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바다 - 칼 슈미트의 세계사적 고찰
칼 슈미트 지음, 김남시 옮김 / 꾸리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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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칼 슈미트의 책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Governing by Debt에서 라자라토는 슈미트가 정의한 노모스의 세 가지 뜻 – appropriation, distribution, and production – 에 주목하면서 자본주의의 국면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밝혔는데, 그 논의가 흥미로워 슈미트의 국역서들을 찾아보았다. 1995년에 대우학술총서로 출간된 『대지의 노모스』(최재훈 역)는 라자라토가 인용하는 책 말미의 부록을 누락하고 있었다. 살짝 실망하여 다른 책들을 보다가 읽게 된 책이 바로 『땅과 바다: 칼 슈미트의 세계사적 고찰』(꾸리에)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42년에 출판되었다.

  먼저 구어체로 쓰인 문체가 특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슈미트가 딸에게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한국말로 옮긴 것이었다.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은 제목을 갖고 있지 않아서 목차만 보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의 과학적 사상과 구약의 신화에서 추출된 개념들을 통해서 서양사를 직조하는 슈미트의 안목이 탁월하다.

 

1.

  “인간은 땅의 존재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오니아 자연철학 시대의 4원소 -, , 공기, 로부터 시작하여, 욥기(40-41)에 나오는 LeviathanBehemoth를 차용하면서 19세기 말까지의 세계사를 양자간의 투쟁, 곧 대양(권력)과 대륙(권력) 간의 투쟁으로 흥미진진하게 해석한다.

  1000년경부터 지중해를 지배했던 베네치아, 브로델이 말하는 장기 16세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가장 앞선 조선기술과 고래잡이를 했던 네덜란드(6), 16세기 후반부터 사략선을 앞세워 가톨릭 세계권력인 스페인을 결국 격퇴하는 대양 주름잡이영국(7-9)까지 오늘날 세계체계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국가들의 등장이 바다의 제패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 영국은 이전의 대양 권력들과는 달리 전지구적 차원에서 공간혁명, 곧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척도, 준거뿐 아니라 공간 개념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키는 혁명을 성취한다(10, 72). 그 이전의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 1세기의 로마 제국 확장, 십자군 전쟁이 문화적 전환과 동반된 공간의 확장을 초래하였다면, “로마 제국의 멸망, 이슬람의 확산, 아랍과 터키의 침략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육지화와 공간의 수축을 야기했(11, 77).

  16-17세기의 신대륙 발견과 세계 일주는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지구적 규모의 공간혁명을 발생시켰다. 이제 지구가 둥글며 태양을 공전하고, 우주는 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서 중력의 법칙 덕에 인력과 척력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추론이 확고부동한 경험이자 실체적 사실로 자리매김된다. 이로부터 이전까지는 낯선 관념이었던 비어있는 공간을 인식하고, 자신과 세계가 그 빈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2, 81-3). 새로운 공간 개념의 등장은 중세 고딕 예술이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2.

  슈미트는 13장에서 모든 질서란 결국 공간의 질서라고 하면서, 근본적인 질서, 노모스를 각주에서 짧게 정의한다. 14장부터 그는 유럽이 신대륙을 (원주민으로부터 강제로) 취득하고, 나눠갖기 위해 서로 싸우는 과정 속에서 노모스의 세 가지 의미 취득, 분배, 생산과 소비 가 적극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소위 신대륙의 발견 이후의 역사를 종교전쟁으로 폭발한 기독교 정복자들 간의 갈등,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세계투쟁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흙과 물이라는 원소의 대립과 연결시키는 그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러한 대립을 진정한 동지-적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것에 관한 그의 대표적 논의와 연결시킨다.

  16-18장은 홉스봄이 19세기 3부작을 통해서 다룬 영국 헤게모니의 등장과 성숙 과정의 핵심을 압축적이면서 속도감 있게 서술한다. 영국의 대양 취득, 이에 기반한 자유무역 제국주의, 그리고 산업혁명이 다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땅과 바다의 원소적 관계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왜인지 아니? 거대한 물고기였던 리바이어던이 이제 기계로 변신했기 때문이야. … 기계는 바다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지. 대양 권력의 위대함을 불러내던 대담무쌍한 인간의 힘이 이전까지의 의미를 잃어버렸지” (119-120).

 

그리고 그는 이 산업혁명이 영국 세계권력의 비밀이었던 진정한 해상적 실존의 핵심을 타격하였다고 한다.

  19-20장은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산업화 국가의 추격 과정, 2차 산업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는데, 이 때 등장한 공군력은 땅과 바다에 이어 새로운 차원을 점령한다. 무기, 교통수단, 척도, 규범 등에서 또 한 번의 공간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흙과 물에 이어 공기 혹은 불이라는 새로운 원소의 등장으로, 혹은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에 이어 세 번째 거대한 새가 등장했다고 특징지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16-17세기에 진행된 공간혁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파급력이 큰 공간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영국의 바다 취득의 토대가 사라지고, 당시까지의 대지의 노모스 역시 사라지고, 인간 실존의 변화된 척도와 관계들이 새로운 노모스를 강제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세계의 종말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는 노모스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낡은 노모스의 사멸과 새로운 노모스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3.

1981년에 쓰여진 후기에서 슈미트는 가족의 삶이 경작지인 땅을 필요로 하듯, 산업은 외부로 부흥하기 위해 바다를 필요로 한다는 헤겔의 『법철학 요강』 247절을 인용하면서, 눈 밝은 독자들은 243-246절이 맑스주의를 통해 전개되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 책이 247절을 전개시키려 했다는 것을 발견하리라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헤겔의 『법철학』을 찾아보았다. 『법철학』은 1820년에 출판되었고, 360절로 되어 있는데, 본론은 법/권리, 도덕, 인륜의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3부 인륜은 가족, 시민사회,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슈미트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32장 시민사회의 뒷부분에 해당된다. 243절은 시민사회에서의 부의 축적과 노동자 계층의 소외, 예속, 궁핍을, 244절은 노동자계급의 자존감 상실과 천민으로의 전락, 그리고 반대편의 부의 집중을, 245절은 빈곤 구제를 위한 공적 개입과 자율적 시민사회의 원리 간의 대립, 그리고 생산물의 과잉과 소비의 부족, 곧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이야기한 상업공황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후의 절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장과 식민지의 건설로 이어진다.

  오래 전 읽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내용은 이제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법철학』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내 생각에, 슈미트는 『법철학』의 243-246절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예비하고 있다면, 247절은 맑스가 『자본』 저술 전에 계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던 세계시장과 식민지에 관한 저술 계획을 예비한다고 보는 것 같다. 슈미트는 맑스가 계획만 했던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리바이어던이 물고기에서 기계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지구적 공간혁명과 노모스의 교체로 서술한 것이다.

 

4.

  당분간 슈미트나 헤겔을 읽을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땅과 바다』를 읽은 성과라면, 슈미트가 이해하는 노모스의 세 가지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appropriation을 『땅과 바다』와 이전에 번역된 『대지의 노모스』 두 권 모두에서 취득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Appropriation은 보통 전유라는 일상에서는 잘 안 쓰는 말로 번역하는데, “취득이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오지만, appropriation에 함축되어 있는 강제성의 측면이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땅과 바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또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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