화, 국가의 금융통제, 경쟁적 노동시장 – 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 =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프랑수아 셰네에 대해 큰 호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책을 한국에 소개한 서익진에 대한 기대도 무척 크다. 이병천의 총론 바로 뒤에 실린 서익진의 글은 나의 그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조절이론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조절이론의 중심 격인 파리학파의 강한 이론지향성, 핵심부 국가에 국한된 분석범위, 일국적 분석단위 등이 몹시도 못 마땅한 나는 서익진이 소개해온 그르노블 학파의 좀더 유연한 조절이론에 큰 매력을 느껴 왔다.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 궤도에 대한 조절이론적 접근은 그 동안 초보적으로 몇 번 시도되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알랭 리피에츠의 <<기적과 환상>>(한울)이 그나마 가장 훌륭한 저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리피에츠의 “주변부 포드주의” 개념은 브와이예에 의해 모순형용으로 비판받지만, 브와이예의 이러한 비판에 의해 정작 강조되는 것은 리피에츠의 정치하지 못한 개념 사용이 아니라, 조절이론의 외부, 혹은 그것의 이론적 난점이나 공백의 시인일 뿐이다. 곧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존재하는 일국적 공간을 어떻게 전체의 부분으로서 분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조절이론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문제인 것 같다. 결코 무시될 수는 없지만 섣불리 다룰 수 없는, 그래서 뭉개고 넘어가거나 회피해 버리고 마는 문제이다.

내가 서익진의 이 글이 좋았던 것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일국적 공간에서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발전양식을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으로 나누어 동시에, 또 양자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왔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학파의 이론화 속에서 일국의 발전양식은 다섯 개의 위계화된 제도적 형태의 결합으로 설명되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일국의 거시경제가 어떻게 편입되어 있는가는 그 다섯 개의 제도적 형태 중 하나로 개념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창한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화에 의지하여 현실을 설명한 연구들은 무척 찾기 힘들다. 불임의 기간이 길어지면 그 이론에 대한 기대도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서익진의 글은 이런 내게 조절이론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가 조절이론을 통해 그린 박정희 시대의 발전양식은 다음과 같다.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    +       개발독재적 국가조절양식
대외적 측면     ●생산재 중심의 수입                           ●수입과 외환의 통제
                     ●해외차입: 차관 →국제신용
                     ●생산재의 ‘수입을 위한 수출’                ●수출지원 (환율 + 보조금)
                     ●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    ●국내의 상대가격 체계를 국제 가격 체계로부터 단절


대내적 측면     ●중앙집권적 은행제도: 고저축→ 고투자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적 운용
                     ● 복선적 공업화:                                ●잉여동원 및 배분의 국가관리
                         수출대체와 수입대체의 병행                 관치금융 + 저축 조장 및 소비 억제
                                         +                                   ●노동력의 국가관리: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                 - 저임금 : 수출경쟁력의 원천
                     ● 외연적 축적→ 내포적 축적                   - 저임금 장시간 노동 
                                                                                - 저곡가 정책

조절이론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간의 정합성, 혹은 제도적 형태들 간의 정합성을 통해 주어진 발전양식의 내적 작동원리를 규명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서익진은 1960년대부터 80년대 중엽까지 남한의 발전양식을 이와 같은 차입∙수출 기반 축적체제와 개발독재적 국가 조절양식의 결합으로 규정하면서, 양자가 대외적 측면과 대내적 측면에서 내적 일관성을 지니고 작동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얼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김형기, 서익진(2006)은 1980년대 중엽을 거치면서 3저호황에 힘입은 임금 상승에 의한 구매력 확장으로 인하여 내수시장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개발독재 발전모델”이 “한국적 포드주의 발전모델”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과잉생산 경향과 채무화 경향을 내적 모순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97-98년의 경제위기는 이 두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
박정희 시대의 복선적 공업화는 이병천 (47-51), 조영철 (139, 142) 등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이다. 이들 모두는 남한의 반주변부로의 예외적인 지위 상승의 원인을 바로 수입대체 산업화와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합에서 찾는다. 서익진은 이에 더하여 전후방 산업연관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의 병행적 시행”을 지적하며 “이중의 복선적 공업화”론을 제시한다 (80-82). 복선적 공업화는 대내적으로 I부문과 II부문을 고루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국가들이 겪었던 II부문의 저발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과당경쟁의 영역이 아니었던) 선진국을 시장으로 하는 제조업 수출 분야에 발빠르게 진출함으로써 창조된 동태적 경쟁우위를 가져옴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비롯한 제3세계 수입대체 산업화의 실패한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국가의 금융통제: 금융헌신과 금융제약
복선형 산업화는 발전양식을 구성하는 여타 제도적 형태들과 제도적 보완성을 갖고 작동하였는데, 국가의 금융통제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발전국가 문헌 중에서 앰스덴, 우커밍스, 웨이드 등에 의해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조영철과 유철규가 주로 살펴보고 있다.

조영철은 “대형 상업은행의 금융헌신(financial commitment)”이 후발산업화에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금융헌신은 자본시장 중심의 “이탈효과(exit effects)를 중시하는 거리두기 관계(arm’s length relations)의 단기적 기업금융”에서 관찰되는 금융유동성(financial liquid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모험적 산업화 추진을 위해 “헌신적 자본을 장기간 공급하는 기업금융체제”, 곧 지도하는 국가와 국가의존적인 재벌 간의 발전지배연합체제를 확립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36-142).

유철규는 1960-70년대 제3세계의 금융 현실에 대한 상이한 개념화, 곧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과 “금융제약(financial restraint)”으로 대변되는 시장중심 접근과 제도주의적 접근을 소개한다. 매키넌과 쇼우로 대표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금융억압 가설과 달리, 금융제약은 “정부가 금융부문으로부터 지대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대 취득의 기회를 창출하고 이 기회를 사적 자본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둘 중에서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이 개념만으로는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급진적 금융자유화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한국의 금융자유화는 남미와 달리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으며, 기존 선별금융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산업자본이 저항하기는커녕 ‘시장주의’의 이름을 빌려 대단히 적극적으로 금융자유화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조영철과 유철규의 글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좀 다르다. 예컨대 조영철은 “정부가 신용배분에는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신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지는 감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선별특혜금융으로 야기된 사채시장의 확대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149). 이에 반해 유철규는 “시기나 추산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의 은행신용 용처가 정부에 의해 직접 지정되었으며, 정부는 대부분의 주요 은행을 소유했고 이자율을 통제했다”고 주장한다 (177). 이러한 차이가 단지 1972년 8∙3 조치 이전과 이후의 차이인 지는 잘 모르겠다.  

[2011. 3. 16. 추기]  조영철의 주장은 장하원 (1999: 89-90)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용용처 규제에 대한 유철규의 언급은 1972년 8∙3 조치를 통한 정부의 대대적인 위장사채 단속 이후의 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장하원 (1999).「1960년대 한국의 개발전략과 산업정책의 형성」, 정신문화연구원 편,『1960년대 한국의 공업화와 경제구조』(서울: 백산서당), 77-125쪽 참조.

경쟁적 노동시장
개발도상국가의 시장 가격 왜곡은 여러 논자들(앰스덴, 쿠즈네츠, 드 버니스 등)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조영철은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에서는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함으로써 이러한 가격왜곡을 주도하였지만, 노동시장, 특히 생산직 노동시장은 “경쟁적 노동시장이어서 노동이동이 활발했고, 임금은 거의 노동의 수요∙공급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52). 이는 김삼수 (207-208), 이정우(232)에 의해서도 지적된다.  


기타
다른 글들도 재미있었다.
이병천의 총론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쟁점을 두루 살펴보는 글인데, 그가 소개한 일본에서의 논의들이 꽤 흥미롭게 들렸다.

이상철은 박정희 정권의 산업정책이 어떻게 유연하게 변화하면서 수출주도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였는지 살펴보고 있다. 내가 본 이상철 글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글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김일성의 유일체제 간의 연동을 살펴보며 동시에 유사성을 비교한 이종석의 글도 재미있었고,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득실을 일본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는 한홍구의 글도 매우 설득적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언제까지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 남을까?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은 사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의 부제이다. 그 책은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을 다루고 있는데, 1944년에 출판되었지만 21세기 벽두에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읽히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2차대전 전후 케인즈주의의 흥망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쇠퇴를 19세기 시장 문명의 흥망 이후의 20세기 속편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맑스는 1852년에 출판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들이 어떻게 죽은 것들을 되살려내 현재 그들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만듦으로써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 고찰하였다. 16세기 독일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사도 바오로를 가장하였고, 17세기 청교도 혁명의 크롬웰은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인용하였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로마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세계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맑스의 말은 이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가리킬 때에는 맞는 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유신의 선포와 10∙26 암살까지 박정희 체제의 존속은 20년 가까이에 걸쳐 진행된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이었지, 결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는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현재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언어를 차용했던 부르주아의 행위가 지배계급으로서 그들의 부족한 현재적 정당성을 과거의 신화로 감추려는 시도였음을 간파한다. 이것은 지난 10년간의 박정희 신드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가 동원되는 과정이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과정일 경우, 역사가 두 번 반복되고 그치리라는 보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예외적인 데에 비하여, 수동혁명은 항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로 집약되는 남한의 1960-70년대는 참으로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다.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도 갈 곳을 몰라 이전의 시장지상주의적 관성에 의존하는 현 정부의 경제운용 또한 참으로 특이하게 보인다. 10년 혹은 20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그 미래에 올 “우리 시대”의 기원으로 소급할 것인가? 미래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새 시대의 혁명은 정녕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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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9-01-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에로이카 님 리뷰는 알차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서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에로이카 2009-01-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서재글에 무려 다섯 달만에 달린 댓글인지라 무지 반갑습니다. ^^ 두서없는 리뷰에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겨레신문에 격주 연재된다는 21세기 진보 사상 기획에 기대가 무척 큽니다. 지성의 비관이 커질수록 의지의 낙관은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고만 있는 나날들입니다. 발마스님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