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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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무엇이 문제인가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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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분석한 저작으로서 이 책만큼 국내외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책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IMF가 부과했던 구조조정과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넓이를 동시에 지닌 훌륭한 경제학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2.
먼저 지은이들은, 거셴크론의 논의의 독창적 연장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의 비교역사적 특정성을 고찰하고 있다. 거셴크론은 19세기 (개별기업가와 은행에 의해 주도된) 영국, (겸업은행이 주도한) 독일, (국가 주도의) 러시아의 상이한 발전경험을 유형화하면서, 각국의 발전 궤적을 국가간 경쟁이라는 맥락 위에 자리매김한다. 거셴크론은 이처럼 다른 발전 주도 주체의 차이를 후발국에는 부재한 선발국의 이점 – 자본, 테크놀로지, 금융 상의 이점 - 을 “대체”(substituting)하기 위한 후발국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로 이해한다. 지은이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거셴크론의 따라잡기 전략을 “대체” 전략이라 이름 짓고, 이를 20세기의 상황에 응용하여 미국, 일본, 한국의 발전과정에 적용한다. 20세기 일본과 한국의 따라잡기는 19세기 독일과 러시아의 따라잡기 과정과 유사성을 보인다. 상업은행과 종합상사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케이레츠 모델은 독일의 겸업은행이 했던 역할과 유사하며, 일본보다 사적 부문이 훨씬 더 취약했던 한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러시아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대체전략을 통한 따라잡기를 시도했던 일본이나 한국과는 달리, 싱가포르와 타이완은 선진국의 이점을 제도적 배열을 통해 대체하기보다는 “보완”(complementing)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3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중심적 역할은 공통적으로 드러나지만, 보완전략을 취했던 싱가포르와 타이완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벌이 주요 산업화를 담당하게 된다. 국유화된 은행은 국가와 재벌의 관계를 매개하는 주요 고리였다. 지은이들이 “주식회사 한국 (Korea Inc.)”이라고 부르는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는 이처럼 후발국가 한국이 선진경제를 따라잡는 과정 중에 선진경제의 이점을 대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지은이의 분석 초점은 바로 이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에 집중된다.

이 책의 몸통 격인 3장은 1997년 금융위기의 결과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전개와 이에 대한 IMF와 주류경제학의 진단과 처방을 비판적으로 검토, 기각한 후, 그것과 대별되는 자신들의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그것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비효율성과 부패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라고 보고, 구조조정은 이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지은이들은 주류 입장이 구조적 문제를 과장했을 뿐 아니라,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짧은 지면에 경제위기 전개 과정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한다. 1996년부터 현저하게 드러났던 한국 경제의 문제는 무역적자의 폭증이었는데, 이 자체는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라는 주기적 문제였다. 지은이들은 만약 이 주기적 문제에 의해 야기된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 외채의 급증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는 위기를 안 겪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해 구조적 문제로 지목된 산업정책, 정실자본주의, ‘대마불사’ 논리, 재벌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위기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였다기 보다는 과거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추동했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1998년 말 이후의 경제회복도 구조조정 정책의 성과가 아니었으며,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정책은 위기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심화시켰고, 경제회복은 IMF가 한국 정부가 긴축정책에서 케인즈주의적 경제 팽창정책으로 정책선회를 허용하였던 1998년 중반 이후에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외국 자본도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책선회가 가능했던 것은 1998년 하반기 이후의 세계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세계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8월 러시아와 브라질의 위기가 터지고 뉴욕의 헤지펀드인 LTCM이 부도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을 위시한 G7 경제가 이자율 인하와 통화공급 증가를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이 이자율을 낮추고 원화절하를 한 것은 원래 IMF 프로그램에도 들어있지 않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이 콜시장 금리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이 글로벌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실행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IMF와 달리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옛 모델에서 새로운 발전 모델로의 “이행 실패” (transition failure)에서 찾으면서 이를 (1) 발전국가 모델의 쇠퇴, (2) 금융자유화 과정의 실패, (3) 재벌의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적응 실패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4장에서는 5대 재벌들의 ‘빅딜’과 기타 재벌들의 ‘워크아웃’을 통해 이루어진 기업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데, 불공정거래로 지목된 재벌의 내부거래의 금지나 금융기관들이 자산건전성 분류기준(forward-looking criteria)이나 BIS 비율을 준수토록 함으로써 기업 대출을 힘들게 한 것 등이 기대한 효과보다는 비용이 훨씬 더 컸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이 과거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이었던 국가와 재벌의 위험부담 기능을 사실상 해체시키면서 본질상 보수적 자금운용을 할 수밖에 없는 금융부문에게 이 기능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특징은 바로 주요 위험부담 주체의 부재로 요약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미명 아래 강요된 이 특징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인데, 지은이들은 따라잡기 발전 전략을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발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거셴크론의 논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끝에서 지은이들은 한국이 경제위기로 폭발한 “이행 실패”를 딛고 “이차 추격 시스템(second-stage catching-up system)”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경제영역에서 후퇴할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궁극적인 시스템 관리자(the ultimate system manager)로서 경제체제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의 특수성 간의 조정자(media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 해외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권을 다시금 획득해야 하고, 해외 금융에 대한 개방은 국내 상황의 고려에 기반해서 협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를 잘 수행한다면 재벌구조를 해체함으로써 금융 위험을 감소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재벌의 다각적 구조 (diversified structure)에 기반한 내부의 자원동원과 계열사간 상호지원은  바로 재벌의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데,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3.
분석의 철저함이나 주장의 뚜렷함 모두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또한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28년 동안 지속되어온 레이거노믹스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옛날 책 제목이 생각나는데, 오늘날 이 시점 역사의 판단은 IMF와 주류경제학은 틀렸고, 신장섭, 장하준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은이들의 반신자유주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전에 서평을 썼던 책 두 권이 계속 떠올랐다. 하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http://blog.aladin.co.kr/eroica/2157950 )이고, 다른 하나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http://blog.aladin.co.kr/eroica/1948027 )였다. 전자는 금융자유화가 그것이 기대했던 원활한 기업의 자금 조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 떠올랐으며, 후자는 국가가 고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체제를 다시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었을 때 떠올랐다. 세 저작 모두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내가 쉽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 지은이들의 초점은 국가 – 은행 – 재벌의 연계이다. 지은이들이 이 책에서 이 초점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을 테고, 또 이렇게 초점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분석과 주장이 더욱 빛난다. 그러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주요 특징인 국가와 재벌에 의해 부담된 위험은 이 연계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지은이들은 다루지 않는다. 이 연계가 과거 고도 성장을 추동해 온 발전모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은이들의 진단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연계 바깥에 수출을 통한 기업의 이윤실현에 유리한 기회구조 – 세계적으로 팽창중인 시장 – 에 적절한 타이밍에 결합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연계 내부의 주요 위험 부담 주체, 곧 국가가 비용과 위험을 국민들에게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부터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과거 발전모델에 있어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들은 한국 경제 자체의 성숙과 글로벌리제이션이 과거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차 추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은이들의 제안대로 연계 내부를 재정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연계와 연계 외부 간의 채널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지은이들은 국가가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 간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다루고 있지 않다.

지은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시장은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는 폴라니의 인식은 제도주의 경제학의 한 기초를 이룬다. 국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라는 제도적 배열의 변화를 통해 경제 발전과 위기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제도주의 경제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연계 또한 그 외부의 더 큰 사회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며, 만약 2차 추격시스템이 이전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처럼 다시 한 번 하층 계급에게 고통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시장 전제(market despotism)를 통해 위험을 전가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보다도 나을 게 없을 것이다.

어떠한 책을 읽고, 지은이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의 비판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 서평은 결코 지은이들의 이 훌륭한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2차 추격 시스템”으로의 이행이라는 지은이들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연계 내부 자체의 재배열 문제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 장하준, 신장섭에 대한 독자들의 호오 여부는 사실 재벌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재벌 체제의 존속을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인정하면 이들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기각하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지은이들의 대안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어 재벌에 대한 입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국가 - 재벌 - 은행 연계 외부로 전가되었던 위험이 어떻게 재구조화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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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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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 훌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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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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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앙드레 고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예전에 출판되었던 한 편집서(이병천,박형준 편저,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I』)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는 고르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번역이 별로 좋지는 않다. 글쎄 번역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유명한 저서 ‘노동자 계급이여 안녕’(Farewell to the Working Class)의 제목이 불쾌해서였는지, 고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그 책을 펴보니, 줄은 잔뜩 쳐져 있는데, 그 논문들에서 그가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반 바뀌고 집어든 책이 이번에 나온 『에콜로지카』이다. 이 책은 고르가 자살한 다음 해인 2008년에 출판된 책인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과 인터뷰들 중, 고르의 핵심 사상이 잘 표현된 글들을 골라 편집한 Essential Gorz인 셈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깊이보다는 한 학자의 일생에 걸친 작업들의 맛보기인 셈이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그 화해 불가능성
옮긴이는 역자 후기에서 “고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174)고 단언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읽은 고르는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는『자본론』에서 집약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의에 충실하다. 그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를 낳는 두 개의 원천, 즉 대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고갈시킴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수단과 기술을 발전”시킨다(『자본론』1권 15장 마지막 부분). 이에 반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는 “연합된 생산자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집합적 통제를 통해 자연과의 교환을 규제”하는 사회(『자본론』제3권 7부 48장)이다 (150, 59). 이처럼 고르의 생태주의적 지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이질적인 어떤 것을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 아니다. 고르의 생태주의적 입장은 『자본론』내부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언명을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르크스나 고르 모두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상 노동착취적이며, 반생태적이다.

고르가 마르크스와 갈라지는 지점은 자연의 착취를 공통분모로 하여 자본이 노동의 포섭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고르의 비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은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은 일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곧 자본과 노동, 양자는 그들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과 그 생산의 부산물)의 구체적 형태와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오는 보상, 곧 이윤과 임금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된다 (121, 143).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옹호하며,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약탈의 공동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149).

자본주의적 노동의 역사
고르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논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지 노동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140-148). 그에 따르면, 18세기 공장제 수공업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노동은 그저 자연에 복종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을 변형시키고 지배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140). 이는 몰개성적이고 대체가능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야기한다(141).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동일한 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에 기반한 것이다 (35, 141-144). 이 동질적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에 의해서만 노동착취에 대해 저항할 수 있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라는 토대 위에서 일치단결하여 투쟁하게 된다. “계급의 일치감과 소속감이 왕성”했던 이 “영웅적 시기”에 노동운동은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생활비로 ‘충분한’ 임금을 요구하면서, 주로 생존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145-146).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전까지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를 지녔던 소비자들이 점점 더 ‘차별화된 개인적 욕망’을 지닌 소비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소비자의 개성화와 차별화는 산업 판로의 확대를 낳는 동시에 노동자의 결집력과 계급의식을 파먹어” 들었다 (147). 노동과정에서의 존엄성 상실은 높은 임금으로 가능해진 소비 생활에 의해 보상된다. 대략 1973년까지 지속된 포드주의 시기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가 총생산 증가를 상회함으로써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중산층화와 함께 천연자원의 초토화를 가속화시켰다 (147-149).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반경제
이 책은, 포드주의 이후에 일어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야기,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반혁명과 금융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114-119쪽 정도가 예외).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는 대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통화주의적 경제 운용, 감세, 고용의 유연화, 금융 자유화 등을 동반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 시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신자유주의 국면을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영광의 30년 시기에 대한 반동이자 그 시기의 추세에 대한 역전으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고르는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출되는 것으로 본다. 곧 이전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논리적 연장으로 해석된다. 그는 대략 1980년대부터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위기의 원인으로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공학 혁명”을 들고 있다 (114). [Cf. 도미니크 쁠리옹, 『신자본주의』 67-68쪽 참조]

고르는 이 과거 30년 동안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기본 범주, 즉 노동, 가치, 자본이 더는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남들이 다할 줄 아는 보편적 기본 기술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적 주특기와 노하우(비물질적 구성요소)를 통해 생산과정에 기여할 것을 요구 받는다.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투여되는 상이한 질을 지닌 개별 노동의 가치는 더 이상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는 데에 반해 “상징, 이미지, 메시지, 스타일, 유행을 생산하는 비물질적 차원”의 가격은 상승한다 (169).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그 물질성 충만했던 노동으로부터 추론된 가치 개념은 이제 적용 곤란하게 된다. 또 포드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많은 비용을 들여 지식의 사유화와 인위적 품귀화를 통하여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하려는 시도가 소위 지식경제의 출현이라는 트렌드로 관찰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의 비물질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본에게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33). 그러나 “상품의 성격에서 비물질적인 내용이 차지하는 무게가 늘어감에 따라 … 공급의 독점이 점점 자본에서 벗어난다” (37). 정보 혁명은 이전까지 사유되고 독점되었던 비물질적 콘텐츠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복제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물질적 콘텐츠를 교환가치를 상실한 무상의 ‘공유재’로 만들어 버린다 (38). “컴퓨터와 인터넷은 상품의 지배를 기초부터 무너뜨린다” (39).

자본주의적 팽창, 곧 만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혁명은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에 내재해 있는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킨다. 그리고 이는 애초의 기대를 배반하는 反경제라는 역설적 결과를 산출한다. 지식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는 달리 측정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통의 표준에 의해 교환될 수 없는 가치이다 (17). 이 반경제에서 “지식의 ‘가치’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얼마나 전파되는가로 측정”된다 (18). 
 

알라딘 서재질
알라딘 서재는 지식의 반경제의 좋은 예 아닐까? 물론 알라딘 서재를 비롯한 인터넷 사업체(언론, 서점, 포탈)들의 블로그는 블로그에 올라오는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한다 (서재지수). 이 측정된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확증된 경우 시스템에 의해 보상된다 (thanks to). 이를 지식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이라 부른다면 너무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까? 알라딘 서재는 분명 지식을 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논리에 포섭하려는 논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생존을 위해, 곧 자신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인 임금을 위해 노동한다. 알라디너는 서재지수 올라가고, thanks to 받으면 기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알라딘 서재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외도 좀 있는 것 같다). 이는 이 책에서 펼쳐진 고르의 논의를 알라딘 서재에 장난삼아 적용해본 것이다.

나는 고르보다는 회의적이다. 서재질의 미덕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나의 알라딘 서재질이 지식의 상품화 논리에 지적 유희마저 복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의 문제

쓰다 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딴 데로 새버렸다. 사실 고르의 생태주의적 대안의 매력이나 이 책의 번역상의 문제에 대해 꼭 좀 지적할 부분들이 있었는데, 요약과 공상이 너무 길었다. 다 집어치우고 나중에 출판사에서 재판 찍게 되거든 참고하라는 마음으로 대표적인 굵직한 실수 몇 개만 지적하겠다.

- 옮긴이는 154쪽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사이의 비율”로 번역하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이며,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둘 다 불변자본이다. 책 전체에 걸쳐 고정자본이란 번역어는 계속 나오는데 (19, 38, 148, 151, 그리고 또 여기저기) 148쪽의 “물적 설비에 투자된 고정자본”의 경우처럼 고정자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59쪽에서 『자본론』 3권 48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에서 역자는 necessity를 “필요성”으로 번역한다. 이 원문은 내가 갖고 있는 비봉판 김수행의 『자본론』3권 하편의 1011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김수행은 이를 “필연”으로 옮긴다 (내가 갖고 있는 『자본론』은 개역판이 아니기 때문에 좀 그렇지만, 이 부분은 김수행의 번역도 별로 좋지 않다). 분명 necessity에는 필요성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자유의 왕국과 대비되는 필연의 왕국이라는 맥락에서 필요성보다는 “필연”으로 옮기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필요”라는 번역어는 37쪽에서도 나오고, 109-110쪽에서도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결여로 인한 필요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유와 대비되는 필연을 뜻한다고 읽는 것이 올바른 독해일 것 같다.

- 116쪽: “현금가능자산” → “유동성 자산”

- 144쪽: “『노동, 임금, 그리고 자본』” → “『임노동과 자본』”  


같은 출판사에서 앙드레 고르의 유명한 저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책속표지에 선전해 놓았던데, 그 때는 이런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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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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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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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본주의
쁠리옹 지음, 서익진 옮김 / 경남대학교출판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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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같은 책. 가격과 퀄러티 모두 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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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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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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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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