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Malo) 5집 - This Moment
말로 (Malo)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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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곡들이지만, 말로가 부르니 색이 확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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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바다 - 칼 슈미트의 세계사적 고찰
칼 슈미트 지음, 김남시 옮김 / 꾸리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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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칼 슈미트의 책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Governing by Debt에서 라자라토는 슈미트가 정의한 노모스의 세 가지 뜻 – appropriation, distribution, and production – 에 주목하면서 자본주의의 국면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밝혔는데, 그 논의가 흥미로워 슈미트의 국역서들을 찾아보았다. 1995년에 대우학술총서로 출간된 『대지의 노모스』(최재훈 역)는 라자라토가 인용하는 책 말미의 부록을 누락하고 있었다. 살짝 실망하여 다른 책들을 보다가 읽게 된 책이 바로 『땅과 바다: 칼 슈미트의 세계사적 고찰』(꾸리에)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42년에 출판되었다.

  먼저 구어체로 쓰인 문체가 특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슈미트가 딸에게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한국말로 옮긴 것이었다.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은 제목을 갖고 있지 않아서 목차만 보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의 과학적 사상과 구약의 신화에서 추출된 개념들을 통해서 서양사를 직조하는 슈미트의 안목이 탁월하다.

 

1.

  “인간은 땅의 존재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오니아 자연철학 시대의 4원소 -, , 공기, 로부터 시작하여, 욥기(40-41)에 나오는 LeviathanBehemoth를 차용하면서 19세기 말까지의 세계사를 양자간의 투쟁, 곧 대양(권력)과 대륙(권력) 간의 투쟁으로 흥미진진하게 해석한다.

  1000년경부터 지중해를 지배했던 베네치아, 브로델이 말하는 장기 16세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가장 앞선 조선기술과 고래잡이를 했던 네덜란드(6), 16세기 후반부터 사략선을 앞세워 가톨릭 세계권력인 스페인을 결국 격퇴하는 대양 주름잡이영국(7-9)까지 오늘날 세계체계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국가들의 등장이 바다의 제패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 영국은 이전의 대양 권력들과는 달리 전지구적 차원에서 공간혁명, 곧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척도, 준거뿐 아니라 공간 개념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키는 혁명을 성취한다(10, 72). 그 이전의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 1세기의 로마 제국 확장, 십자군 전쟁이 문화적 전환과 동반된 공간의 확장을 초래하였다면, “로마 제국의 멸망, 이슬람의 확산, 아랍과 터키의 침략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육지화와 공간의 수축을 야기했(11, 77).

  16-17세기의 신대륙 발견과 세계 일주는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지구적 규모의 공간혁명을 발생시켰다. 이제 지구가 둥글며 태양을 공전하고, 우주는 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서 중력의 법칙 덕에 인력과 척력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추론이 확고부동한 경험이자 실체적 사실로 자리매김된다. 이로부터 이전까지는 낯선 관념이었던 비어있는 공간을 인식하고, 자신과 세계가 그 빈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2, 81-3). 새로운 공간 개념의 등장은 중세 고딕 예술이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2.

  슈미트는 13장에서 모든 질서란 결국 공간의 질서라고 하면서, 근본적인 질서, 노모스를 각주에서 짧게 정의한다. 14장부터 그는 유럽이 신대륙을 (원주민으로부터 강제로) 취득하고, 나눠갖기 위해 서로 싸우는 과정 속에서 노모스의 세 가지 의미 취득, 분배, 생산과 소비 가 적극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소위 신대륙의 발견 이후의 역사를 종교전쟁으로 폭발한 기독교 정복자들 간의 갈등,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세계투쟁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흙과 물이라는 원소의 대립과 연결시키는 그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러한 대립을 진정한 동지-적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것에 관한 그의 대표적 논의와 연결시킨다.

  16-18장은 홉스봄이 19세기 3부작을 통해서 다룬 영국 헤게모니의 등장과 성숙 과정의 핵심을 압축적이면서 속도감 있게 서술한다. 영국의 대양 취득, 이에 기반한 자유무역 제국주의, 그리고 산업혁명이 다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땅과 바다의 원소적 관계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왜인지 아니? 거대한 물고기였던 리바이어던이 이제 기계로 변신했기 때문이야. … 기계는 바다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지. 대양 권력의 위대함을 불러내던 대담무쌍한 인간의 힘이 이전까지의 의미를 잃어버렸지” (119-120).

 

그리고 그는 이 산업혁명이 영국 세계권력의 비밀이었던 진정한 해상적 실존의 핵심을 타격하였다고 한다.

  19-20장은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산업화 국가의 추격 과정, 2차 산업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는데, 이 때 등장한 공군력은 땅과 바다에 이어 새로운 차원을 점령한다. 무기, 교통수단, 척도, 규범 등에서 또 한 번의 공간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흙과 물에 이어 공기 혹은 불이라는 새로운 원소의 등장으로, 혹은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에 이어 세 번째 거대한 새가 등장했다고 특징지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16-17세기에 진행된 공간혁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파급력이 큰 공간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영국의 바다 취득의 토대가 사라지고, 당시까지의 대지의 노모스 역시 사라지고, 인간 실존의 변화된 척도와 관계들이 새로운 노모스를 강제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세계의 종말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는 노모스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낡은 노모스의 사멸과 새로운 노모스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3.

1981년에 쓰여진 후기에서 슈미트는 가족의 삶이 경작지인 땅을 필요로 하듯, 산업은 외부로 부흥하기 위해 바다를 필요로 한다는 헤겔의 『법철학 요강』 247절을 인용하면서, 눈 밝은 독자들은 243-246절이 맑스주의를 통해 전개되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 책이 247절을 전개시키려 했다는 것을 발견하리라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헤겔의 『법철학』을 찾아보았다. 『법철학』은 1820년에 출판되었고, 360절로 되어 있는데, 본론은 법/권리, 도덕, 인륜의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3부 인륜은 가족, 시민사회,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슈미트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32장 시민사회의 뒷부분에 해당된다. 243절은 시민사회에서의 부의 축적과 노동자 계층의 소외, 예속, 궁핍을, 244절은 노동자계급의 자존감 상실과 천민으로의 전락, 그리고 반대편의 부의 집중을, 245절은 빈곤 구제를 위한 공적 개입과 자율적 시민사회의 원리 간의 대립, 그리고 생산물의 과잉과 소비의 부족, 곧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이야기한 상업공황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후의 절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장과 식민지의 건설로 이어진다.

  오래 전 읽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내용은 이제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법철학』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내 생각에, 슈미트는 『법철학』의 243-246절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예비하고 있다면, 247절은 맑스가 『자본』 저술 전에 계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던 세계시장과 식민지에 관한 저술 계획을 예비한다고 보는 것 같다. 슈미트는 맑스가 계획만 했던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리바이어던이 물고기에서 기계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지구적 공간혁명과 노모스의 교체로 서술한 것이다.

 

4.

  당분간 슈미트나 헤겔을 읽을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땅과 바다』를 읽은 성과라면, 슈미트가 이해하는 노모스의 세 가지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appropriation을 『땅과 바다』와 이전에 번역된 『대지의 노모스』 두 권 모두에서 취득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Appropriation은 보통 전유라는 일상에서는 잘 안 쓰는 말로 번역하는데, “취득이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오지만, appropriation에 함축되어 있는 강제성의 측면이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땅과 바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또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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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을 다 읽기도 전에 오역 때문에 짜증나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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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인간- 인간 억압 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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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통치- 현대 자본주의의 공리계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허경 옮김 / 갈무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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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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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New capitalism을 신자유주의로 번역해서 애덤 스미스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버젓이 번역해 놓은 가관인 책. 잘 읽히는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음. 그래서 더 나쁨.
민주주의 살해하기- 당연한 말들 뒤에 숨은 보수주의자의 은밀한 공격
웬디 브라운 지음, 배충효.방진이 옮김 / 내인생의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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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격 없는 번역자들의 명작 망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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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시대 대기업의 진화
베넷 해리슨 지음, 최은영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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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일부를 대충 읽었던 것이 10년 전이다. 그 때만 해도 별 재미없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강산이 한 번 바뀌고 나니 이 책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대기업의) 행위가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동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가의 문제인 행위자의 구조화-구성적 역할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또 흔히 분리되어 다루어지는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구조들의 변동이 이 단일한 행위의 분리불가능한 구조적 효과로서 설명된다. 곧 세계경제의 변동(초국적 네트워크 생산체계의 출현)과 일국 노동체제 변동(노동시장의 분절)이 lean and mean한 기업조직을 추구하는 대기업의 유연화 전략을 통해 훌륭하게 매개 연결된다. 지은이 베넷 해리슨 (1943-1999)은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지리학, 사회학 등 개별 분과학문의 연구업적을 가히 르네상스 학자적이라 할만한 포괄적 통찰력을 통해 종합하여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글로벌-로컬 넥서스 연구의 훌륭한 전범이다.

2.
피오르와 세이블이 쓴 The Second Industrial Divide를 비롯하여 일련의 저작들은 1970년대까지 자본주의의 지배적 경향으로 나타났던 자본의 집적(concentration)과 집중(centralization)을 통한 독점대기업의 발전 추세가 유연적 생산 방식을 갖춘 소기업 집단의 발전으로 역전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저작들에서는 대량생산 대중소비의 시대가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변모하면서 대기업이 그 규모가 야기하는 경직성으로 인하여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멸종해가는 공룡처럼 그려진다. 그러므로 중소기업 중심의 지역 클러스터를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좌우파 모두에게 주목받았다. 이는 지방정부를 집권했던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의 “진보적 지역주의(progressive localism)”의 정책적 필요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국가 간의 공생 관계를 비판하면서 경제의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한다. 베넷 해리슨의 이 책은 이런 주장들에 대한 실증적 비판이다. 피오르와 세이블이 그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제3 이탈리아 “The Third Italy”의 경우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벤처 기업의 혁신적 성격의 본보기로 예시되는 실리콘밸리의 경우를 실증적으로 검토한다. 소기업 옹호론이 대부분 “유연성(flexibility)”에 주목하지만, “소기업은 후발주자의 역할을 할 뿐 선도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또 “유연성의 추구는 개별 기업의 신속한 대응과 이윤 증대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고용안정성을 해치고 임금을 삭감하며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최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정치 허무의식을 강화시킨다” (32). 소기업 육성론은 유연적 생산의 이러한 어두운 면을 외면한다.

그렇다고 해리슨이 대기업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 변화 없이 여전히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대기업이 그러한 어려움들을 타개하기 위하여 어떻게 스스로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중 없는 집적” (concentration without centralization, 국역판에서는 “이심화된 집중”으로 번역)으로 요약할 수 있는 네트워크화된 생산이 해리슨이 내리는 답이다. 소기업 발달론이 주목하는 한 측면, 곧 대기업의 집적된 경제력(concentrated economic power)이 유연성이 요구되는 시기에서는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이유 자체는 옳지만, 이로부터 대기업이 쇠퇴하리라는 전망을 도출해내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곧 소기업 발달론이 주목하는 생산단위의 탈집중(decentralization of production units)은 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유연화를 추구하는 대기업에도 나타나며, 이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기제이다. 곧 상이한 규모의 기업들, 정부기관들 간의 거래 및 제휴 네트워크 안에 권력은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또 각각의 상이한 부문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부 역시 더욱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대기업은 이 “집중 없는 집적”을 통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한다. 해리슨에 따르면, 1970년대말 80년대 초에 분명해진 대기업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1) “린 생산전략”을 통한 중심-주변 기업간의 네트워크 조직의 발전, (2) 정보화로 가능해진 노동자에 대한 효과적 통제, “적시 공급”, 그리고 표준화, (3) 초국적 대기업 간의 전략적 제휴, (4) 고임금 노동자의 능동적 협조 유도 (34-37). 이러한 기제를 통해 대기업의 특권적 지위는 공고화되었다. 그러나 이 유연적 생산은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곧 네트워크 내의 핵심-주변 (core-ring) 간 노동시장의 분절을 심화시킴으로 계급간 불평등뿐만 아니라, 노동계급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이상이 1장에 정리되어 있는 이 책 전체의 개관이다. 2부(2-5장)에서는 제3이탈리아와 실리콘밸리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소기업은 기술혁신의 선도자도 아니고 주된 일자리 창출자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또한 거기에도 국가, 초국적 자본, 금융 대기업은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다. 사실 1장부터 5장까지는 사례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 그래서 오히려 다소 지루할 정도이다. 그러나 대기업이 주도한 “지구적 네트워크 생산체계의 등장”을 다루는 3부, 특히 변화한 세계경제의 동학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기업의 대응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개념적 장치들을 소개하는 제6장은 읽는 이의 신경이 팽팽해질 정도로 집약적이다.

1980년대 초반 대처, 레이건, 콜의 집권 이후 선진국의 거시정책 상의 변화로 명백해진 신자유주의적 흐름이나 이에 대한 (프랑스) 좌파의 학문적 비판인 조절이론 모두 1970년대의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기존 대량생산체계의 위기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는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위기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기업은 어떻게 변모하였는가? 위기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기업간 경쟁의 대폭적 증가를 갖고 왔고, 대기업들은 이에 대해 기업간 네트워크 창출로 대응하였다. 이는 기업의 유연성 추구의 결과였다. 기업들은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직적 분산(vertical disintegration)”을 통해 이전까지의 노사(labor-capital) 간의 내부 고용 관계를 발주자와 하청자(customer-supplier) 간의 외부 하청관계로 전화하는 한편, 자본간 경쟁은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s)라는 이름으로 경쟁자간 협력(cooperation between rivals)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면서 네트워크 생산체계를 창출하였다 (222-231). 이것이 지은이가 책 전체를 통해 반복하는 “탈집중화된 집적”의 과정이었다. 네트워크 생산체계의 등장은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났으며, 이것의 기원 역시 지역마다 상이하다. 7장에서는 일본과 유럽의 경험을, 8장에서는 미국의 경험을 반추한다. 이어 9장에서는 네트워크 생산체계의 부산물인 노동시장의 분절이 야기하는 불평등 증가를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4부의 10장에서는 정책적 함의를, 11장은 영어 2판의 저자 후기 (1997년)를 싣고 있다.

3.
이 책은 이 책의 출판 (1994년) 이후에 나온 마뉴엘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 3부작 (1권이 1996년에 출판)보다 훨씬 재미있다. 네트워크 기업의 출현을 정보화 기술의 변천에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제도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유연적 생산의 어두운 면에 큰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 출판 직전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나왔던 성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학문적 성과로 발전시켰다. 국역된『마이클 포터의 국가경쟁우위』, 제임스 워맥 등이 쓴 『생산방식의 혁명』, 데이빗 고든 등의 『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뿐만 아니라, 번역되지 않은 스토퍼, 디큰 등의 경제 지리학적 연구, 제레피의 상품연쇄 분석 등 각개약진해온 개별 학문 연구들이 이 책에서 종합된다. 이를 통해 학제간 연구를 넘어 그야말로 단일학문적 성과를 도출한다.

4.
이 책에서 해리슨이 묘사하는 초국적 기업의 진화과정은 한국 재벌의 초국적화 과정과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책이 출판될 당시 한국 재벌은 초국적화의 걸음마를 막 떼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Fortune지가 올해 발표한 2010년 세계 500대 기업에는 한국 대기업 14개[삼성전자 (22위), 현대자동차 (55위), SK 홀딩스 (82위), 포스코 (161위), LG 전자 (171위), 현대중공업 (219위), GS 홀딩스 (237위), 한전 (270위), 한화 (320위), 삼성생명 (332위), LG 디스플레이 (439위), 두산 (488위), 삼성 C&T (491위), 한국가스공사 (497위)]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한국 기업들 중 공기업이 민영화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본집중과 자본집적의 병행을 통하여 이 위치에 이르렀다. 1997년 경제위기 직후 단행된 재벌간 빅딜은 M&A를 통해 동일 시장 내에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효과를 갖고 온 자본집중의 대표적인 예였다. 외주하청의 증가라는 현상은 분명히 나타나지만, 이것이 자본집중의 완화를 갖고 오지는 않았다. 특히 현대 자동차의 경우는 최종상품 생산업체(현대-기아 자동차)가 후방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산업분야에 직접 진출하여 계열사(현대 모비스, 캐피코, 현대하이스코)를 설립함으로써 수직적 계열화가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소부품업체와 한보철강 등을 인수하면서 커왔다. 또한 전방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금융업계에서도 신흥증권을 인수하여 HMC투자증권을 설립한다. 이는 그 전까지는 사업체 공정 내부에서 생산되는 부품을 외부에서 구매조달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자본의 탈집중(decentralization)과는 상반되는 내부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재벌의 진화과정의 특수성과 경로의존성은 이 책에서 대기업 진화의 주요경향으로 상정된 “집중 없는 집적” 과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1970년대까지 법인자본주의 시대의 미국 대기업 모습과 여전히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5. 훌륭한 번역, 하지만 옥의 티 “이심화된 집중”?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명의 역자가 참여한 번역이라는데, 전반적으로 술술 잘 읽히는 훌륭한 번역이다. 또한 책의 제목인 Lean and Mean을 한국어로 번역하지 못한 것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 말은 정말 영어로는 아주 쉽지만, 한국어로는 번역하기 지극히 힘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요 개념인 concentration without centralization을 “이심화된 집중”으로 번역한 것은 문제가 좀 심각하다. 지리학 전공자들의 번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심화”란 용어가 decentralization을 번역해서 한국 지리학계에서 통용되는 jargon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단지 번역어가 보편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국지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계를 중심으로 기존에 상대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통용되는 어휘체계와 충돌한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곧 경제학 분야에서는 concentration은 집적으로 centralization은 집중으로 번역한다. 이는 단순히 비슷한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시물을 갖고 있는 개념적 배타성을 유지해야 하는 단어들이다. 곧 자본의 집적(concentration)은 개별 자본의 축적의 진행으로 인한 성장을 가리키고, 자본의 집중(centralization)은 자본 간 합병을 통해 자본의 덩치가 커지는 것을 뜻한다. 지은이가 concentration without centralization이라는 개념을 택한 것은 곧 현재의 대기업 네트워크의 역사적 특정성을 “집적은 유지되지만 집중의 추세는 역전되었다”는 데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옮긴이들이 선택한 역어 “이심화된 집중”은 집적(concentration) 개념을 “집중”으로 오역하고, (상대적 보편성을 띠고 통용되는 집중(centralization)의 파생어인) 탈집중 (decentralization 혹은 without centralization)을 “이심화”로 국지화 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탈집중화된 집적”, 혹은 “집중 없는 집적”으로 국역하는 것이 보다 옳다고 생각한다.

번역 문제에 대한 언급은 언제나 그렇듯 옮긴이들의 값진 노력의 성과를 깎아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이 훌륭한 책이 한국에서도 그 값어치에 걸맞는 주목과 대우를 받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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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트랜스 소시올로지 4
도미니크 레비, 제라르 뒤메닐 지음, 김덕민 옮김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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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서두에서 지은이들은 분석 영역과 방법의 다양성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자 동시에 난점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으로서 이 책이 다루는 범위를 명확히 한다. 이 책은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의 두 이론 영역에 걸쳐 있으며, 양자의 중첩을 통해 고안한 “자본-관리주의” (capito-cadrisme) 사회구성체 개념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생산양식의 구체적 접합으로서 현상하는 사회구성체를 분석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이 이제까지 완전히 간과되어온 현상들을 새로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새로운 개념의 지시대상은 새로운 중간계급의 출현이나 경영자 자본주의의 등장 등을 통해 분석되어온 현실들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의 새로움이 아닌 해석의 새로움이다.

역사적 기술
2장에서는 1869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를 미국의 이윤율[고정자본에 대한 이윤 총량의 비율]의 하강과 상승을 추적하면서 네 시기로 구분한다 [1869 - ①↘(1890년대 위기) - 1900 - ②↗(1929년 대공황) - 1953 - ③↘(1970년대 위기) - 1982 - ④↗ - 2000]. 이러한 경제순환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안정성의 표현인데, “자본주의는 결코 이러한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38).

3장에서는 네 시기 중 가장 최근 국면인 신자유주의 국면을 분석하고 있는데, 지은이들의 다른 저작인 『자본의 반격』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곧 “1979년의 격변”으로 노골화된 통화주의의 대두는 부유층들의 상대적 쇠퇴를 저지,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실질이자율의 상승, 채권자와 주주의 지위 강화, 성장을 위한 투자의 감소, 제3세계로부터의 이윤 강탈 등이 수반되었다.

불균형 미시경제학과 일반 불균형 모델
지은이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제도주의이면서 경제주의이고, 동시에 진화주의이다 (22). 이들의 설명적 가치는 결합되어야 하며, (경제이론의) 모델과 제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수학적 정식화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4장에서 정식화시키고 있는 불균형 미시경제학과 일반 불균형 모델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논리적 정당화이다. 마르크스는 고전파 경제학으로부터 두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62-63): 곧 “판매자가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 상응하여 가격을 수정한다”는 것과 “경쟁 과정의 중심에는 자본의 이동이 있다”는 것. 마르크스는 이 아이디어를 “다양한 부문의 이윤율 균등화로의 경향”으로 정식화시키는데, 지은이들은 이를 경제 행위자들이 “불균형을 포착하고, 그것에 대응하여 행동을 변경한다”는 자신들의 불균형 미시경제학의 기본 가정으로 추상화시킨다.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분산된 개별적 반작용이 시장의 무정부 상태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중앙화된 화폐 메커니즘의 존재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적 전제 위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의 불안정화 요인과 안정화 요인을 동시에 포착하고자 하는 일반 불균형 모델을 고안한다. 그리고 이 모델에 근거하여 자본주의는 비례(경제부문 간 비율)의 안정성∙견고성과 규모(전체 경제)의 불안정성∙취약성이라는 정반대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fallacy of composition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보다 세련화시킨 버전인 것 같다.)

이윤, 임금, 지대와 같은 소득은 전반적인 경제 상황(단기적으로는 경제순환의 어떤 국면인가, 장기적으로는 이윤율의 운동 경향)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경제행위자들 간에 파이 전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투는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임금은 또한 경제상황과 세력관계 양자의 결합에 인구 변동마저 결합된 노동 가능 인구와 고용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소득 결정에 개입하는 세력관계의 논리를 이자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점에서 지은이들은 1979년 폴 볼커의 이자율 인상이 시장 메커니즘의 효과가 아니라 권력행사의 효과라고 본다.

그러나 모든 경제 현상을 사회적 폭력의 문제로 환원할 경우, 경제학의 존립근거는 상실된다. 경제 전체 수준에서 개별 변수들이 맺는 상호관계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에 대한 분석은 비록 미완이라 하더라도 정치경제학 비판의 본령의 유의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마르크스적 경향”으로 요약된다: 새로이 등장한 혁신된 기술들 중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는, 즉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기술이 채택된다면, 자본과 실질임금, 생산과 고용, 자본구성은 증대하며, 이윤율과 자본생산성은 하락하고, 이윤 몫은 안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85-88). 2장에서 제시되었던 네 국면 중 이윤율 저하 국면(①과 ③)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적 기술변화는 관찰된다. 그러나 저하 국면 와중에 발생하는 구조적 위기 - 성장 속도의 감소, 거시경제적 불안정성의 증가, 금융적 혼란을 포함하는 전체적 통제불능의 상태 - 는 위에서 살펴본 불균형 미시경제학에서 상정된 메커니즘을 통해 기술변화 궤도를 수정한다. 이러한 수정을 통해 이윤율 저하 상쇄경향이 저하 경향을 압도하게 되며, 국면 ②와 ④에서 마르크스적 기술변화는 이윤율의 상승과 더불어 저지되었다.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지은이들은 위와 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영역에서의 이론적 세련화를 자신들의 역사적 실증작업을 해석하는 데에 동원한다. 이러한 이론과 역사의 대질은 역사유물론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진다. 6장을 읽으면서는 오래 전 읽었던 사적 유물론 교과서의 개념들을 다시 접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상이한 생산양식의 접합의 현실태로서 “사회구성체” 개념을 복권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곧 18세기 프랑스의 앙시엥 레짐에서 자본가와 봉건영주가 공존하였던 복잡한 잡종형성(hybridations)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와중에 나타났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대립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관리직(cadre)과 피관리층(encadrés) 간의 새로운 계급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관리주의와 중첩된다 (100, 120-126). 지은이들은 자본주의가 봉건제 내부에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것을 지양하는 사회관계가 싹튼다”고 주장하며, 이를 관리주의(cadrisme)로 부른다. 지은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주장의 정당함의 근거를 마르크스가 주식회사의 발전과 임금소득 경영자의 출현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전조, 사회주의의 한 변종 또는 예비단계”로 간주했던 것에서 찾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서 생산양식에 대한 지양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사고되는데, 하나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다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비약적인 생산력 발전을 가능하게 한 기존의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오히려 생산력 발전의 질곡으로 변화함에 따라 폭력적 위기가 발생하고, 이러한 기회 속에서 “대중투쟁의 고양을 배경으로 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탈취”하는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 자본가의 업무위탁처럼 제반 활동들의 점진적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것, 곧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내부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포스트자본주의 질서의 맹아로 간주했던 것의 등장이다. 지은이들은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에 비추어 봤을 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더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쟁취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이행 노선을 기각한다. 물론 이를 대체할만한 어떠한 대안적 이행의 상도 제시되지는 않는다.

자본-관리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관리주의적 생산양식이 접합되어 있는 사회구성체이며, 이는 20세기 초 법인혁명을 통해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의 착취를 설명하던 잉여가치론은 관리 지배계급과 피관리층 간의 착취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새로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8장에서는 경제학 영역과 역사유물론 영역에서 지은이들이 가한 마르크스주의의 수정 작업이 종합된다. 20세기 자본-관리주의의 역사를 크게 세 국면으로 구분한다. (1) 금융의 첫번째 헤게모니와 관리직의 부상, (2) 관리주의적 타협, (3) 두번째 금융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 이러한 자본-관리주의의 역사는 금융과 관리직 사이의 협력과 투쟁으로 점철되는데, 각 세 국면은 상호관계에 있어 누가 우위에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곧 첫번째와 세번째 시기는 관리직에 대하여 금융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 데에 비하여, 소위 영광의 30년, 케인즈주의의 시기는 관리직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잡소리
책 맨 뒤의 옮긴이 해제는 이 책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도, 지은이들의 이전 작업과 최근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무척 유익했다. 지은이들이 곧 출간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나 뒤메닐과 비데의 공동저작이라는 『대안 마르크스주의』도 국내에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대안 마르크스주의』는 불어로 되어 있어 더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지은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경제학과 일반 이론 사이의 “빈 공간”(18)을 메우는 작업으로 유의미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주의에 흥미를 느꼈던 이들이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데에는 이러한 저작들 - 곧 19세기 중후반에 정초되고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혁명을 통해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와 21세기의 변화된 현실 간의 거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매개하고자 노력한 저작들 - 의 부재, 혹은 이러한 저작들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주류/비주류 경제학들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 분석들을 생산해 내는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훈고학만 하고 있으니 현실과 이론의 괴리가 너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론과 현실의 빈 공간뿐만 아니라, 경제학과 역사유물론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려는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적 시도이고, 이러한 저작들이 국내 학자에 의해서도 많이 생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 하나 딸랑 읽고 나서, 여전히 마르크스가 옳다라는 식으로 견강부회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지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부분이 여전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갱신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국내 출판은 무척 반가웠다. 다음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든 단상, 의문, 토론 거리 정도이다.

자본-관리주의, 그리고 포스트신자유주의 및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대중투쟁의 장소?
두 가지 점만 보자. 20세기의 역사를 자본-관리주의로 파악하는 것과 역사적 자본주의 내의 국면 간 이행과 역사적 자본주의로부터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문제.

첫째, 사회구성체로서 자본-관리주의는 두 개의 추상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와 관리주의가 접합된 현실태, 혹은 그 추상적 생산양식이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우클라드적 계기들이 구성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저 ‘우클라드’라는 말 진짜 오랜만에 쓴다.) 역사적으로는 아마도 관리주의적 착취는 자본-관리주의 사회 (핵심부의 케인즈주의나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들)뿐만 아니라, 20세기 국가사회주의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관리주의를 자본주의로부터 분석적으로 분리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서구의 역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모태 없이 관리주의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리주의적 착취가 자본주의적 착취의 부분적 왜곡∙변형∙수정이 아닌 그와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을 경제학비판의 용어로 이론화시켜야 그것이 추상적으로는 독립된 생산양식이라는 점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려운 부분이 나타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관리주의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등장, 존재, 성장한 포스트 자본주의적 계기이지만, 국가사회주의에서의 노멘클라투라의 존재나 주변부와 반주변부에서 존재했던 강력한 국가주의적 자본주의 경향에까지 그 논의를 연장시키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강력한 국가의 존재란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적 논의뿐만 아니라 주류/비주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도 포스트자본주의적 계기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후진성이나 미숙성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고, 미래의 맹아이기보다는 과거의 잔재(debris)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추상적인 수준에서 관리주의를 자본주의와 독립된 생산양식으로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를 자본주의 내부에서 등장한 이행의 계기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양립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양립 가능하려면 이 논의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정교화가 훨씬 더 많이 수반되어야 할 듯 싶다. 특히 과거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논의에 비해 자본-관리주의 개념화가 어떤 장점을 갖는 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둘째, 뒤메닐과 레비의 20세기 자본주의 국면 분석은 폴라니가 자기조정 시장의 전제와 그에 대한 (제도적) 저항운동 간의 역사적 진자운동으로 개념화한 것을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포섭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국, 유럽, 일본에서 신자유주의의 퇴조,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반신자유주의 블록의 등장, 미국을 견제하면서도 공존 관계에 있는 중국 경제의 부상 등은 포스트신자유주의 국면으로의 이행의 계기로 역사의 추가 다시금 (제도적) 저항운동으로 향하는 것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을 듯 싶다. 그렇다면 폴라니 식의 제도적 저항운동과 마르크스주의적 대중투쟁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적 대중투쟁은 지금 어디 존재하는가? 국면 간 이행뿐만 아니라, 포스트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대중투쟁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나 운동의 제도화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제도의 운동화로서의 문화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기각했을 경우, 이행의 전망에서 대중투쟁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러한 고민의 실마리를 현실 속에 존재하는 투쟁의 계기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대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들은 쌓여가고,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도대체 이런 질문들이 무슨 소용이나 있는지, 그저 공상에 그치고 마는 것만 같아 갑갑하다.


훌륭한 옮긴이 해제에도 불구하고 번역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해야 하겠다. 난 불어를 모른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나름 성의를 갖고 이 책을 읽었던 독자의 불평 정도일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문장이 좀 많다. 무지해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렇다 쳐도, 제대로 된 한국말 문장이 아니라서 이해할 수 없는 곳들이 제법 있었다. 지금 보이는 대로 몇 개만 적어둔다.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17쪽 마지막 줄: “경제학 및 사회와 역사에 관한 더 일반적인 이론 사이의” → 경제학과 사회 및 역사에

21쪽 밑에서 세번째-두번째 줄: “양립하기는커녕” → 양립 불가능하다기보다는 ?

28쪽 마지막 줄: “기업 구성” → 형성

37쪽 세번째-네번째 줄: “에 뒤이어” → 후반에 ?

55쪽 12행: “지역 엘리트” → 국내

66쪽 14행: “지배적 미시경제학” → 주류

67쪽 13행: “집중화과정과는 별도로” → “과 함께” 혹은 “과 더불어” ?

71쪽 보론4 밑에서 세번째 줄: “나타난다” → 나타난다

86쪽 마지막 문단: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텍스트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매우 단순한) 원리는 만약 현존하는 가격과 임금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는, 즉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뭔 소리냐? “만약”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좀 손봐야 무슨 말인지 명확해질 것 같다.

99쪽 셋째 줄: “다양한” → 상이한

112쪽 8행: “재” → 재무

113쪽 보론 세번째 문단: “관리의 진보로 노동자의 숙련에 대한 박탈이 대체되었다”  

관리의 진보가 대체한 것이 노동자의 숙련인가, 노동자의 숙련에 대한 박탈(탈숙련, deskilling?)인가? 만약 노동자의 탈숙련이라면, “관리의 진보가 노동자의 탈숙련을 대신하였다” 이게 더 낫지 않나?

113쪽 보론 네번째 문단 첫째 줄: “소규적으로나마” → 소규적으로나마

121쪽 마지막 줄: “시나리오” → 시나리오가

130쪽 9행: “금융의 출현” → 성장

140쪽 11행: “성격화할” → 특징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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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10-14 03:10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

김덕민 2009-10-2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평 감사합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아서 고치고 있으며, 아마 출판사에서 수정한 부분을 인터넷에 올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판을 찍을 때 전부를 반영하여 수정하려고 하는데-초판을 구입하신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초판이 다 나가야 말이죠. ^^

김덕민 2009-10-2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 댓글을 남김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읽으신 부분 중에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텍스트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매우 단순한) 원리는 만약 현존하는 가격과 임금에서 초과이윤을 얻게 해주어 말하자면 이윤율을 증가시킨다면 그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좀 더 쉽게 표현하려다 발생한 것이고, 두번째 '관리의 진보로...'는 오히려 직역을 하다 발생한 것으로 에로이카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에로이카님의 의문 중 첫번째 부분은 저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긴하지만 이책에 나오는 것처럼 아직은 '관리자(직) 가설'로 남아있는 부분이고, 사회주의에 대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나온 것이라 단순히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두번째 뒤메닐의 논의는 폴라니의 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뒤메닐 또한 한국에서 자신의 논의가 논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데에 관심이 있으며 앞으로 나온 논문과 책에 많이 반영될 것입니다.

논쟁적 책이 저의 부족함으로 올바르게 알려지지 못한 부분을 에로이카님을 비롯한 독자들께 사죄하는 의미로 댓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계속 수정해나갈 생각입니다. 관심있게 봐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에로이카 2009-10-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덕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보잘 것 없는 서평에 이렇게 친절한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죄하는 의미"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 좋은 책을 번역해 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매끄럽지 못한 표현은 다듬을 기회가 곧 오겠지요. 또 일반 독자의 서평에 역자께서 이런 식으로 피드백을 보여주셔서 황송할 정도로 고맙답니다.

제 두번째 의문에서 폴라니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뒤메닐과 레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가 그렇게 읽었다는 얘기입니다. 단지 이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는 문제인 반자본주의 대중투쟁과 제도 개혁 간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질문, 곧 그람시적 의미의 진지전의 범위와 가능성에 관한 일반적 질문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이왕 발걸음을 하신 김에 몇 가지만 좀더 여쭤보겠습니다.
1. 이 책에서 말하는 "비례의 안정성, 규모의 불안정성"이라는 테제는 투간-바라노프스키 같은 이들이 말했던 "불비례설"에 대한 안티테제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요?

2. 언제나 자본가들은 이윤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혁신된 기술을 채택하지만, 결과로서 나타나는 이윤율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①과 ③ 국면처럼) 저하하기도 하고, (②와 ④ 국면처럼)상승하기도 하는데, 이 기술적 설명을 각 국면마다 좀더 구체적인 역사적 서술로 해주실 수 있나요? 좀 무리한, 무례한 요구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또 각 역사적 국면에서의 평균이윤율 변동을 한 두개의 요인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경제변수 간의 정형화된 복합적 인과관계를 제시한 것만으로는 그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 왜 지은이들은 "조절이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는 조절이론이 아니다"라고 할까요? "마르크스주의가 조절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요? 특히 요즘 조절이론은 브뤼노프의 영향을 받은 그르노블 학파 몇몇을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 절연한 것으로 보이던데요. 이것은 그저 제 느낌인데, 지은이들이 다른 학파들(과소소비론, 조절이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과 각을 세울 때 좀더 명확하게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그리고 한 가지만 더요. 선생님 혹시 뒤메닐과 비데가 썼다는 [대안 마르크스주의]는 번역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아직까지 없으셨다면 한 번 생각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

어쨌든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의 진전에 기여하실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가끔 오셔서 이것저것 좀 가르쳐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에로이카 2009-10-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첫번째 번역 부분은 이렇게 바꾸는 게 낫지 않나요?

"가격과 임금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초과이윤의 획득을 통하여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자본가들은 당연히 그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분석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원리이다."

김덕민 2009-10-27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은 에로이카님이 제시하시는 것이 좋네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1.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아시는대로 고전파와 케인즈의 결합 및 경기변동의 실물/화폐적 요인을 밝히는 저자들의 중요한 기여입니다.

2. 2010년에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될 <신자유주의 위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주 일반적인 설명은 얼마전 파리포럼에서 뒤메닐 교수가 발표한 글이 번역되어 있습니다.(번역자가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조금 허술한 번역이기는 하지만요. 뭐 그렇다고 저도 번역에 대단한 소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

3. 프랑스적 지형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며, 사실 미국의 고유한 독점자본주의론을 겨냥하는 이야기입니다. 뒤메닐 교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아글리에타는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주류 경제학 및 비주류경제학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최근의 위기에 대한 브레너/아글리에타/아리기/바란과 스위지 류의 미국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이번 악튀엘 마르크스에 실릴 아리기의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 서평>에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4. 파리 포럼에서 토론한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하지만 이 토론 내용의 번역을 아주 신뢰하기는 힘듭니다.) 현재 한국에서 <대안마르크스주의>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가독성을 높여서 번역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철학 이야기가 들어가다보니 더 신중해지고요.

며칠 전에 파리에서 뒤메닐 선생을 보고 왔는데, 자신의 논의를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논의가 전해져 그 분 작업에 매우 많이 반영될 것이 기대됩니다.

사실 출판사 교정표가 올려져 있나 궁금해서 들어왔는데 서평이 달려 있어 이런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다른 작업을 통해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로이카 2009-10-28 22:42   좋아요 0 | URL
김덕민 선생님,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파리 포럼"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선생님 댓글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남코리아"(?)라는 나라에 사는 분들도 뒤메닐에 관심이 있군요.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안마르크스주의>가 번역되고 있다는 이야기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뒤메닐과 레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앞으로의 작업들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덕민 2009-10-3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댓글을 달았는데, 몇가지 노파심도 있고, 불성실하게 답변을 한 것 같아 몇마디 답변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에로이카님의 블로그를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식의 댓글보다도 좀 더 정교하게 소개된 작업들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해주신 이윤율 동학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번에 출간될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훨씬 중요한 논의들이 포함될 텐데요. 기본적으로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수익성을 결정하는 소득과 기술,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소득과 기술의 장기적 동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 결정적 측면이 되고 특히 이번 2000년대 발생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이는 우리의 미래 전망과 대안을 설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제라르 뒤메닐 본인은 이른바 '금융화' 및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는 데 있어 세계체계론적 시각을 배제하거나 부정한다는 면이 중요합니다. 이는 국내에 나와 있는 번역서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첫째 세계체계론자들의 논리나 분석도구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경제학적 분석이나 브로델의 역사학적 시각을 신뢰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뉴레프트리뷰에 앞으로 번역되어 소개될 아글리에타의 글을 보면 그가 브로델적 시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메닐 선생은 자신이 미국경제를 특권화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진행되는 자신의 논의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고 대화해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노파심이 생기기도 하는데, 다른분들도 계시지만 뒤메닐을 한국에서 소개하는 데 있어 지대한 공로를 한 사람은 윤소영 선생인데 그 분의 작업인 뒤메닐, 아리기, 그로스만 등을 결합하려는 시도 자체는 그 분의 '독창적인 작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분의 독창적인 작업 덕분에 뒤메닐 선생과의 토론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번 9월달에 에마뉘엘 흐노, 마이클 로위, 제라르 뒤메닐이 쓴 책 두권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100가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를 읽자>라는 책입니다. 이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히 마이클 로위와 많은 논쟁을 했다는 것이 뒤메닐 선생의 설명입니다만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충분히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 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0개의 단어>는 프랑스에서도 매우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또한 <마르크스를 읽자>는 마르크스의 원문에 대한 코멘트를 붙인 것인데, 특히 뒤메닐 선생이 집필한 제3부 경제 편은 뒤메닐 선생의 마르크스의 자본의 계획과 방법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학자에 의해 집필된 자본 및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최신의 논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마뉘엘 흐노는 제가 알기로 이번에 <자본>을 프랑스에서 새로 번역 소개한 사람인 것 같은데요.(확실치는 않습니다) 이 사람이 헤겔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뒤메닐 선생이 앞서 말씀드린 <자본>의 플랜과 방법에 대한 연구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러한 경제학 비판 연구에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에로이카 2009-11-01 08:06   좋아요 0 | URL
저는 자본주의의 동학의 일면을 자신의 이론적 분석을 통해 잡아낼 수 있다면, 곧 자신이 취한 관점의 이론적 정당성을 현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세계체계 분석이든 조절이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체계 분석의 전제 -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이다 - 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최근에는 그 시각에 기반해서 나온 현실 분석들 중에서 별로 매력적인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글리에타의 작업들은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는대로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하지만, 제가 옛날에 조절이론을 한창 좋아할 때 가졌던 애정은 이미 식어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익진 교수가 열심히 소개하고 계시는 프랑스와 셰네나 도미니크 플리옹 같은 그르노블 학파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계체계 분석과 조절이론을 언급하셔서 말씀인데, 뒤메닐이 셰네나 플리옹 같은 이들의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체제에 대한 저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이들이 다 ATTAC 프랑스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을텐데요.

윤소영 교수의 작업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지만, 좀 아쉬운 것은 이론적 정당성에 대한 집착은 좋지만, 그 훌륭한 이론적 관점으로 현실 분석에 좀 기여를 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냥 운동권 지식인도 아니고 대학 교수이신데, 그 격에 맞게 신자유주의든 뭐든 현실 분석을 하셔서 학술적인 논문이나 제대로 된 저작으로 발표를 좀 하시든가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최신 소식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 재미있게 들립니다. 선생님께서 이 훌륭한 저작들을 열심히 번역해주시면, 말씀하신대로 제가 경제학 비판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른 일로도 이미 바쁘실텐데 너무 노골적인 부탁인가요? ^^) 그럼 또 뵙겠습니다.

2010-01-03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